20일만에 산을 찾는다. 술에 쩔어 걸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지만 가다가 돌아오면 그뿐, 길은 항상 열려 있으니 떠날 수 있는 것이다.
군청 마당에 은행나무가 제대로 색깔을 갖추었다.
은행나무 한 그루. 오랫동안 저 자리에서 지나간 사람들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대한민국을 놀라게 할 저 버스는 과연 대한민국을 놀라게 한다. 저 버스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술취한 몸을 흔들어댔다. 마치 술을 마시지 않으면 이 세상이 끝나기라도 할 듯이. 그렇게 세상을 놀라게 하는 것이다.
자굴산의 문턱에서 반기는 것은 저 깡통. 산에 와서 저 깡통을 버리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가 왜 산에 왔는지를 알 수 없는 상황.
그래도 산은 낙엽들을 이고 찬란하게 서 있다. 비가 온 뒤여서 그런지 나무들도 빛나고 알맞게 물든 잎은 알록달록 아름답다.
이렇게 앉아서 사진을 찍은 이유는 땀을 식히고 잠시 쉬어가는 시간을 가지겠다는 무의식의 발로다. 사진을 찍는 시간이 많을수록 피곤하다는 증거다. 드러누워 있는 낙엽들처럼 나도 드러눕고 싶어진다. 땀은 줄줄 흘러내리는데 바람은 차서 머리에 금이 갈 정도로 춥다.
고통을 참을 수 없어 옷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 쓴다. 바람을 안고 다시 길을 걷는다. 걷지 않는다면 그 자리에서 얼어붙을 것만 같다. 닷새째 데리고 다니는 편두통과 추위때문에 들러붙은 두통이 합쳐져서 도대체 두통의 출처를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집에 앉아서 편두통을 느끼는 것과 밖으로 데리고 나와 걸으면서 일정한 주기로 다가오는 고통을 맞는 것은 같은 것일까? 어떻게든 떨쳐버려야 하는 편두통은 동통과 합세하여 그 기세를 마음껏 부리고 있다.
이렇게 자연 속에서 그 고통들이 흩어져 버렸으면 얼마나 좋을까. 흐르는 땀 속에 그 고통의 분자들이 섞여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만만치 않은 모양이다. 떠나지 않는다. 계속 따라다닌다. 친구도 아닌 것이 좋아해 주지도 않은 것이 저만 홀로 좋아서 짝사랑에 빠진 편두통. 한동안 없어졌던 편두통이 왜 생겼을까? 올해만 해도 벌써 몇번째다. 한손으로 꼽을 수 없을 지경이니, 편두통과 함께 한해를 보내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바람덤. 나뭇잎들이 다 떨어지고나니 그 모습이 드러난다.
억새와 함께 우뚝솟은 바위들을 찍으려했는데 바위의 모습은 어디로 갔을까? 저 멀어져가는 산들은 안개처럼 희미해져 버렸고 떨어지다 만 나뭇잎들만 서로 부딪히며 서걱서걱 마른소리를 낸다.
안개 덕분에 먼 산들을 볼 수 없다. 가까이에 있는 풍경들만 눈에 들어온다.
걸음을 걷다가 깜짝 놀란다. 집없는 달팽이 한 마리. 누군가 달팽이는 왜 집을 지고 다니느냐고 했지만 이 녀석은 집도 없다. 뱀처럼 혼자서 다닌다.
사실 천왕봉을 보러 왔었다. 시야가 확보되지 않아 지리산의 모습을 볼 수 없다. 지리산에 눈이 내렸다는 소식을 듣고 지리산을 볼 수 있을까해서 자굴산을 찾았지만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안개만 실컷 보고 간다.
하산길에는 어느새 햇살이 내려와 있다. 따뜻하고 푸근하다. 편두통은 떠나지 않을 모양이다. 따뜻한 햇살에 동통은 사라졌고 원래 있었던 편두통만 자리를 지키고 있다. 끈질긴 녀석이다. 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머물러 있을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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