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 둑길을 거닐며
토요일부터 비가 온다고 했지만 낮 동안 맑았다. 날씨가 여행에 대하여 배려해 준 것 같아 고마웠다. 하동으로 갔다. 섬진강을 보면서 섬진강 둑길을 따라 홍쌍리 매실농원까지 걸어서 갔다. 약 4킬로미터, 왕복 8킬로미터이다.
겨울 섬진강은 푸르고 푸렀다. 강 주변에 심어놓은 매실나무는 가지로 봄기운을 밀어내고 있었다. 땅 속 깊숙한 곳의 뿌리 끝에서 힘껏 빨아올린 봄을 나뭇가지로 밀어내고 있었다. 서둘러 핀 꽃은 산의 능선과 강줄기를 휘둘러 온 바람에 흔들렸고 혼자서 핀 꽃은 혼자라서 가여워 보였다. 강태공들은 강기슭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강 속으로 흐르는 봄을 낚고 있었다. 강은 백운산으로부터 발원하여 쉬지 않고 흘러서 경상도 내륙을 통과하여 광양만에 닿을 것이다. 하구에 닿은 강은 지쳐서 쉬엄쉬엄 흘러 바다로 갈 것인데 바다로 가기 전에 내륙을 돌아 내려오면서 들었던 이야기들을 남해안의 어느 바닷가에 풀어 놓을 것이다. 다시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가는 아쉬움이 발길을 잡는 격인데 사람들은 상류든 하류든 바다이든 제각각 놀 것이고 노는 방법도 제각각일 것이다.
섬진강 둑길을 걸어가면서 맞는 바람은 싱그러웠다. 섬진강변에서는 다른 지역보다 빨리 봄을 끌어내는지 이른 봄볕은 사람들의 마음도 봄으로 물들일 작정이었다. 겨울을 난 꽃몽오리가 터질 것처럼 단단하게 여물었고 참지 못한 몽오리는 기어이 터지고 말았다. 여물게 익은 몽오리들은 봄을 알리기 위해 기어이 터질 것이고 온 산은 흰빛으로 물들어 때 아닌 폭설의 광경을 만들 것이다. 흰색으로 꽃을 피우는 나무는 줄기에 흰빛을 감추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흰꽃을 피우는 성분만을 뿌리에서 빨아들이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만약에 생명체에 흐르고 있는 물의 색깔대로 꽃을 피운다면 사람들은 분명 붉은 꽃을 피우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붉은 색은 흰색보다 더 정열적이어서 꽃을 피워내는 힘도 강한 것인지 군데군데 꽃을 피운 나무들은 모두 붉은 꽃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이 홍매화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붉은 꽃을 피운 나무는 그 자체로서 다른 나무들보다 강하게 보였다. 바람이 부는 까닭이었는지 남쪽으로 흘러가야할 물의 흐름은 서쪽방향으로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보이는 것이 어찌되었건 물은 광양만으로 흘러갈 것이고 인생도 흘러가야 할 곳으로 흘러갈 것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가끔 나이를 생각해 볼 때 언제 이렇게 흘러왔는지 몰라 깜짝 놀라기도 하지만 오래전부터 나보다 나이가 많이 들었던 사람은 지금도 그만큼의 차이로 나이를 먹어간다는 생각에 안도하곤 한다.
매실농원에 도착해보니 나들이 나온 사람들의 모습이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아직 꽃을 피우지 못한 나무들을 보면서 눈꽃처럼 흰꽃이 산을 뒤덮은 모습을 상상하면서 왔을 것이다. 매실농원에서 내려다보이는 섬진강의 모습은 길게 굽이치며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질러간다. 경상도 하동에서 다리를 하나 지나면 전라도 광양에 이른다. 광양쪽의 섬진강 둔치는 경비행기 활주로로 사용되고 있고 동호인들의 모임이 있는 날이면 하루종일 경비행기는 떴다 내리기를 반복한다. 섬진강 둑길을 걸어오면서 모래밭에 앉아있는 수십 마리의 독수리가 앉아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들의 비행은 편대를 이루지 않았고 제각각 날고 앉기를 반복했다. 날개를 접은 독수리들은 모래밭에서 먹을 것을 찾지 않았고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는 것처럼 공허한 강의 흐름에 시야를 빼앗긴 것 같았다.
아직 시기가 이른지 섬진강에 재첩을 채취하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고 청둥오리들만 한가롭게 노닐고 있었다. 그 한가로움 속에 빠져들어서 헤어날 수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드러내기를 좋아하고 다른 사람보다 잘났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하여 각자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지만 새들은 그저 태어났기 때문에 본능이 시키는대로 새끼를 생산하고 살 수 있을 때까지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도 그들의 의사소통 방식이 있겠지만 사람인 나는 그들의 소통방식을 알지 못해서 다만 답답할 뿐이다. 오리도 그렇고, 강물도 그렇고 제자리에서 태어나 뿌리를 박고 살아가는 나무들도 그렇고 그들은 오로지 사람들의 눈에 띄어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에 의해 사람들의 마음속에 제각각 인식되어질 것이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고 적막한 숲속에서 살아가는 나무들은 그저 숲으로만 인식되어질 것이고 그들은 시키지 않아도 씨를 뿌리고 늙고 병들어 죽어간다.
매실농원의 단단하게 여문 몽오리들은 그들만의 잔치를 위해 부지런히 봄을 만들고 있을 것이다. 봄은 그저 오는 것이 아니고 봄을 피우기 위한 의지가 작동해야만 비로소 피워낼 수 있다. 꽃들은 몽오리 속에서 화려한 꽃을 피우기 위해 웅크리고 있다. 속살 속에서 온전한 봄을 만들기 위해 수군거리는 것이 환청으로 들린다. 섬진강으로 내려온 봄바람과 한꺼번에 터지는 꽃의 향연이 만나 눈처럼 휘날리는 섬진강의 풍경은 결코 몽환이 아닐 것이다. 그렇게 화려한 꽃잔치는 찬란한 매실 열매를 하고 잉태하고 있다. 흙 속에서 봄을 빨아들여 꽃을 만들고 꽃의 결실인 열매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들은 과정 없이 결과만 얻으려고 한다. 그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정이 없는 결과는 있을 수 없다. 어쩌면 결과보다는 과정이 더 중요할 수 있다. 그리고 결과가 없는 과정만을 더 중시해야 할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모두 살아가는 과정에 머물러 있다. 죽지 않은 다음에야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단 말인가. 과정을 살아가면서 그 과정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만나서 새로운 과정을 만들어 낸다. 사람들도 섬진강변에서 뿌리를 박고 살아가는 한 그루의 나무처럼 그저 살아갈 뿐이다. 어떤 결과도 섣불리 만들어내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섬진강은 지금도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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