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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의령문인협회 2007 문학기행

by 1004들꽃 2008. 5. 28.

의령문인협회 2007 문학기행


<시가 청량산으로 가다> 경상북도를 찾아서



김양채

 

 

 

여행을 떠나며


2007년 6월 9일 토요일 맑음.
여름이 성큼 다가와 산과 들을 온통 푸르게 물들여 놓은 싱그러운 계절이다. 자연을 아름답게 노래하는 의령문인협회의 문학기행을 축복해 주기라도 하듯 산들바람까지 불어준다. 지난해 강원도 정선을 다녀온 기억을 떠올리며 설레는 마음으로 문학기행 출발 장소로 향했다.
군민 문화회관에 도착하니 정영길 회원만 도착하였고 아직 다른 회원들은 도착하지 않은 상태다. 설레는 마음 때문에 너무 빨리 도착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며 시계를 보니 10시 5분전. 그렇게 빨리 도착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10시가 다 되어 가는데도 회원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10시 30분이나 되어야 출발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10시 가까이 되니 회원들이 거짓말처럼 속속 도착하는 것이 아닌가. 10시 2분. 마지막으로 승합차와 함께 윤재환 회장, 이광두 사무국장, 한삼수 회원, 강명자 시인이 함께 등장하였다. 총 인원 13명. 출발! 이라는 말과 함께 박래녀 회원과 장인숙 회원이 동시에 “영옥이는 ?” 하는 게 아닌가. 어제까지만 해도 합류하지 않겠다던 허영옥 회원은 전화 한 통에 마음이 바뀌어 기행에 합류하기로 하였고 의령고등학교 앞에서 탑승하기로 했다. 여행이란 언제나 셀렘이 있는 것. 마치 수학여행을 가는 학생들처럼 떠들어댔다. 의령고등학교 앞에서 잠시 허영옥 회원을 기다리던 중 이미순 회원이 문학기행을 같이 못가 섭섭하다면서 음료수를 사 놓았으니 가져가라는 전화가 와서 차는 다시 군민문화회관으로 갔고 나는 혼자 의령고등학교 앞에서 허영옥 회원을 기다리기로 했다. 잠시 후 허영옥 회원이 나타났고 우리를 경상북도로 데려다 줄 승합차도 잠시 후 도착하였다. 드디어 진짜 출발을 하게 되었다.
렌트카는 한삼수 회원이 빌려왔고 윤재환 회장과 한삼수 회원이 운전을 번갈아 할 수 있도록 보험에 가입했단다. 우리는 운전을 해 주고 싶어도 해 주지 못하는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의령문인협회의 <시가 청량산으로 가다> “경상북도를 찾아서” 문학기행은 시작되었고 윤재환 회장을 비롯하여 김영곤, 박래녀, 장인숙, 김양채, 이광두, 허영옥, 정삼희, 곽향련, 한삼수, 황순영, 정영길, 서창은 회원, 그리고 특별 출연 강명자 시인. 모두 14명이 출발하게 되었다. 남녀 7:7로 기막히게 짝이 맞았다.



설렘을 안고 떠나는 여행


허영옥 회원 덕분에 출발 예정 시간을 5분 지체하게 되었다. -회원들이 하는 말이 5분이고 실지로 약 30분 지체된 것 같다. 국도를 타고 경상북도를 향했다. 셀레는 마음과 들뜬 마음이 합해져 회원들이 입을 다물지 못한다. 이런 분위기에 기름을 부어 볼까하는 마음에 의령을 벗어나기도 전에 술을 돌리기 시작했다. 맥주, 매실주, 소주 등 다양한 술을 돌리기 시작하니 어느새 회원들은 얼큰하게 취하여 왁자지껄 분위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올해 문학기행 목적지는 경상북도 봉화군의 청량산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의령의 시가 청량산을 간다. 한참을 달려가니 경남 지역과 다른 풍경들이 눈에 들어온다. 작년에는 3월에 출발했기 때문에 북쪽으로 가면서 시간대별로 계절의 변화를 느꼈지만 이번에는 익을 대로 익은 산과 들의 모습에서 계절의 변화는 느끼지 못했다.
휴게소에 들러 잠시 커피 한 잔씩 마시고 다시 차를 달려 경상북도 안동에 들어섰다. 원래 계획은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지만 차안에서 술을 많이 마신 탓도 있고 점심시간이 조금 지나더라도 안동에 가서 편안하게 앉아 안동 찜닭을 먹기로 했다. 그 고장에 가면 그 고장에서 가장 유명한 먹거리를 맛보는 것도 식도락을 즐기는 방법이지 않을까.
안동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주차할 곳을 찾았으나 마땅히 주차할 곳이 없어서 시내를 빠져 나가 첫 목적지인 도산서원 방향으로 차를 달렸다. 가는 길에 그 유명한 “찜닭집”이 있으면 들어가기로 했다. 그런데 가도가도 찜닭집은 나타나지 않고 횟집이나 매운탕 집만 나타나 찜닭을 포기하려는 순간 반가운 손님을 초대하듯 도로변 간판에 “찜닭”이라는 글자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민속식당”이었다. 민속식당에 들어서서 주인에게 “찜닭”이 되느냐고 물었더니 약 40분 정도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찜닭을 시키고 기다리는 동안 또 술을 마시면서 담소를 나누었다. 술은 기다리는 시간을 단축시켜주는 마법사다. 소주에 맥주를 섞어 소위 폭탄주를 마시는 동안 찜닭이 완성되어 우리들 앞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솔직히 나는 그 맛이 좋았는지 알 수가 없다. 모두들 배가 많이 고팠기 때문에 맛은 뒷전에 두고 허겁지겁 먹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더 진하게 다가왔다.
찜닭을 기다리는 동안 김영곤 회원의 장난기가 발동했다. 문학기행에 참여한 남자와 여자 비율이 같기 때문에 각각 짝을 정하여 관리(?)하기로 했다. 종이에 번호를 적어 남자, 여자에게 각각 돌리고 같은 번호를 줍는 남녀가 짝이 되는 것이다. 번호를 부를 때마다 짝이 된 두 사람이 일어나 인사를 하도록 했다. 모두 짝이 정해지고 각각 러브샷을 하고나서 각각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퇴계 이황 선생을 찾아서


