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 중순 월례휴가로 하루 연가를 냈다. 휴가를 장려(?)하기 위한 정책이라고나 할까? 연가보상비 예산이 없기 때문에 남아있는 휴가를 찾아 먹으라는 취지에서이다. 여름휴가 외에 봄, 가을 계절휴가를 사흘 정도로 계획하여 휴가를 가라고 해도 가지 않자 월례휴가란 것을 만들어 낸 것이다. 아주 머리가 비상한 사람에게서 나온 생각일 것이다.
어쨌든 하루 연가를 내고 순천만 갈대밭으로 떠났다. 고속도로로 가볼까 생각했지만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대한민국에서 살아가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대한민국에서 살아갈 사람이 돈을 내고 길을 다녀야 한다는데 대하여 불만이 있던 터라 국도로 가기로 했다.
네비게이션에 순천시 대대동 162-2번지를 찍고 길을 나섰다. 거리는 약 130㎞. 대형버스, 각종 트럭 등으로 인하여 속도를 내지 못하여 순천만에 도착하니 3시간 정도 걸렸다. 차라리 고속도로로 가면서 휴게소에 들러 잠시 쉬어가면서 갔다면 덜 피로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갈 때는 고속도로로 갈까 했는데 아내가 그냥 국도로 가자고 해서 다시 국도로 돌아왔다.
순천만의 갈대축제는 10월 마지막 주 정도에 개최하는데 올해는 신종플루 때문에 취소되었다. 축제는 취소되었지만 평일인데도 어디에서 왔는지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50대 후반의 남자들과 여자들이 많았고 남자들은 직장 때문인지 많지 않았다. 지나는 사람들의 소리에서 경상도 사투리가 많이 섞여 있었다.
갈대와 억새는 같은 벼과 식물인데 갈대는 습지가 아니면 자라기 힘들고 꽃의 모양이 두툼한 편이고 잎도 넓고 왕성한 형태이고 억새는 물억새를 제외하고는 보통 척박한 산에서 자라며 꽃과 잎이 갈대보다 좁은 편이다. 순천만 갈대는 약 15만평에 달한다고 하는데 갈대밭의 전경은 눈으로 빨아들일 수는 있어도 내가 가져간 카메라로는 빨아들일 수가 없었다. 카메라의 눈이 보는 시야는 한정되어 있어서 일부분만 당겨지기 때문에 눈이 보는 전경과 카메라에 찍힌 전경은 다른 세상을 보는 것과 같았다. 멀리서 찍었으면 그나마 전체적인 전경이 잡힐 것이었지만 바람에 나폴거리는 갈대의 꽃을 카메라의 눈 앞으로 잡아당기지는 못할 것이었다. 그렇지만 멀리서 찍을 수 있는 장소가 없었고 바다와 이어지는 순천만의 전경을 볼 수 있는 용산 전망대에서는 만의 풍경이 너무 멀어서 카메라의 눈이 닿지 못했다. 사진작가들이 고급카메라와 망원렌즈를 들고 다니는 이유를 실감할 수 있었다. 또한 만이 바다로 잇닿는 부분은 역광으로 인하여 눈부시게 반짝였으나 카메라 작동법을 모르는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카메라 설명서에 역광일 때는 어떻게 하라는 설명을 본 것도 같은데 조작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하여 갈대를 뒤에 두고 바다로 멀어져가는 만의 뒷모습을 눈으로만 볼 수밖에 없었다.
개펄을 매립하여 땅을 만들어내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요즈음 순천만은 다행스럽게도 갈대축제를 만들어내어 훼손할 수 없도록 장치를 해 놓은 것인데 그 장치 때문인지 그나마 형태를 보존하고 있었다. 갈대숲 사이로 용산 전망대까지 나무다리를 연결하여 갈대숲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해 놓았는데 그 정도의 훼손은 봐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해 보았다. 갈대숲으로 이어진 다리 위에서 펄을 바라보면 군데군데 구멍이 나 있는데 자세히 보니 짱둥어와 게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물이 많은 곳으로 이동해보니 그곳에는 짱둥어가 펄 위에 바글바글 올라와 있었고 새들은 물가를 떠나지 못하고 주둥이로 물 속의 펄을 헤집고 있었다. 물가를 떠나지 못하는 흑두루미는 언제부터 저렇게 있었을까? 그들은 오랜 세월동안 진화하지 못하고 짱둥어와 게를 잡아먹으며 연명해 나왔고 그들끼리 눈이 맞아 새끼들을 생산해 키워왔으리라.
