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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흔적

2012. 11. 24(토) 자굴산, 아주 맑음

by 1004들꽃 2012. 11. 24.

환장할 일이 아니고 무엇이랴. 술을 마시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잦아서 마셨다.

일주일간 누적된 숙취가 온 몸을 짓누르는 아침. 걷지 않는다면 곧 무너질 것 같기 때문에

잠이 덜 깬 상태에서 또 길을 나서는 것이다.

 자굴산을 찾았는데 날씨가 너무 맑고 좋다.

 어쩌면 지리산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설렘으로 가슴이 두근두근.

 눈이 아직 녹지 않았을까?

 산의 초입에서 나무들 사이로 맑은 하늘이 보인다.

 그림으로 이 장면을 그려야 한다면 배경부터 그려놓고 그 위에 나무와 풀들을 그려야 할 것이다.

 나뭇잎의 사이사이에 한 점도 흐트러짐없이 배어있는 하늘을 나무부터 그려놓고 끼워 맞춘다면 그것은 불가능할 것이 아닌가.   

 태풍의 잔해는 잔인하다. 뿌리째 드러난 저 나무는 겨울을 넘기고 찬란한 봄을 맞이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땀으로 젖은 등은 가끔씩 불어오는 찬바람에 식어가고 바람들은 봄을 준비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매일 분다.

 바람 사이로 사람들은 지나갈 것이지만 그 바람을 집으로 데려가지는 못한다.

 자굴산의 바람은 자굴산에서 맞아야 하고 지리산의 바람은 지리산에서 맞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말장난 할 때가 아닌데 계속 말장난이다.

 풍부한 경험에 의해서 우러나오는 마음을 하얀 백지에 옮겨 적어야 할텐데 경험이 부족하여 가난한 나는 항상 말장난으로 말을 부린다.

 그 말들은 말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이다. 때로는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결국 버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더 가난해지는 것이다.

 바람덤을 지나가는 관문에도 푸른 하늘이 내려와 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과연 저 색깔을 그려낼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가능할 것 같지 않다.

 그래서 산을 찾는 사람들은 이렇게 맑은 날이면 부지런히 카메라를 들이댄다. 

 이렇게 억새와 푸른 하늘과 나무들과 저 먼 산들이 조화를 이루는 장면들 앞에서는 그저 넋을 잃고 바라보는 수밖에..

 드디어 설레는 가슴을 부여잡고 지리산을 쳐다보았는데~~ 아! 멋진데 카메라는 눈이 멀었나보다.

 내 눈에는 그렇게 가까이 보이는데도 카메라의 눈은 저렇게 멀다. 눈은 다 녹은 것 같고,

 그래도 맑은 날씨 덕에 지리산의 형상을 볼 수 있는 것은 축복이다. 

 

 내려오는 길에 늘어선 앙상한 나뭇가지들.  

 활엽수들이 잎을 떨구어 버린 겨울에는 그동안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소나무들이 제대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앙상한 활엽수들 덕분에 소나무들은 더 푸르게 느껴지는 것이다.   

 까딱했으면! 밟을뻔했다. 이 늦은 계절에 쑥부쟁이가 끈질긴 생명의 끈을 놓지않고 있다.

 선명한 보랏빛이 햇빛에 바래 제 색깔을 잃었는데 그건 순전히 카메라의 빛조절이 잘못된 탓이다.

 저 자리에서 아주 선명한 보라색을 나는 보았기 때문이다.

 억새밭을 지나간다.

 억새 너머로 또 푸른 소나무.

 또 태풍의 잔해.

 낙엽.

 나뭇잎 때문에 길이 미끄러웠지만 아무도 다니지 않는 길을 걷는 기분은 상쾌하다.

 내려오는 길에 단 한 사람도 만나지 않았다. 이 길이 오로지 나의 길이 되는 순간이다.

 길을 혼자만 소유하고 싶으면 평일 조금 늦은 시간에 와 보라. 자굴산 산길에는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쑥부쟁이들이 미쳤나보다. 추워서 얼어죽을 것 같은 날씨에도 저렇게 찬란하게 피어있으니~~~~

물을 보면 시의 제목이 생각난다.

 " 물 위에 쓰는 시" 물 위에 어떻게 시를 쓰겠는가.

 쓰고 나면 떠내려 가거나, 흩어져 버린다.

 물은 그 속성이 평면을 유지하려 하기 때문에 아무리 송곳으로 찔러도 모든 상처를 치유하고 곧 평면을 이룬다.

 도대체 물 위에 어떻게 시를 써야 할까?

저렇게 사진을 찍어서 그 위에 시를 쓰면 될 것 아닌가?

유치한 생각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런 방법을 쓰고 있다. 인터넷 시화전 말이다.
나를 보고 자꾸 울고 있다고 사람들이 말을 하지만 물 위에 쓰여지지 않는 시를 보고 어떻게 울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저녁 노을이 짙게 깔리는 시간,

 공터에서 놀던 아이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없을 때 돌아갈 집이 없는 어린 아이를 생각해보라.

 쓸 수 없는 물을 쳐다보며 쓰기를 고집하는 사람의 마음이나 다를 바 없을 것 같다.

 그래서 "물 위에 쓰는 시"라는 제목으로 시를 한 편 만들어서 저 물위에 깊이 박아야겠다.

 떠내려가지 않도록 아주 단단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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