점심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다시 여행의 목적지를 향해 차를 달려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있는 도산서원에 도착했다. 푸르른 산의 정취와 어우러진 도산서원은 퇴계 선생이 타계하자 문인들의 발의에 의해 선생이 건립한 도산서당이 있던 자리에 건립하였다. 입장료를 지불하고 서원으로 향했다. 지나가다 보니 문화유적 해설사가 대기하는 건물이 보였다. 문 앞에 신발이 세 켤레가 놓여 있어 용감하게 문을 두드렸다. 안내를 해줄 수 있는지 물었더니 당연히 해드려야지요 하면서 해설사 한 분이 이동식 마이크를 목에 걸고 나왔다. 40대 중반이 조금 넘었다 싶은 여자 해설사였다. 여자 해설사가 등장했기 때문에 당연히 한 마디가 나와야 할 시간이었다. 누구보다도 빠르게 윤재환 회장의 한 마디.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성함이 어찌되는지요? 이름표를 보니 “최정숙”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도산서원 입구 맞은편에 위치한 시사단에 대하여 먼저 설명을 들었다. 시사단은 시도유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어 있고 조선시대 영남지방의 과거시험 장소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건물이다. 서원으로 들어가 설명을 들으면서 이동해 가던 중 한삼수 회원이 질문이 있다고 하면서 “왜 그렇게 바쁘게 설명을 하시는지요?”하고 물었다. 해설사는 웃으면서 해설을 부탁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바쁘기 때문에 빨리 해설을 해 달라고 해서 버릇이 된 모양이라고 했다.
도산서원은 건물은 모두 15동으로 이루어졌고 당시 문인들을 배출하는 영남지역 학문의 전당이었다. 서원 내의 건물은 사당인 상덕사, 강당인 전교당 그리고 학생들의 기숙소인 동재와 서재가 있고 그 밖에 도서관의 기능을 한 동광명실과 서광명실 등이 있다.
책을 보관하던 곳이 또 한 곳이 있는데 완락재라는 곳이다. 이 곳은 퇴계 선생이 거처하면서 학문을 연구하던 방이며 방의 왼쪽 부분을 확장하여 서가를 설치하여 1,000여 권의 책을 보관하였다고 한다.
동서광명실을 지나 도산서당으로 갔다. 도산서당은 서원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이황이 직접 설계도를 그렸다고 한다. 이 곳에서 퇴계 선생을 연상하며 방안으로 들어가 창문을 내다보며 김영곤 회원과 나는 각각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는다고 퇴계 선생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외 퇴계 선생이 생전에 쓰던 유물이 전시되어 있는 옥진각이 있는데 전시되어 있는 유물 중 혼천의에는 지금 관측할 수 있는 모든 별자리가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놀이기구의 하나인 투호가 전시되어 있었는데 새 지폐로 바뀌기 전 천원 권 지폐 앞면에 그려져 있는 투호 그림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뒷면에는 도산서원 전경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약 한 시간 정도의 설명을 듣고 해설사와 작별 인사를 했다. 귀찮아하는 기색 없이 끝까지 최선을 다해 설명해 주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긴 여행을 다녀 온 기분이다. 다음 목적지는 퇴계종택이지만 이육사 문학관이 문을 닫을 수도 있기 때문에 이육사 문학관을 다녀온 후 퇴계종택으로 가기로 했다. 퇴계종택은 퇴계 선생의 종가이다. 원래 있던 집은 없어지고 선생의 13대 손 하정 공이 옛 가옥의 규모를 따라 새로 지었다고 한다. 종가에는 현대식 농기구도 보이고 자손들이 기거하고 있었다.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로 가다


이육사 문학관은 육사 탄신 100주년을 맞이하여 2004년 7월에 개관하였고 육사 선생의 고향인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에 있다. “육사陸史”는 그의 아호인데 1927년 첫 번째 투옥 당시 수인囚人번호였던 64번을 취음取音하여 지었다고 한다. 그의 대표시 청포도를 읽어 보자.


