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이다 / 김탁환
르포르타주 형식으로 쓴 사회 고발적 성격의 소설이다. 쌍용자동차 사태를 다룬 공지영의 의자놀이와 마찬가지로, 소설 속에서 류창대 잠수사의 과실로 동료 잠수사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혐의를 뒤집어 씌워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고발된 상황에서 나경수 잠수사가 재판장에게 보내는 탄원서의 형식과 관련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인터뷰를 하는 형식으로 세월호 사고에 대하여 짚어나간다.
2014년 4월 21일부터 7월 10일까지 맹골수도에서 선체 수색과 실종자 수습에 참여한 잠수사 나경수가 재판장에게 이야기하듯 탄원서를 써 내려간다. 2014년 7월 9일 태풍 너구리를 피해 잠시 목포로 피신해 온 잠수사들에게 수색 작업을 중단하고 맹골수도에서 철수하라는 문자가 휴대전화로 일제히 날아든다. 수심 40미터가 넘는 곳에서도 임무를 수행하던 차돌 같은 사내들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한참을 울었다. 슬퍼서가 아니라 억울하고 화가 나서 저절로 흘러내린 눈물이었다. 난데없이 생이별을 통보받은 잠수사들은 울분을 삼키며 개인장비를 챙겨 서둘러 바지선에서 나왔다. 아직도 열한 명이 남아있는 상황에서 오로지 실종자를 모시고 나와야겠다는 마음만 간절했는데 일방적으로 그것도 문자메시지로 철수 명령을 받은 것이다. 눈을 감아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111개의 격실과 17개의 공용 공간이 매일 밤 잠수사들의 꿈속에서 나타난다.
4월 16일부터는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첫날 배에서 탈출한 172명의 생존자가 전부였고 화면 상단 구석에 적힌 생존자의 숫자는 영원히 바뀌지 않았다. 약혼자와 결혼을 앞둔 나경수 잠수사는 21일 새벽 조치벽 잠수사로부터 전화를 받고 그로부터 믿지 못할 사실을 듣게 된다. 잠수사 오백 명이 투입되었다던 사고 현장에는 선내 진입이 가능한 잠수사가 여덟 명 뿐이었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사고 후 닷새 동안 이토록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계속 천연덕스럽게 <지상 최대의 구조작전>이라는 타이틀로 뉴스로 내보낸 대한민국의 언론과 정부는 무엇인지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선내 진입도 못하는 상황을 사실대로 전한 이가 한 사람도 없었는데도 말들은 들끓고 글들은 흘러 넘쳤다. 관직이 올라갈수록 번지르르한 거짓말을 마이크 앞에서 해 댔다. 책임질 사람이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에어포켓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도 하지 않았으면서 육해공을 총 동원하여 구조작전을 펴고 있다고 허풍만 늘어놓고 있는 상황이었다.
잠수사들이 선내로 진입한 것은 겨우 20센티미터밖에 보이지 않는 심해에 배가 처박힌 뒤에야 가능했다. 승객이 살아서 구조를 기다릴 때는 아무도 다가오지 않았던 곳. 그곳에 구조작업이 아닌 실종자 수색을 위해 투입된 것은 민간 잠수사들이다.
류창대 잠수사는 바지선에서 잠수사들을 총괄하여 지시했고 그 명령에 따라서 잠수사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나경수는 박정두 잠수사와 조가 되어 첫 잠수를 하던 날 윤종후라는 학생과 맞닥뜨린다. 수학여행을 떠난 고등학교 2학년 남학생이 이런 바닷속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생각이 들면서 수중에서는 눈물을 아끼라는 조치벽 잠수사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눈물을 쏟아져 그나마 20센티미터밖에 되지 않았던 시야가 0에 가까워지게 된다. 류창대 잠수사의 질책을 받고는 정신을 차리고 무사히 첫 잠수를 마친다.
잠수가 계속 되면서 잠수사들의 피로가 누적되니 몸에 질소가 차서 골괴사로 이어지는 잠수병에 걸릴 확률이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몸에 이상이 생겨 잠수를 못하게 되면 당장 밥줄이 끊기게 되는데도 여기서 중단하면 겨우 손발을 맞춰 놓은 것도 흐트러지게 되고 시신 수습도 제대로 하기 어려워진다고 하면서 잠수를 멈추지 않았다.
