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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시를 만난다는 것은

by 1004들꽃 2008. 7. 9.

시를 만난다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할까?
어찌하는 게 좋은 걸까?
대답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에게 자꾸 묻고 있었다. 술을 마시지 않은 지 거의 3주째를 접어들고 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긴 여행을 하자면 자연스럽게 술이 오고 갈 것이고 무의식중에 술을 마실 것은 뻔한 일이었다.
2008년 1월 의령문협 사업계획을 설명하는 정기총회에서 문학기행 장소를 정하기로 했었다. 회장이 제안한 장소를 마다하고 나는 꼭 속초에 가야한다고 주장했다. 왜 속초에 가야 하는지. 내년에 속초로 가면 안 되는지. 막무가내로 속초에 가야 한다고 이유 없는 이유를 대면서 속초에 가야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다만 속초라는 글자가 좋아서였을까?
속초라는 두 글자가 끌어당기는 힘은 대단한 것이어서 많은 반대 없이 문학기행 장소가 속초로 결정되었다. 이 정도라면 문학기행 참석을 두고 ‘어떻게 해야 하나? 어찌 해야 하나?’ 라고 고민하는 것은 아무런 설득력이 없다. 술과의 전쟁을 위하여 길을 나서야 하는 것이다. 술과 내 몸이 싸우는 것이 아니라 1박 2일의 일정 동안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그 누구와도 아닌 나와의 약속이며 약속은 지키기 위해 있을 뿐이다.
어떤 시를 읽고서 그 시가 어떻게 씌어졌는지. 왜 그렇게 쓸 수밖에 없었는지. 그 시의 배경이 된 곳은 과연 어떤 곳일까 하는 막연한 그리움을 느낀 적은 없는지? 이상하리만큼 속초는 쓸쓸하고 눅눅한 사람의 냄새가 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면 그 시를 쓴 시인과 함께 소금기에 절어 눅눅해진 머리카락과 검게 타 번들거리는 피부를 걸치고 쓸쓸하고 고독하게 파도소리를 들으며 속초의 바닷가에 앉아있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해변에 와서야 부서져 버리는 파도에게 왜 하얀 거품을 물고 밤이 새도록 울고 있는지 묻고 싶었다. 파도가 지날 때마다 그리움이 솟아나듯 문득문득 솟아나는 바위들에게 잊혀져 가는 스무 살에 대해, 나이를 잊어버리고 밤을 지새우던 서른 살에 대해, 그리고 마흔이 되었던 날의 설렘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다. 파도 소리를 들어도 눈물이 나지 않는 나이가 되면서 어느새 눈가의 주름은 초상화의 그것처럼 지워지지 않는 삶의 여정을 차곡차곡 담고 있었다. 스스로도 용서할 수 없는 죄와 내가 살기 위해 무릎을 꿇었던 비굴함과 자존심을 버리지 못해 스스로를 망쳐놓았던 비참함이 굵은 주름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제 기억초차 할 수 없는 날들이 온 몸에 쐐기처럼 박혀 밤마다 뼈마디를 압박하고 있다. 무슨 죄를 지었는지 어떻게 비굴하고 비참해 졌는지 아득하기만 한데 막연한 잘못은 고통으로만 남아 밤마다 살과 뼈를 분리시키고 있다.
내가 시를 쓰고 있는 것은 어쩌면 그 모든 고통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시도는 아닐까. 하지만 그러한 시도도 시간을 넘어 어느새 시를 통하여 살길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를 신주 모시듯 모시고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더 강하게 든다. 시를 부리며 시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시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시에 끌려 다니고 있다. 표현 하나를 위하여 수십 번을 고쳐 쓰고 다시 써 보지만 글 같은 글 한번 써 보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진정 소스라치게 경악하게 한다. 이런 나 자신이 소름끼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얼마나 더 경악해야만 하는 것일까. 시 한편을 완성하는 시간은 길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시를 버리는 시간은 너무도 짧다. 결국 쓰레기 통으로 가는 시를 붙들고 무엇 때문에 그토록 씨름해 왔던가?
쓰레기통으로 가다만 시가 너저분하게 얽혀 있지만 버리지 못한 것들도 있다. 그것들이 긴 시간동안 써 왔던 시를 일순간에 버리는 일보다 더욱 소름끼치게 하는 것들이다. 그것들은 살아가면서 문득 오래된 일들을 들추어낸다. 어제의 일처럼 상기시켜주는 그것들은 아무리 덮으려 해도 덮지 못하는 그래서 더 비집고 나오려하는 고독이다. 진정 내가 찾고자 하는 실체가 그 고독은 아니던가? 그럼에도 완벽하게 끄집어 낼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내가 생각하는 고독은 속초 앞바다에서 내장을 드러내듯 다가오는 푸르고 푸른 옥색의 물결이다. 바위에 부딪혀 하얗게 부서지며 흔적 없이 사라져버리는 파도처럼 투명해지는 것이다. 곱씹어도 떠오르지 않는 기억을 다시 엮으려 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에만 나를 맡기기로 하자. 기억나지 않는 기억을 억지로 기억하려한다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묶어 새로운 기억을 창조해 내는 것밖에 무엇이란 말인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홀가분했다. 정해진 일정을 소화시키기 위한 여정 때문에 아쉽게도 속초의 밤바다는 정동진의 밤바다로 대신했지만 오전에 동명항 해돋이 정자에서 본 속초의 바다는 옥구슬처럼 맑았고 회색빛 하늘은 바다색깔을 더욱 짙게 만들고 있었다.