청포도

이육사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먹으면
두 손을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육사시집(陸史詩集), 서울출판사, 1946>


민족시인, 저항시인 육사 이원록은 1904년 안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성이고 조금 전 다녀온 도산서원에 모셔진 퇴계이황 선생의 14세손이다. 문학관을 들어서면 그의 시 청포도가 벽면에 전시되어 있다.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지 손님을 끌기 위한 상업적 요소는 보이지 않는다. 주변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문학관 주변에는 청포도 샘과 선생의 생가를 복원해 놓았다. 문학관 내에서 이육사에 대한 영상자료를 관람하고 바깥에 있는 생가와 시비 앞에서 사진 촬영을 했다.
시대가 시인을 낳는 것인지. 시인이 시대를 이끌어 가는 것인지. 육사가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그의 40평생 마지막 10년 동안이었고 그의 나이 서른이 넘어서였다. 그에 의하면 시는 행동이며 진정한 의미의 참여라고 한다. 그는 식민지적 압력에 대항하고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하여 대륙을 전전하며 숱한 고난과 역경을 체험하였다. 이러한 역경과 인고의 극복노력은 기다림의 철학과 초인 의지로 승화된다. 온 몸을 내 던진 헌신적 투쟁의 수형(受刑)의식으로 일제에 저항하여, 그러한 인고와 생명의 절정에서 끝없는 기다림과 초인(超人)에 대한 열망을 시로써 형상화함으로써 보다 진정한 저항 방식을 보여 준 것이다.[이육사 문학관(http://www.264.or.kr), 육사의 문학 중에서]
문학관을 나오니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문학기행을 하고 있는 일행을 만날 수 있었다. 우리들과 비슷한 일정이었다. 서울에 있는 국어교사들의 모임인 것 같았다. 그들의 문학기행 자료집과 우리의 문학기행 자료집(시가 청량산을 가다)을 서로 교환하고 인사를 나누고는 다음 목적지인 퇴계종택을 둘러보고 농암종택을 찾았다.
농암종택은 조선 중종 때의 문장가인 농암 이현보 선생이 살던 집으로 낙동강 상류 청량산 자락인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에 있다. 농암종택으로 가는 길 주변으로 깎아지른 듯한 산과 협곡이 줄을 이었고 가뭄이 심한 요즈음에도 강에는 맑은 물이 거센 물살을 일으키며 흐르고 있었다. 남쪽에서는 보기 드문 풍경이었다. 그리고 남부지방 시골 풍경은 이 시절이 되면 대부분 모내기가 된 논을 볼 수 있는데 논은 거의 볼 수 없었고 대부분 산을 개간하여 담배나 고추를 재배하고 있었다. 곡창지대라는 말이 이런 연유에서였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농암종택은 새로운 건물을 짓느라 한창이었다. 대부분 새 건물이었고 건축 중인 곳도 여러 곳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니 이육사 문학관에서 보았던 일행들이 저 멀리에 보였다. 하루를 묵어갈 모양이다. 도산서원에서 받았던 엄숙함 같은 것은 느낄 수 없었고 주변에 레프팅을 즐기는 사람들이나 이육사 문학관이나 도산서원을 찾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일종의 민박마을이었다. 나중에라도 이러한 별장 하나 가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봉화군 청량산으로