만의 시작에서 바다로 나아가는 수로를 따라 흘러가는 유람선에는 제각각의 사람들이 타고 제각각의 생각을 하고 있을 터였다.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 육지 쪽으로 밀렸다 바다 쪽으로 밀려나기를 수만 년 동안 반복했을 것이고 그 반복의 현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사람들은 개펄과 함께 살고 죽었을 것이다.
순천만은 이순신의 마지막 해전이 있었던 곳이다. 민물과 바닷물 사이를 수없이 오가며 어떻게 싸워야 할 것인가를 고민했을 고독했던 사람은 전쟁의 마지막을 보지 못했다. 1598년 9월 조일전쟁의 막바지에 일본군은 순천만 신성포 왜성서 퇴각 준비를 하고 있었고 이순신은 여수와 광양 쪽에 진을 쳐 왜군을 포위한 상태였다. 왜군은 일본 진영에 전령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고 구원군은 노량을 지나 순천성에 도착했다. 이때 이순신은 순천성의 일본군을 묶어놓기 위해 배에 백성들을 태워 군함으로 위장하여 왜군을 봉쇄 했다고 한다. 단 한 명의 왜군도 살려서 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노량해전은 대승을 거뒀지만 가장 쓸쓸한 해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무다리를 지나다 보니 갈대숲 속에 녹슨 닻이 버려져 있었다. 어쩌면 개펄을 자나며 볼 수 있도록 전시품으로 던져 놓았는지도 모른다. 버려진 닻은 이제 쓸쓸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외에 할 일이 없다. 그 자리에서 녹으로 뒤덮여 썩어가는 것밖엔 할 일이 없는 것이다. 인생도 그러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면 너무 허무하다. 지나가는 말로 돈이 없는 부모는 찾지도 않는다는 말을 많이 한다. 손주들에게 줄 용돈이 있는 노인에게는 자식들이 찾아오고 그렇지 않은 노인들에게는 자식조차도 찾아오지 않는다고 하지 않는가? 버려진 닻의 신세로 전락해 버리는 것인가. 돈 때문이 아니라 사람이 그리워 찾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인데 어떻게 해야 그렇게 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술을 마시지 않은 지 두 달 정도 되었는데 찾을 사람도 없고 찾는 사람도 없다. 직장이라도 없으면 사람 만날 일이 없다. 그동안 사람들을 만나면서 대부분 술 한잔하자는 빌미로 만나왔기 때문일 것이다. 한 때 술에 대한 예찬도 했지만 정작 술을 마시지 않으니 사람 만날 일도 없다. 술 취한 사람들과 섞여있으니 부담스럽기도 하다. 언젠가 다시 술을 마시겠지만 이런 상태로는 별로 술을 마시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는다. 어쩔 수 없는 자리에서 소주 한두 잔을 마시고 나면 두통이 찾아온다. 처음에는 그냥 두통이 왔거니 싶었지만 두통을 관찰해보니 술을 한 잔이라도 마신 날은 어김없이 두통이 찾아왔던 것이다. 몸에 찌들려있던 술기운이 빠져나가는 증세인 것 같다. 술을 마시지 않은지 한 달이 지났을 때 몸무게가 5㎏빠졌다. 두 달이 지난 지금 조금 회복되어서 정상 몸무게보다 3㎏이 부족한 상태다. 언젠가는 정상을 되찾을 것이지만 현재 상태가 홀가분하다. 인사불성이 되어서 집인지 길바닥인줄도 모르고 헤매던 날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어쨌든 월례휴가 덕분에 평일에 쉬는 즐거움을 만끽했다. 쉬면서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은 다시 시작하는 즐거움을 준다. 갈대밭이 있는 개펄을 매립하지 않은 순천을 생각해 본다. 개펄 속에서 살아가는 짱둥어와 게도 생각해 본다. 그들을 잡아먹으며 살아가는 새들을 생각해 본다. 바람이 불 때마다 새 울음소리를 내는 갈대꽃을 생각해 본다. 세상에서 내가 없어지는 날을 생각해 본다.
'사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0. 7. 27 (0) | 2010.07.27 |
---|---|
가장 소중한 나 (0) | 2010.06.16 |
중국 북경 나들이 (0) | 2009.10.29 |
2009년 보길도 문학기행 (0) | 2009.10.01 |
넋두리 (0) | 2009.07.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