결국 7월 10일 잠수사들이 철수한 후 모두 잠수병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그들을 무리하게 잠수시킨 범정부사고대책본부와 해경 그리고 그러한 작업방식이 심신을 병들게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리지 못한 물리치료사와 한의사 모두 비겁자라고 물리치료사 홍길직 씨는 회고 한다.
종아리 근육을 다친 후 상태가 좋지 않은 나경수는 한 명이 빠지면 다른 잠수사에게 그만큼 순번이 빨리 다가온다는 사실을 알기에 계속 잠수에 나선다. 어느날 강나래라는 여학생 시신을 수습했는데 선내에서는 발견하지 못했는데 바지선으로 실종자를 옮기던 중 종아리 부분의 살갗이 패어 있었고 오른발은 발목이 부러진 듯 발등이 안으로 휜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실종자를 찾아 모시고 나오는 시간이 바지선에서 정한 시간보다 10분을 넘겨버렸다. 닷새 동안 바지선을 떠나 사천의 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는 부탁에도 불구하고 약혼자가 찾아온다. 나경수는 약혼자에게 치료가 끝나면 다시 맹골수도로 돌아가겠다고 한다.
잠수사들에게 일당은 물론 시신 한 구당 오백만 원씩 받는다거나 시신을 찾아 특정 장소에 모아두었다가 해경이나 범대본의 지시가 있을 때마다 원하는 만큼 데리고 나온다는 유언비어가 나돌고 있었지만 정작 잠수사들은 구면이든 서면이든 계약을 한 적도 없으며, 오로지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달려왔을 뿐이고 바깥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관심도 없고 잠수에만 몸과 마음을 쏟아도 시간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해경은 하루 3교대로 8시간 만 바지선에 머문 뒤 함정으로 돌아가 쉬지만 잠수사들은 바지선에서 숙식했다. 잠수가 가능한 하루 네 번의 정조기뿐만 아니라 조류계측기를 보던 해경이 조류가 멈췄으나 한 번 더 들어가라고 요구하면 다시 들어간 날도 적지 않았다.
나경수는 아이들의 교실을 찾아간다. 윤종후의 교실을 찾았고 강나래의 교실을 찾았다. 죽은 사람을 위해 한 번도 무엇인가를 쓴 적이 없었던 나경수는 공책의 빈 페이지에 눈물을 떨구며 적는다. <미안하다 모든 게 늦어서>
강나래의 언니 강현애 씨는 강나래의 교실에서 강나래의 자리에 앉아 한숨을 푹푹 내쉬는 사내를 보고 따졌지만 뒤따라 들어온 종후 엄마 오주선 씨가 나경수를 알아보게 된다. 강현애는 말한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아서 304명이 죽은 거예요. 장관은 장관답지 못했고 해경도 기자도 마찬가지였어요.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알게 된 것은 제 동생을 맹골수도의 침몰한 배에서 데리고 나올 사람은 민간 잠수사뿐이라는 것을. 강나래의 생일 하루 전날 강나래를 데리고 나온 잠수사를 기적처럼 만나게 되었다고 하면서 생일 모임을 갖는 치유공간으로 와 줄 것을 부탁한다.
다음날 모임 장소에 가서 강나래에 대해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는 것을 듣게 되는데 모임이 끝날 무렵 박윤솔이라는 여고생이 들어온다. 강나래와 2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 배에 물이 차오르고 배가 점점 기울어가는데도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밖에 없었고 누구도 행동지침을 내려주는 어른이 없었다. 그때 반장인 나래가 나서 선장의 역할을 맡아서 하면서 친구들을 갑판으로 밀어 올렸다. 친구들이 탈출에 성공했고 남아있는 나래를 끌어올리려 했으나 캐비닛에 끼었는지 끌어올리지 못했다. 그 순간 거대한 물살이 밀려와 박윤솔을 10미터쯤 밀고 가 버렸다. 발을 다치긴 했지만 나래가 빠져 나왔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다시 나래가 있는 방으로 돌아가지는 못했다. 구조된 친구들과 가까운 섬 서거차도로 옮겼는데 텔레비전에서 <전원구조>라는 글자를 보고 기뻐서 친구들과 끌어안고 소리쳤는데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나경수는 박윤솔의 이야기 덕분에 강나래의 발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알게 되었다. 다 함께 살기 위해 끝까지 최선을 다한 증표였다.