농암종택을 뒤로 하고 첫날의 최종 목적지인 청량산 주변에 있는 강변민박을 향해 출발했다. 어둠이 서서히 내려오기 시작하였고 차창 밖으로 스쳐가는 풍경들이 한가롭게 보였다. 보는 사람들의 마음이 한가로우면 그 대상도 한가롭게 보이는가 보다. 모처럼 떠난 여행에서 모두 잊어버리고 즐기다보니 주변 모두가 한가롭게 보인다. 담배와 고추밭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도 하나의 풍경으로 다가온다.
강변민박은 청량산 도립공원 입구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는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작년 문학기행 때는 밤중에 도착하여 숙소를 찾기 위해 애를 먹었지만 이번에는 해가 채 지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하여 숙소를 찾는데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았다.
2층에 있는 방 세 칸을 잡았고, 여장을 풀고 저녁 시간 전까지 각자 자유시간을 가졌다. 베란다에 탁자를 배열하고 멀리 보이는 청량산을 쳐다보고 있자니 정영길 회원이 또 술이 고픈 모양이다. 간단한 안주에다 소주 한잔하자고 한다. 깨강정을 꺼내 놓고 소주가 몇 순배 돌았다. 해가 지면서 점점 추워졌다. 싸늘한 강바람에 모두들 어깨를 움츠렸다. 바람을 바로 맞는 쪽에 있었기 때문에 더욱 추위를 느꼈다. 회원들은 일제히 바람을 막을 수 있는 반대편 쪽에 자리를 만들자고 했다. 단지 몇 시간 차를 타고 북쪽으로 온 것뿐인데 이렇게 기온 차이가 심할 줄은 몰랐다. 대한민국의 땅이 이렇게 넓은가하는 의구심을 가지기도 했다.
한삼수 회원이 준비해 온 삼겹살을 구워서 안주로 삼아볼까 하다가 모자랄까 싶어 우선 아래층 식당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작년 문학기행에서 김종홍 회원의 불쇼를 기억했기 때문에 당연히 모자랄 것으로 판단하여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나서 2부 행사를 하기로 했다. 김종홍 회원의 불쇼를 기억한다면 당연히 독거노인을 떠 올릴 수 있을 것이다. “독거노인”의 뜻을 알려면 의령문학 10호 문학기행편을 읽어보면 된다.
식사를 마치고 민박집의 베란다에 모였다. 드디어 추억의 삼겹살 파티 시간이 돌아 온 것이다. 시계 바늘이 아홉 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저녁을 먹어서 인지 구미가 당기지는 않았다. 더구나 뱃살이 자꾸 두꺼워지는 것을 느끼는 요즈음 더욱 그러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빈 술병이 많아지고 회원들의 목소리는 그에 비례하여 커지고 있었다. 한 가지 문제점은 여성들이 씻느라고 함께 자리를 하지 못하고 한 명씩 한 명씩 합류하는 터라 전체적인 어울림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와중에도 김영곤 회원은 술병을 들고 회원들에게 술을 권하면서 분위기를 띄웠다.
이윽고 모두 자리를 같이 한 시간. 방으로 자리를 옮겨 시낭송회를 시작하게 되었다. 당연히 김영곤 회원의 특유의 익살을 곁들인 사회로 시낭송회가 시작되었다. 회원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회원들은 시키는 대로 해야만 했다.(?) 첫 번째로 낭송을 하게 된 회원은 황순영 회원. 황순영 회원이 주문받은 시낭송은 문학기행 책자 7페이지 봉화군의 군민헌장 다섯줄이다. 모두가 시를 낭송하도록 시킬 것이라 생각했지만 군민헌장을 낭독하라는 의외의 돌출 발언에 박장대소를 하였다. 다음 회원은 21페이지 조지훈의 시를 낭송하도록 했으나 글자가 너무 작아 읽지를 못했고, 다음 회원은 페이지에 나와 있는 대로 읽지 못하여 퇴박을 맞았다.
무엇이 문제냐 하면 “홍길동/의령문인협회 회원”이라는 것을 읽을 때 이름 옆에 “/”를 “슬래쉬”라고 읽고 의령문인협회 회원이라고 읽어야 하나 이름을 읽고 바로 의령문인협회 회원이라고 읽었기 때문이란다. 또 27페이지라면 “-27-”은 빼기27빼기 또는 줄27줄이라고 읽어야 한단다. 모든 회원들이 “슬래쉬”를 외치며 밤이 깊어갔다. 한삼수 회원의 노트북에 담긴 수필 한 편 낭송을 끝으로 시낭송회를 마치고 본격적인 시작 토론에 들어갔다. 지금까지 자신의 시작에 대한 문제점. 그리고 다른 사람의 시를 읽는 자세 등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지만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술과 함께 망각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일부 회원들은 술이 모자라 다시 술과 컵라면을 사와서 마셨고 일부 회원들은 청량사에 갔다 온다고 밖으로 나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청량사는 산 중턱에 있었고 그들이 본 청량사는 민박집이었다.



