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의 밤 / 정유정
작가는 “물러설 곳이 없는 벼랑 끝에서 자신의 생을 걸어 지켜낸 ‘무엇’에 관한 이야기”라고 했다. 야구장에서 포수가 끝까지 지켜내야 할 공 하나에 관한 이야기.
이모, 고모, 외삼촌, 작은 아버지. 이 모든 친척들에게 버림받은 아이가 찾은 단 한 곳의 기댈 곳에서 아이는 생각한다. ‘아저씨가 내 마음을 몰랐으면 했다. 아저씨가 혼자 산다는 것에 얼마나 기뻐하고 있는지.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얼마나 안도하고 있는지. 며칠 데리고 있다가 친척집을 수소문해 돌려보내 버릴까 봐 얼마나 불안해하는지.’ 세상의 끝에 서서 어디로도 갈 곳이 없는 아이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일까.
치과 의사이면서 사회에서 고위층에 속하는 사람 오영제. 사실은 아내와 딸이 인간으로서가 아닌 노리개로서만 있어야 되는 정신병자다. 자기가 정리해 놓은대로 되어 있지 않는 집안을 보고 소위 “교정”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정신병자. 엄마 생각이 나서 화장을 하고 엄마의 잠옷을 입고 촛불을 켜 놓은 채 잠이 든 딸아이를 깨워 부드러운 목소리로 “생일 축하해! 우리 이쁜이”하면서 주먹을 날려 코뼈를 으깨버린다. 나동그라져 있는 아이의 머리채를 잡고 벽에 들이박아 버린다. 강냉이 알 같은 이빨이 방바닥에 흘러내린다.
최현수. 세상을 읽듯이 야구장의 모든 상황을 읽어내는 거구의 왼손잡이 포수 출신이다. 어릴 적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야구선수의 생명인 왼쪽팔을 마비시키는 증상, 소위 용팔이가 찾아오기 시작한다. 끝내 야구를 그만두어야했고, 야구와 함께 용팔이도 사라졌다.
야구를 그만두고 직장생활을 하던 중 세령호의 보안팀장으로 발령을 받고 미리 이사할 집을 보러오던 현수는 짙은 안개 때문에 길을 잘못 들어 세령호 안길로 접어든다. 오영제의 딸 세령이 교정을 받다가 도망쳐 나와 헤매던 그 시점과 마주친다. 현수의 차는 세령을 치고 만다. 널브러져 있던 세령의 입에서 “아빠”라는 말이 흘러나오고 야구선수의 왼손은 그 입을 틀어막는다. 괴력을 가진 손은 아이의 목뼈를 꺾어버리고 만다. 현수는 세령을 세령호에 던진다.
이후 다시 용팔이가 찾아오고 밤마다 몽유병을 앓으며 수수밭을 헤맨다. 그러면서도 그는 지켜야만 하는 단 하나의 공, 아들 서원을 위하여 온 몸을 던진다. 정신병을 고치지 않으려는 자와 그것을 극복하려는 자와의 대결이다. 두 정신병자의 대결은 7년 전의 밤에서부터 계속 진행형이다. 어느 한 쪽이 없어질 때까지 그칠 수 없는 상황이다.
소설은 상황의 전개가 급박하게 이어진다. 등장인물은 각자가 주인공이다.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헤쳐 나간다. 그러면서도 그 이야기들은 역동적이다. 숨 쉴 틈 없이 극적으로 흘러간다. 마지막 순간까지 눈을 뗄 수 없다. 그러면서도 중간중간 책을 덮어야 하는 나는 그 모든 핑계를 술에다 전가시켰다. 술을 마시니 늦게 들어오고 다음날 출근을 위해 책장을 넘기지 못하고 잠을 자야했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긴 했지만 언제나 끝은 오는 법이어서 마지막 책장을 넘길 수 있었다. 책을 산 지 한 달만의 일이다.
사람이 사람을 피해 다녀야 하는 상황. 그런 상황이 지속되면 ‘누군가가 호감을 표해와도 관계에 대한 기대를 품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는다. 놀라면 허둥대야 정상이다. 모욕당하면 분노하는 게 건강한 반응이다. 호감을 받으면 돌려주는 게 인간적 도리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정상적인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미치광이 살인마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사회에서 배척당한다. 그것은 스스로 만들지도 않았고 친한 사람이 만들지도 않았다. 어느 누군가의 치밀한 의도에 의해서 사회가 만든 것이다. 사회는 그러한 사실을 철저하게 까발리고 들쑤신다.