보상금은 국민이 낸 세금이 아니다. 국가가 먼저 보상금을 유가족에게 지급하고 사고에 책임이 있는 기업에 구상권을 행사해서 이미 지급된 돈을 받아내는 것이다. 구상권이란 타인이 부담하여야 할 것을 자기의 출재出財로써 변제하여 타인에게 재산상의 이익을 부여한 경우 그 타인에게 상환을 청구할 수 있는 권리다. 세월호 사고에 대한 보상금은 일반교통사고 수준으로 책정되었다. 희생 학생들은 도시 일용직 노동자 기준으로 산정되었다. 아이들의 재능과 꿈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고 가장 낮은 수준으로 일괄 정리되었다. 유가족이 받은 돈은 이 보상금에 희생자 개인들이 개인적으로 가입한 보험금과 국민들이 낸 성금을 합친 금액이다.
책 속의 나경수 잠수사의 모델이었던 김관홍 잠수사가 지난 2016년 6월 사망했다. 잠수병으로 더 이상 잠수를 할 수 없어 대리운전과 꽃을 키워 팔면서 하우스 안에서 살고 있었다. 대리운전을 마치고 돌아온 6월 17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인터넷 jtbc 손석희 뉴스룸 인용) 매일 약을 먹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 했던 그는 “뒷일을 부탁합니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85일 동안 잠수를 하며 하루에 한 번만 허용되는 심야잠수 규칙도 지키지 않은 채 하루에 서너 번 씩 적극적으로 수습에 나섰던 그들이 시체장사로 둔갑되기도 하고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고발되기까지 했다.
거꾸로 이재명 성남시장은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 직무유기와 업무상과실치사를 이유로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했다. 행정부 수장은 대형재난이 일어났을 때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하기 위해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지시할 임무가 주어져 있다. 하지만 박근혜는 이를 태만히 해서 304명의 국민이 숨지게 했다. 이는 심각한 업무상 과실치사혐의라 적시했다.
소설의 처음에 ‘나는 왜 갔을까’라는 질문이 주어진다. 김탁환은 김관홍을 영원히 보내고 와서 생각해 본다.(작가의 말) 그는 높이가 아니라 깊이를 아는 인간이기 때문에 갔던 것이라고. 함께 더 깊이 내려가기 위해, 그 과정에서 거짓과 참을 낱낱이 찾아내기 위해, 그는 맹골수도로 갔고 광화문 광장과 동거차도와 단원고 교실과 또 내게로 왔던 것이다. 소설이 소설로만 읽혀져야 할 것인데 소설같지가 않다. 책 속의 인물들은 모두 가명이지만 관련된 사람들을 한사람 한사람을 만나서 기록했기에 그들 모두는 실존인물이면서 그날의 생생한 기억의 대변자들이다.
2014년 7월 9일 열한 명을 남겨둔 채 철수명령이 떨어진 후 2년이 넘었지만 두 명이 더 수습되었을 뿐이다. 현재 세월호 미수습자는 학생 4명, 교사 2명, 일반승객 3명 등 9명이라고 한다. 해양수산부는 세월호 연내 인양 방침을 밝혔다가 지난달 11일 기상 악화와 작업 지연 등으로 인양이 해를 넘기게 됐다고 밝혔다.(연합뉴스 2016/12/03 20:56송고)
소설은 영화로 제작된다고 한다. 세월호 참사를 다룬 첫 장편영화다. 영화 <지슬-끝나지 않은 세월2>를 연출한 오멸 감독(45)과 김탁환 작가(48)가 손을 잡고 <바다 호랑이>(가제)를 함께 만들기로 했다. 그동안 세월호 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등은 나왔으나 장편 상업영화 제작은 처음이다. 이 영화는 내년 여름 촬영을 목표로 하고 있다. 수중촬영뿐만 아니라 잠수사들이 대규모 참사 희생자를 수습하는 장면 등을 담으며 100억 원 가량의 제작비가 투입될 것으로 보인다.(경향신문 2016.12.04. 21:16:04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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