청량산에 오르다


윤재환 회장은 혹시 산에 오르는 회원들이 없을까 싶은 마음에 내일 아침 산에 갈 수 있도록 준비하라면서 몇 번이나 강조 했다. 하지만 이런 상태로는 새벽에 일어나 산행을 하지 못하겠다고 잘라 말하고 잠을 청하였다. 내 마음의 상태가 그러해서였는지 몰라도 다음날 아침 산행을 할 회원은 한 손에 꼽을 정도로 밖에 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잠이 들면서 하루는 마감되고 말았다.
2007년 6월 10일 새벽 5시 30분. 인기척에 눈을 떴으나 엊저녁의 숙취가 풀리지 않아 이불을 얼굴 위로 끌어당기고 드러누워 있었다. 그런데 머리 위로 발이 왔다갔다하는 통에 더는 잠을 청하지 못하고 일어나고 말았다. 시계를 보니 5시 50분.
밖으로 나오니 차가운 아침 공기가 전날의 피로를 던져버리기라도 하듯 상큼하게 다가왔다. 나와 같이 따라 나온 서창은 회원은 천천히 걸으며 청량산 주변의 풍광을 감상하는 듯 했다. 맑은 공기를 맞으며 걷다보니 뛰고 싶은 생각이 들어 서창은 회원을 뒤에 두고 청량산 입구까지 뛰어가기로 했다. 천천히 뛰어가니 얼굴과 팔에 스치는 차가운 공기가 기분을 좋게 했다. 중간쯤 가니 민박집 입구에서 차가 출발하는 소리가 들렸다. 뛰기를 멈추고 천천히 걸어가다 보니 어느새 차가 도착했다. 차를 타고 조금 가다보니 나보다 더 일찍 출발한 사람이 있었다. 박래녀 회원과 강명자 시인이다. 모두 같이 탑승하여 청량사 입구에 도착하여 주차를 하고 청량산 정복을 위하여 발을 내딛었다. 가만히 보니 전 회원이 다 온 것은 아니었다. 따져보니 이광두 사무국장, 장인숙, 곽향련 회원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뱀띠 회원만 참석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청량산 12개의 고봉 중에서 해발 840m인 자소봉을 정복한 후 입석으로 하산하기로 했다. 청량산은 멀리서 보았던 바와 같이 상당히 가팔랐다. 절에 도착할 때까지 내리막이 한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산을 오르는 도중 누군가가 술 냄새가 많이 난다고 했다. 범인은 바로 나다. 지난밤 마신 술 때문인지 숨을 쉴 때마다 알콜 냄새가 진동했다. 그런데도 이런 상태로 산을 오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맑은 아침공기를 마시고 머리 속이 상쾌해진 탓인지 가뿐하게 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초여름 새벽의 상큼함은 일찍 일어나는 자만이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이번 문학기행에서 청량산 등산은 민박집에 남아있는 세 사람에게는 없는 코스가 되었다. 산을 오르는 11명에게만 주어진 아주 특별한 선물인 것이다. 어느새 무성해진 나뭇잎 사이로 흘러나오는 초록이 가슴을 가득 채워준다.
여기서 잠깐 청량사를 소개한다. 청량사는 경상북도 봉화군 명호면 북곡리에 자리 잡고 있다. 태백산맥의 줄기인 중앙산맥의 명산으로서 산세가 수려하여 소금강이라고 한다. 거대하고 빽빽한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열두 봉우리가 나그네의 눈길을 잡는다. 그 연화봉 기슭 한 가운데 연꽃처럼 둘러쳐진 꽃술 자리에 자리 잡은 청량사는 신라 문무왕 3년(663)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송광사 16국사의 끝 스님인 법장 고봉선사(1351-1426)에 의해 중창된 천년 고찰이다. 청량사의 법당인 유리보전은 창건연대가 오래되고 짜임새 있는 건축물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7호로 지정되었다.
또한 퇴계 선생과도 인연이 깊은 곳으로 선생의 평생을 이 산에 올라 학문을 탐구했으며 꿈에서도 이 산을 잊지 못했다고 한다. 이렇듯 청량산은 퇴계 선생의 삶의 동반자이자 스승이었다. 퇴계와 청량산의 인연은 1513년 2월 13세의 나이에 숙부인 송재(松齋) 이우(李偶, 1469~1517)가 조카와 사위 조효연(曺孝淵), 오언의(吳彦毅)와 함께 청량산에 들어가 독서를 하면서부터 시작되었고 이때부터 청량산과 퇴계 선생과의 관계는 평생에 걸쳐 이루어진다. 그는 이곳에서 경전의 탐구 및 내면적 수신에 힘써 『퇴계성리학』을 완성했다. 청량산은 퇴계에 의해 새롭게 의미가 부여되고 퇴계학의 성지로 거듭났다.
입구에서부터 연등이 달려있어 조금만 올라가면 절이 나올 것이라는 예상은 여지없이 깨어지고 끝없이 이어진 오르막은 회원들을 지치게 하기에 충분했다. 끝없는 오르막이 마치 인생의 시작을 위해 겪어야 할 고뇌처럼 느껴졌다. 불심을 얻기 위해 청량사를 찾아가는 동안 산중에서 해탈의 경지를 맛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새 청량사에 도착했지만 묘하게도 땀이 한 방울도 흐르지 않았다. 몸의 신진대사가 아직도 활성화되지 않은 탓이리라. 음수대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한 바가지 떠다 마시고 절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리가 도착한 시간이 이른 시간이었지만 마사토가 깔린 절의 마당은 깔끔하게 비질이 되어 있었다. 눈 감고 가만히 들어보니 여기저기서 스님들이 이야기하는 소리가 바람에 실려 들려왔다. 보살 한 분이 마당 가운데 세워진 탑 주변을 청소하고 있었다. 소리 없는 움직임에 마치 승무를 연상시키게 했다.
이제 본격적인 등산길에 접어들었다. 잠시 평탄한 길을 걷는가 했더니 깎아지른 듯한 계단길이 끝없이 펼쳐졌다. 한 계단 한 계단을 오르며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발걸음을 옮기는 것밖에.
산책을 하면서 생각을 모으고 새로운 생각을 도출해 내는 작업을 한다지만 막상 산책길을 나섰을 때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생각들로 혼란에 빠진 경험이 있다. 지나간 일부터 앞으로 다가올 일까지 영상처럼 펼쳐지기도 하고 가상의 장소에서 혼자 연극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구름처럼 지나가버리는 생각들은 산책을 끝내고 돌아오면 이내 사라지게 마련이다. 계단을 오르면서 점점 몸속의 활성화된 에너지들이 바깥으로 빠져 나갈 통로를 만들기 위하여 땀을 배출하기 시작한다. 발을 디딜 때마다 후두둑 소나기처럼 떨어진다. 잠시 쉬어 갈만도 한데 그저 발길을 떼기에 바쁘다. 한삼수 회원이 먼저 가고 김영곤 회원과 내가 뒤따랐다. 한참을 가다보니 한삼수 회원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평소 운동을 하는 사람이라 역시 다르구나 하는 생각했다. 평소에 운동을 잘 하지 않는 내가 이렇게라도 따라갈 수 있는 것은 지난 4월 시간을 내어 지리산 천왕봉을 다녀온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는 것이다. 거의 1년 반 만에 등산을 했던지라 천왕봉을 800m 앞두고 다리가 떨어지지 않았고 내리막길이 오르막보다 더 힘들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던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상을 바라보며 마신 뜨뜻한 캔맥주가 어느 맛에도 비길 데 없는 꿀맛이었다.
끝없이 이어져 있었던 계단도 어느덧 끝나고 흙으로 된 구간을 지나 가파른 철계단을 올라 정상에 도착하니 한삼수 회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김영곤 회원과 나 세 명이 먼저 정상에 도착했다. 정상의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고진감래라고 차가운 공기가 달콤하게 느껴졌다. 주변을 돌아보니 깎아지른 듯한 바위들이 짙은 녹음을 두르고 경쟁하듯 자신들의 모습을 뽐내고 있었다. 저쪽 산 중턱에 흙빛이 나는 곳을 망원경으로 보니 고랭지 채소를 재배하고 있었다. 눈으로 보기에 해발 700m 정도 되는 곳이었는데 남부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풍경이었다.
땀이 식으니 추워지기 시작했다. 자소봉 840m라는 표지석을 앞에 두고 기념사진을 찍고 나니 땀에 흠뻑 젖은 회원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같이 단체사진을 찍고 입석 방향으로 하산을 하였다. 내려가는 길은 완만하게 이어졌지만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강명자 시인이 애초에 등산을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샌들을 신고 왔기 때문에 오르막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내리막이 문제였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으로 『맨발하산』을 택했다. 내려오는 중에 한삼수 회원이 측은했던지 양말을 벗어 주었다. 양말을 신발삼아 신고 하산을 했다. 발을 다친 곳도, 양말이 구멍 난 곳도 없었기에 다행이었다.
하산을 하면서 뒤를 돌아보니 서창은, 김영곤, 정삼희 회원이 따라오고 있었다. 길이 평탄해서 차츰 속력을 냈다. 한참을 앞만 쳐다보고 가다보니 뒤에 따라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차라리 빨리 내려가서 쉬자는 생각으로 중간중간 평탄한 길에서는 뛰어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목에 많은 갈림길이 있었다. 청량산의 12개 봉우리로 통하는 길을 만들다 보니 길이 많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루한 길을 걷다가 마침내 입석에 도착했다. 지명이 왜 입석인지 몰랐는데 지리산의 칼바위처럼 돌이 서 있었기 때문에 붙인 이름인가보다 생각을 했다. 입석에서 도로를 따라 주차장까지는 0.9㎞. 도로 옆으로 맑은 계곡물이 흐르고 있었다. 군데군데 6칸짜리 간이화장실이 깨끗하게 설치되어 있었다.
주자창에 도착하여 조금 있으니 김영곤, 정삼희 회원이 청량사 입구에서 내려왔다. 어떻게 그 곳에서 내려오느냐고 했더니 내려오다가 길을 잃었단다. 아침 운동을 하면서 담배를 가져가면 버릇처럼 담배를 피울까봐 담배를 가져오지 않았다. 내려오지 않은 사람들을 기다리자니 버릇처럼 손이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아무것도 손에 잡히는 것이 없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을 발견했다. 경상남도 사람이었다. 담배를 한 개비 얻어 피웠는데 속이 시원할 정도로 맛있게 피웠다. 잠시 후 서창은 회원이 입석 쪽에서 내려왔다. 기다리기가 지겨웠는지 그만 걸어가자고 김영곤 회원이 말했다. 속소 방향으로 몇 걸음 옮기기 전에 주차장 쪽에서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청록파 시인 조지훈의 생애를 찾아서