대중에게 전달하는 매체에 의해서 사실로 만들어진 사실이 관계를 규정해 버린다. 드러난 전부가 사실이냐, 또는 사실이 전부인가하는 문제도 소설에서는 언급된다. 하지만 마지막까지도 그에 대한 구체적인 진술은 언급되지 않고 있다. 마치 신문기사를 읽듯 그렇구나 하는 생각으로 소설의 책장을 밀고 넘어간다. 물론 미치광이 살인마에 대한 사형집행을 한 후 아내를 살해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드러났고, 댐의 수문을 연 것도 사실이지만 수문을 열어야했던 정황은 독자들만 알 뿐이다. 현수가 들고 있었던 몽치에서 아내의 혈흔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사건의 빠른 처리를 위해서 그 모든 것은 생각 속에서만 잠시 떠오를 뿐 이내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빠른 시일 내 세령호 피해 주민들을 무마시키고자 하는 의도로 보인다. 한 사람만 미치광이 살인자로 낙인찍으면 되는 일이다.
죄의 경중을 따지는 새로운 재판은 소설이 끝난 후에나 처리할 일로 남겨져 있다. 오영제의 체포로 모든 정황은 밝혀질지 모르지만 소설은 언급하지 않는다.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도 윤수는 살인하지 않았지만 살인죄로 사형당한다. 사실? 진실? 과연 그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세치혀는 세상 도처에 숨어 있다가 애먼 사람을 죽인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
작가는 말한다. “눈앞에 보이는 최선을 두고 최악의 패를 잡는 이해 못 할 상황도 빈번하게 벌어진다.(일간지 사회면을 점령하고 있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그 증거일 것이다.)” 세치혀에 휘둘려 판단이 흐려지고 스스로 나락으로 떨어지는 결과일 것이다.
최현수의 아들 서원. 가장 불행한 인간이다. 부모를 잃고, 친척들에게 버림받고 사회로부터 배척당한 세상 어디에도 설 곳이 없는 인간이다. 이런 부류의 인간들이 만들어지는 것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것이다. 스스로 속세를 떠나는 부류가 있을 것이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러한 인간이 되어버리는 부류도 있다. 전자는 스스로의 선택이기 때문에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후자는 사회적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사회는 그러한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국민 세금을 모아서 국가예산을 편성하는데 그 예산을 국가 스스로 낭비한다면 그 국가는 국민들의 칼이 심장을 찔러 들어오는 아픔을 느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판단은 가진자의 편에 서는 편리함을 택하고 만다. 면죄부를 소유하고 있는 가진자는 모든 것에도 굴함 없이 꿋꿋하다. 사회에서의 사실 혹은 진실은 누구의 편에 서야 하는 것일까. 누구든지 자신이 진실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진실하지 않아야 한다. 진실하지 않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도록 무거운 철판으로 겹겹이 짓눌러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법은 그렇게도 층층이 분류되고 또 겹쳐져서 어느 불특정 다수를 꼼작 못하게 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국가는 유지되는 모양이다. 치사하고 비루한 일들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사람도 있지만 항상 미로에 빠져서 다른 길로 빠져나가고 만다.
사람들은 얼마나 더 발전해야 하는 것일까. 또 그 발전의 의미는 무엇일까. 사람들이 자고 일어나 움직일 때마다 쓰레기가 발생한다. 쓰레기들은 생산되어 소멸하지 않고 방치된다. 사람들 속에서 주변 사람들을 자기에게 예속시키고 꼭두각시를 부리듯 부려야만 하는 사람들 때문에 쓰레기는 계속 생산된다. 방치되었던 쓰레기가 다시 보복의 칼을 들기도 하고 만들어지는 쓰레기와 합류하기도 한다. 쓰레기 냄새로 뒤덮인 세상은 사실이나 진실마저도 덮어버린다. 그 속에서 사실이나 진실은 활자로 찍힌 것으로 대체될 뿐이다. 친환경이라는 말로 환경을 깨부수고 복지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황폐화시킨다. 이런 차제에 아마존의 원주민이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소설 속에 등장하는 등대마을은 속세를 떠나고 싶은 사람들에게 위로를 준다. 12명이 사는 마을에서 바다를 보며 소설을 쓰는 사람. 바로 무릉도원이다. 소설 속의 사건도 바로 등대마을에서 해결된다. 등대마을은 종점이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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