등대 주변에 일렁거리는 물비늘에서 비릿한 냄새가 전해져 왔지만 부서지는 파도소리는 경쾌했다. 한가하게 낚싯줄을 드리운 낚시꾼들은 바다의 일부가 되었고 드문드문 솟아난 바위들은 고독한 무인도가 되었다. 수평선 너머에서 배 한척이 넘어오고 또 배 한 척이 넘어가고 있었다.
밤이슬이 내리는 바다를 보며 한없이 앉아있고 싶었다. 그렇게 앉아있다 보면 들을 수 없었던 그 무엇인가를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애초부터 들을 수 있는 그 무엇도 없었겠지만 그 들을 수 없는 그 무엇이라도 듣고 싶었다. 목소리가 높은 사람은 실속이 없다. 주변 사람들을 솔깃하게 하는 작용을 한 번쯤은 하겠지만 이내 듣기 싫은 소리로 전락하고 만다. 목소리가 큰 사람으로만 기억에 남을 뿐이다.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그 진리를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파도소리에 섞여 말이 바람이 되고 바람이 말이 되는 바다에서 사람들은 말없이 분주한 것 같았다. 어쩌면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소리 때문에 내 귀가 먹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입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가 아니라 몸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것이다. 파도소리에 모든 어색함이 희석되고 수평선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대화의 전부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지나치게 흥분하는 것 또한 빠르게 식어버릴 것을 예측하게 해준다. 말이 많은 사람은 결국 자신의 생각을 타인에게 관철시키기 위한 끊임없는 작업에 몰두해야 할 것이다.
소리로부터 해방되고 어색함으로부터 탈피하여 물빛처럼 청명한 고독의 순간에 머무르고 싶다. 그래서 소리 없는 언어로 세상을 보고 싶은 것이다. 술에 취하지 않은 생각으로 아득한 바다를 바다로 보며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고독이고 싶다.
속초에서 하루를 보냈지만 시인들의 체취는 느낄 수 없었다. 해변에서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소리가 언제나 다르게 들리는 것은 찾아오는 사람들의 종류가 너무도 많기 때문은 아닐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들리지 않고 같은 사람에게도 매번 다르게 들리기 때문에 바다는 언제 찾아도 새로울 수밖에 없다. 그 많은 소리들 중에서 진정 찾고자 하는 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그 소리는 웅성거리는 소리처럼 멀어져 갈 뿐이었다. 마음속에 너무도 많은 귀를 열어놓고 들리는 소리를 생각에게 전달하니 생각은 그 어떤 소리도 들을 수 없었던 것이다. 끝없이 밀리고 밀려오는 파도와 옥색 물빛은 그저 바다라는 단어만 떠올리는 역할만 했을 뿐이다.
속초에서의 밤은 결과가 나에게 미칠 아무것도 없는 축구경기를 보면서 시간을 죽이고 말았다. 차라리 영랑호 주변을 거닐며 호수의 밤풍경을 감상했으면 더 좋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지만 지난 일에 대한 연민일 뿐이다. 이틀간의 여정에서 나와의 약속을 지켰다는 생각에 가슴 어디에서인가 황홀감 같은 것이 뻗쳐올랐다. 그동안 술을 마시며 횡설수설했을 나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얼마나 가관이었을까? 여행을 떠나 첫 번째 점심식사를 할 때 사무국장이 술을 마시지 않는 식사는 처음이라며 빈정거리기도 했었다. 술을 마시지 않는 나를 보고 회원들은 미쳤나보다고 했다. 술을 마시지 않아도 남들이 보기에 온전하게 미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에 웃음이 났다. 술이 결코 나쁜 것은 아니다. 사람과 사람의 사이를 좁히는데 윤활유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많은 사람들을 술과 함께 만났고 술과 함께 친해졌다. 글 또한 술과 함께 써 왔으니 술은 지금의 내 모습을 만드는데 상당한 역할을 한 것임에 틀림없다.
여행을 끝내고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가깝고도 멀었다. 동해를 돌아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약 일천 킬로미터의 여정이 머릿속에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이틀 동안 과연 무엇을 느끼고 돌아온 것일까. 문학기행이라는 이름을 핑계로 흥청망청 놀다 온 것인가? 어쨌든 많은 시간이 흐르고 나면 사진 속에 담아온 풍경들을 보면서 지난날들을 되새길 수 있을 것이다. 여행을 하는 동안 회원들이 모두 참아주었고 서로를 배려한 덕분으로 여행은 아름다운 한 편의 시가 되었다. 시라는 것이 꼭 글로써 나타내어져야 할 것은 아니라 생각한다. 아름다운 풍경 속으로 들어가 그 풍경의 일부가 되어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그 자체로서 시가 되지 않을까. 시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가다보면 시를 찾기도 전에 지쳐 쓰러져 버릴 것이다. 책 속의 인물에게 반하고 마침내 그 책을 쓴 사람에게 반하고, 어느 미치도록 바람 부는 날 홀로 언덕에 서서 미친 듯 히죽거리던 날이나 골방에서 일기장이 고독을 씹던 날들을 생각하며 시가 나에게 오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 이 모두가 시를 맞이하기 위한 숭고한 의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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