숙소로 돌아와 먼저 아침식사부터 하기로 했다. 산에 가지 않은 뱀띠들도 내려와 식당에 앉았다. 메뉴는 북어국이다. 반주로 소주 한 병을 시켰는데 정영길 회원과 이광두 회원이 한두 잔 마시고 나머지 회원들은 소주를 외면해 버렸다. 남은 소주를 다 마시고 나니 아침부터 술이 취한다.
6월 10일 첫 목적지는 청량산, 두 번째 목적지는 지훈문학관이다. 마지막으로 민박집에서 나온 정영길, 허영옥 회원이 탑승하자 청량산을 뒤로하고 모두가 기분 좋은 출발을 했다. 봉화군을 벗어나기까지 농촌의 풍경은 여전히 담배와 고추밭으로 이어졌다. 산을 넘어 영양군 쪽으로 한참을 달려가다 보니 모내기를 한 논들이 군데군데 보이기 시작하였다. 산과 밭만 보다가 모처럼 논을 보니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일행은 두 번째 목적지인 지훈문학관에 당도하였다.
지훈문학관은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에 있으며 2007년 5월 18일 개관하였다. 청록파 시인이자 지조론의 학자 조지훈을 후세에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문학관으로 미망인 김난희 여사가 직접 현판을 썼다고 한다. 문학관을 들어서니 조지훈의 대표시 ‘승무’가 흘러나오고 안내원이 우리를 반겼다. 의령문인협회에서 왔다고 하니 자신도 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이름표에 ‘양  희’라고 새겨져 있었다. 혹시 행사를 할 때 안내장을 보낼 수 있도록 주소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 우리는 문학기행 자료집을 주면서 의령문인협회 홈페이지에 들어오면 알 수 있다고 했다. 잠시 후 우리는 문학관에 대한 설명을 듣기위해 한데 모였다. 도산서원 같이 자세한 설명을 해주지는 않았으며 개략적인 설명만 해주고 전체적으로 돌아보면서 선생을 느껴보는 것이 좋을 거라고 했다. 전시물 중에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세상을 뜨기 전 6~7년 전부터 애용했다는 담배 파이프였다. 그리고 담배피우는 모습을 담은 사진도 전시되어 있었다.


