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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정혜/우애령

by 1004들꽃 2009. 2. 24.

실체가 없는 것은 항상 마음을 설레게 하든지 황폐하게 만들곤 한다. 의미 없는 약속이나 그저 글자로 구성되어있는 지켜야 할 일들, 하지만 그것들로 인하여 실체화되고 구체화 되어가는 것들. 어쩌면 비참해지거나 행복해 지는 것은 보이지 않는 실체들에 의해서 구체화되어갈 것이다.

하나의 결론을 만들어 내기 위해 마음속으로 많은 갈등을 겪는다. 심사숙고 끝에 입 밖으로 튀어 나온 말은 향후 많은 세월 동안 행동을 구체화시켜 나갈 것이다. 그로 인하여 인생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어떠한 사람을 사랑했던 일들. 그리고 결론을 얻지 못하고 끝을 맺었지만 그 여운은 그들이 알고 지냈던 세월보다 훨씬 오랫동안 내면에 잠재해 있을 것이다.

얼마 전 「여자, 정혜」라는 한국영화가 상영되었다. -영화는 보지 못했음- 원작은 소설가 우애령의 「정혜」이다. 정혜는 열세살 이후의 삶을 회색빛깔로 살아간다. 열세살 이전의 기억은 꽃과 하늘도 제 색깔로 남아있지만 열세살 이후의 삶은 그녀가 입고 있는 회색 스웨터와도 같은 빛깔이다. 남들에게 드러내기를 싫어하고 이야기하기를 꺼려하는 성격으로 살아간다. 어느 한 순간의 충격은 이토록 인생을 바꾸어 놓는 것이다. 결국 자신을 그렇게 만든 원인을 제거하기 위하여 길을 나서는데 그녀를 사랑하고 싶은 그, 그녀가 집으로 초대하여 저녁 식사를 대접하고 싶었던 그를 만난다. 그녀는 눈이 내리는 밤길을 걸어가고 그도 그녀의 뒤를 따라 걸어간다.

살아가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체를 구하고자 한다. 살아가는 자체가 실체 이면서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면서 생을 그렇게 길지도 짧지도 않는 것. 굳이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우리는 찾고자 하는 실체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곰팡이 냄새나는 일상은 삶 자체이고 우리네 인생이다. 향기나는 인생을 찾는다는 것은 사치일 뿐인가.

하루하루의 일상이 모여 우리의 전체 삶이 되고 오래된 일상은 추억이 된다. 추억의 가치관은 항상 변한다. 지금의 현실이 어떠하냐에 따라 기억하기 싫은 과거가 될 수도 있겠고, 웃어넘길 수 있는 사소한 일상이 될 수도 있다. 많은 세월이 지난 후에 웃어넘길 수 있는 일상들, 행복한 추억들을 만들고자 한다면 살아가는 지금 이 순간순간을 성의 있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하여 남의 인생을 바꾸어 버리는 행동은 우리 사회에 「정혜」라는 인물을 양산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