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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탄실 / 김별아

by 1004들꽃 2016. 11. 16.


탄실 / 김별아

 

 

장편소설 <탄실>은 최초의 여성 근대 소설가이지만 문학적 평가를 받지 못한 채 사라진, 올해로 탄생 120주년을 맞은 조선 최초의 여성 작가 김명순의 파란만장한 삶을 추적해 소설화한 작품이다. 필명은 탄실(彈實) 또는 망양초(望洋草) 등으로 알려져 있다.

 

탄실은 기생인 산월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무역상을 하는 김희경. 사업은 날로 번창해서 재산이 넘쳐났다. 남부럽지 않게 살기는 했지만 기생첩의 딸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녀야 했고,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해야했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알아줄 정도로 꽤 똑똑했다. 불행하게도 아버지 어머니의 죽음으로 빈털털이가 되었지만 아버지의 혈육인 숙부 김희선의 도움으로 일본 유학을 떠난다.

 

탄실은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열정에 벅찼다. 하지만 숙부 김희선의 소개로 알게 된 육사생도 리응준에게 강간을 당하고 이 사건이 조선에 퍼지게 되면서 모든 오해와 핍박을 오롯이 혼자서 감내해야 했다. 신문에까지 보도가 되면서 성폭행의 피해자이면서도 불구하고 기생첩의 딸이라는 굴레를 벗지 못하고 방탕한 여자라는 낙인이 찍히게 된다.

 

열일곱의 랭보는 취한 배를 타고 시의 세계를 항해하며 빛나는 별들을 길어 올렸다. 그녀 또한 열일곱에 랭보를 읽으며 자유를 꿈꾸었다. 일체의 속박을 벗어나 온전한 나와 마주할 순간을 고대했다. 하지만 한순간 날개를 꺾여 지옥으로 추락해 모지라진 달과 태양의 위세에 눌려 하늘조차 볼 수 없었다. 자살을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조선으로 돌아와 다시 학업을 시작하고 모든 것을 잊기 위한 방편인지는 몰라도 그녀는 글쓰기에 몰두하게 된다. 살기위해, 죽지 않기 위해, 글을 쓰고 문학을 부둥켜 잡았다. 이모인 영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문학에 전념하게 되는데 191711월 문예지 <청춘>에서 최초로 시행하는 공모전에서 단편소설 <의심의 소녀>가 당선된다.

 

당시 기성 작가였던 이상춘과 주요한에 이어 3등으로 당선된 것이다. 당시 심사위원 중 한 명이었던 이광수에게 극찬을 받았고, 여성 작가로서는 처음으로 소설집 <생명의 과실>을 출간하여 문단에 이름을 알리게 된다.

 

이후 두 번째 창작집 <애인의 선물>을 내는 등 소설 23편과 시 107, 수필, 평론, 희곡과 번역시, 번역소설 등 여러 작품들을 남겼을 정도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하지만 그녀의 문학의 길은 녹녹치 않았다. 남성 작가와 비평가들의 인신 공격적 비난을 받으며 문단에서 따돌림을 받았고, 일본으로 떠난 이후 제대로 된 문학적 평가를 받지 못했다.

 

소설은 여성 문인에 대한 남성 문인들의 비열함을 고발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소설이기 때문에 다만 소설로서만 읽혀져야 하겠지만 그 소설이 다만 소설 같지는 않다. 지금껏 한국문단을 이끌어 왔던 고전 중의 고전 문학가들로 알려져 왔던 그들의 행태는 그 어떤 추리소설보다 더한 반전으로 독자들에게 다가간다.

 

<감자>, <배따라기> 등으로 유명한 김동인은 <김연실전>에서 자신의 글재주를 이용해 여자를 하등의 존재로 취급하는 속내를 드려내며 김명순의 약점을 겨냥해 독화살을 쏘듯 비열하고 잔인한 행태를 드러낸다. 그리고 상록수 심훈의 음탕함. 은파리라는 익명의 가면을 쓰고 비열하게 타인의 사생활을 캐던 사람의 정체가 바로 어린이라는 말을 처음 쓰고 어린이날을 만든 소파 방정환이었다는 사실 등이 소설을 통해서 까발려진다.

 

그런 그들은 남성 우월주의를 배경으로 깔고 자신들의 알량한 글쓰기와 권력을 내세워 한 인간의 삶을 산산이 부숴 버렸다. 남성중심의 문단에서 제대로 평가받을 기회조차 가질 수 없었던 그녀의 삶은 참으로 외롭고 안타깝고 고독한 투쟁의 세월이었다. 남성 중심의 시대에서 그녀의 성폭행 소문은 평생을 따라 다녔고, 부도덕한 여자라는 인식으로 인해서 그녀는 어느 곳에서도 환영 받지 못하며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다. 그렇게 탄실은 남성중심 문단에서 서서히 무너져 내리게 되었다.

 

방탕하다는 낙인이 찍히게 된 탄실에게 주어지는 핍박과 멸시는 끝나지 않았다. 사랑과 연애는 그녀에게 상처만 남기게 되고 남자에 대해 불신과 환멸은 더해 갔다. 여성은 오로지 숨죽여 살아야 했던 조선 사회에서 문학가로서 창작가로서 살고 싶어 했던 그녀의 앞에 세워진 장벽은 결코 허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럴수록 더 깊이 문학을 탐닉했고 일본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 외국어에 능숙하여 외국의 여러 작가들의 소설과 시를 번역했다. 특히 최초로 조선에 번역해 소개한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들도 선보였다. 스물여섯에서 스물아홉까지의 시간은 작가 김명순으로서 가장 왕성했던 시기였다.

 

기생인 산월을 어머니라고 목 놓아 부르지도 못했던, 그래서 더 어머니의 사랑이 그리웠던, 결혼도 해보지 못한 그녀이지만 마지막엔 본인도 어미가 되고 싶었던 여인 김명순. 조선시대 최초의 여성 소설가 김명순.

 

그녀가 있었기에 오늘날 여성 문학인의 지위가 이렇게 자리를 잡았는지도 모른다. 물론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 시대에 문학가로서 당당하려 했던 그녀의 처절한 몸부림은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작가들이 본받아야 할 것이란 생각이 든다. 작가라는 이름을 달고 자신이 쓴 글에 책임을 지지 않는 작가들도 많다. 지역문학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은 대부분 작품에 매진할 만큼 시간적 여유를 누리기 어려운 여건 속에 있다. 그렇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글을 최고로 만들기 위한 처절할 정도로 치열한 퇴고 과정을 거치는 작가는 드문 것 같다. 나 스스로에게도 글을 쓰기 위해 표독스럽다고 할 만큼 독한 마음을 먹은 적이 있는지 자문해 보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글에 열정을 담아내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병이 들어서 죽음의 직전까지 가면서조차도 펜을 놓지 않았던, 문학이 인생의 전부였던 작가 김명순의 삶을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