조지훈의 대표시 ‘승무’를 읽어보자.


승무(僧舞)

조지훈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이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世事)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조지훈의 <시의 원리>(珊瑚莊刊, 1956)에 보면 시 한 편을 쓰기 위해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다.

『내가 참 승무를 보기는 열아홉 살 적 가을이었습니다. 그 가을 어느 날 수원(水原) 용주사(龍珠寺)에는 큰 재(齎)가 들어 승무밖에 몇 가지 불교전래의 고전음악이 베풀어지리라는 소식을 거리에서 듣고 난 나는 그 자리에서 수원으로 내려가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밤 나의 정신은 온전한 예술 정서(情緖)에 싸여 승무 속에 용입(溶入)되고 말았습니다. 재(齋)가 파한 다음에도 밤늦게까지 절 뒷마당 감나무 아래서 넋없이 서있는 나를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시정(詩情)을 느낄 땐 뜻 모를 선율이 먼저 심금을 부딪힘을 깨닫습니다. 이리하여 그 밤의 승무의 불가사의한 선율을 안고 서울에 돌아온 나는 이듬해 늦은 봄까지 붓을 들지 못하고 지내왔었습니다. 춤을 묘사한 우리 시가(詩歌)로 본보기가 될 만한 것이 아직 없을 때이라 나에게는 오직 우울밖에 가중(加重)되는 것이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한마디의 언어 한 줄의 구상도 찾지 못한 채 막연한 괴로움에 싸여 있던 내가 승무를 비로소 종이 위에 올리게 된 것은 내 스무 살 되던 해의 첫여름의 일입니다.』



문학관을 나와 지훈 시공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시공원에는 조지훈의 시 20여 편이 돌에 새겨져 있다. 시공원 옆에 있는 육각정에서 단체사진을 찍고 일부 회원들은 조지훈 생가를 둘러보러 가고 일부는 다시 지훈문학관으로 돌아왔다. 초여름 땡볕에 모두들 지친 모양이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다음 목적지를 향해 출발했다. 당초계획으로는 가는 도중에 ‘영덕 어촌민속전시관’과 ‘영덕 해맞이 공원’을 둘러보고 점심을 먹은 후 월포해수욕장에서 바다풍경을 감상하고 의령으로 돌아오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너무 멀고 둘러가야 할 형편이라 점심을 먹고 월포해수욕장만 둘러보기로 했다.
영덕에 도착해보니 회원들의 의견이 영덕에 왔으니 대게를 먹어보자는 쪽으로 쏠렸다. 우리는 집채만 한 대게모형에 이끌려 ‘영덕 대게궁’이라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3층으로 올라가 점심을 시켜놓은 사이에 목도 축일 겸 맥주와 소주, 음료수 등 마실 것을 먼저 가져오라고 했다. 서창은 회원이 내 곁에 앉아 폭탄주를 마시자고 했다. 맥주잔에 소주 한 잔을 붓고 나머지를 맥주로 채우는 것이다. 술이 몇 병 들어가니 회원들은 다시 말이 많아지고 음성도 높아지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며


이제 해수욕장을 둘러 의령을 향해 가면된다. 마지막 목적지를 향해 힘차게 가속페달을 밟는다. 해수욕장에 도착하니 아직 때가 이른지 물 속에 들어가 물놀이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직도 기온이 서늘하고 습도가 그리 많지 않은 편이라서 소금기가 덜 묻은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왔다. 한삼수 회원에게 바다 구경을 하는 동안 올 12월에 개최예정인 인터넷 시화전에 사용할 사진을 찍으라고 했다. 자신도 모르게 찍힌 사진이 가장 자연스럽다. 한국사람들의 특성상 카메라를 들이대면 채 2초가 지나지 않아 얼굴이 굳어버리기 때문이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일만 남았다. 바다풍경을 뒤로한 채 아쉬움을 남기고 경상북도와 작별인사를 해야 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고속도로의 풍경은 쓸쓸하기만 했다. 떠남과 돌아옴의 차이는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한참을 달리다 휴게소에 들렀다. 마지막 쉬어가는 곳이다. 정신도 가다듬고 그동안의 여독을 풀기도 할 겸 커피를 마시면서 한담을 나누었다. 이틀간의 여행에 지쳤는지 모두들 별 말이 없다. 짜증나는 얼굴은 아니지만 힘없어 보이는 얼굴로 지난 시간을 되새기는 모습이었다. 차가 출발하고 대구를 지나 창녕이라는 도로표지판을 보니 이제 다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착예정 시간은 19시 30분. 서창은 회원이 1박 2일의 일정에서 19시에 도착할 예정이었는데 19시 30분에 도착하는 것은 완벽한 일정이라고 하여 모두들 웃었다. 의령군민문화회관에 도착하니 박래녀 회원의 남편이 기다리고 있었다. 차 안에 뒹굴고 있는 쓰레기를 보니 인생도 다 써버리면 저렇게 짓밟히고 버려져야 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여행 잘 다녀와서 무슨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인지.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각자 집으로 향했다. 한삼수 회원과 강명자 시인이 창원까지 가야하기 때문에 남아있는 사람들과 저녁을 먹기로 했다. 윤재환, 김양채, 이광두, 한삼수, 정영길 회원과 강명자 시인 6명은 자굴산 휴게소에 가서 저녁 식사를 하고 서둘러 일어났다. 14명이 떠났던 여행에서 6명이 남았다. 이제 모두 이별해야 할 시간이다. 한삼수 회원이 각각 집 근처에 내려주고 창원으로 떠났다. 혼자 남았다. 이미 어둠이 짙게 깔린 시내 한복판에 서서 이틀간의 여정을 생각해 본다. 모두가 가슴 속에 특별한 추억의 한 장면을 간직했으면 좋겠다. 같은 목적을 가지고 같은 곳을 여행을 했지만 모두가 똑같은 느낌을 받을 수는 없다. 이번의 경험을 통하여 각자가 자기만의 특별한 추억을 만들었을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필요한 것이 되었으면 좋겠다.
일제 암흑기에 저명한 문인이라면 대부분 일제의 강요나 사상 전향으로 『친일문학』을 할 수밖에 없었을 때 청록파 시인들은 붓을 꺾고 낙향했었다. 그들은 신예들이어서 일제의 강요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도 있었지만, 그 바탕에는 시의 순수성과 시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굳건한 의식이 내재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 때문에 광복 후에 청록파는 어떠한 정신적인 부담감도 없이 활동할 수 있었다.(지훈문학관, 청록파의 활동 중에서)
지금은 비록 일제 암흑기가 아니지만 글을 쓰는 입장은 마찬가지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미사여구로 치장을 한다거나 특정단체를 옹호하기 위한 글을 쓰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 붓을 꺾지 못할망정 붓을 똑바로 잡고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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