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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내 젊은 날의 숲/김훈

by 1004들꽃 2011. 3. 5.

내 젊은 날의 숲/김훈

 

디자인 회사를 사직하고 민통선 안에 있는 국립수목원의 계약직으로 채용되어 수목원의 꽃과 나무들의 세밀화를 그리게 되는 조연주라는 한 여자가 약 일 년 동안 겪게 되는 일들의 나열이다.

자폐이면서 자폐의 유전인자를 아들 신우에게 닮은꼴로 물려준 안요한 실장, 그리고 민통선 안에서 근무하는 김민수 중위. 그들이 겪게 되는 이야기들이다.

김민수 중위는 6.25 당시 뺏고 빼앗기는 전투 과정에서 야산에 버려진 유해를 발굴하는 유해발굴단에 발령받았고, 연주는 그의 부탁으로 발굴된 뼈그림을 그리게 된다.

 

산화되어 나무젓가락처럼 가늘어진 뼈를 그린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속에서 개미들이 쏟아져 나오는 뼈는 뼈의 단면이 없어져 텅 빈 동굴처럼 공허할 것이다. 그 뼈를 그리는 것이나 나무의 세밀화를 그리는 것은 같은 것 같았다.

그린다는 것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겪은 가정을 나타내는 것은 아닐 것 같았다. 그리하여 ‘그린다고 해서 다 그려지는 것은 아니다. 완성했다기보다 그리기를 끝냈다.’ 는 연주의 표현은 맞을 것 같았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과 그림을 못 그리지만 그림을 읽는 사람은 다른 세계에 있을 것 같다.

 

연주가 그린 세밀화를 보고 있는 안실장을 보면서 생각한다. ‘그는 아마 그 자신의 식물학적 지식으로 나의 그림을 들여다볼 것이었다.’ 내가 쓴 글을 보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가 어떤 의도로 썼든지 읽는 사람들은 제각각 생각할 것이다.

 

어쨌든 뼈는 오랜 세월동안 비와 눈과 바람과 온도 변화를 겪으면서 풍화되었고 나무들도 계절의 변화를 겪으며 제각각 그 모습을 변화시켜간다. 그것을 그리는 사람이 그 변화 과정을 보았을지라도 그림으로 나타낼 수는 있는 것일까. 그림은 종이 위에 그려지지만 움직이는 그림이 아니라 그리는 사람의 시각과 생각 속에서 굳어진 관념으로 표현된다. 그래서 그린 사람의 의도가 그 그림을 보는 사람의 생각 속에 파고들지는 않을 것이다.

 

소설은 그저 일상의 기록처럼 잔잔하게 흘러간다. 마치 김훈의 ‘공무도하’를 읽는다는 착각을 할 정도다. 사람들은 어쩌면 시작도 끝도 없는 이야기를 통하여 자신의 생을 반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의 뼛가루를 밥에 섞어 산에 뿌리는 장면도 의식행사로서가 아니라 매일 아침 밥을 지어 아침밥을 먹는 것처럼 일상적으로 보인다.

 

그녀의 아버지는 군청의 5급 공무원으로 근무하면서 상사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하지 말아야 했을 일을 했고 체포되어 옥살이를 했지만 모든 것을 자신이 원해서 했다는 진술을 끝까지 밀고 나간다. 이러한 일들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했음에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도 소설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신문기사처럼 그저 사건의 전말을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도 작가의 문체는 화려해서 줄거리를 읽는 것보다 문장으로 읽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간다. 살아가는 일들은 극적인 것도 없을 것이고 나락에서만 살아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숲이 살아가는 것처럼 아침을 맞고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겨 하루하루를 이어간다. 숲에서는 새들도 각자의 생을 이어나가고 풀과 꽃과 나무들도 그들만의 방식대로 생을 이어 나간다. 그 속에서 빛과 바람과 비와 눈도 숲의 생과는 상관없이 스쳐 지나갈 뿐이다. ‘새들은 일제히 울었고, 저마다 따로 울었다. 아무도 듣는 자가 없는 밤에도 새들은 제 목청으로 제 울음을 울어댔다.’

 

연주의 작업은 생애의 가장 역동적인 순간에 작동하고 있는 식물의 생명의 표정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림으로서 그릴 수 없는 소리를 그려내야 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경치는 그저 바라보는 것으로 족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을 그리는 것이나 글로 나타내는 것이나 모두 쓸데없는 일로 생각된다. 그것을 그릴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말로써 그림을 설명한다. 실지로 말을 듣고 그림을 쳐다보면 그림은 다시 보이게 된다. 말을 듣기 전에 보지 못했던 것들이 말과 그림이 합쳐져서 새로운 그림이 되는 것이다. 세밀화를 그리는 것도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식물의 자라는 과정과 식물의 생각을 그림으로 그려내는 것이다. 하지만 그림 한 장으로 그 모든 것은 표현되지 않을 것이고 다만,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 그 모든 과정들이 보여지게 될 것이다.

 

글을 쓰면서 항상 느끼지만 표현하고 싶은 것을 제대로 표현할 수가 없다. 사실에 입각하여 사실을 그대로 옮겨 적는 일은 농부들이 낫으로 풀을 걷어내는 것처럼 건조하다. 그렇지만 사실이 아닌 일을 적을 수는 없으니 사실에 입각하여 감정을 자극할 수 있는 글을 써 내야 할 것이다. 모든 설명을 적어 내려가면 싱거운 글이 길어져서 지겹고 함축하여 쓰고자 하나 내가 가진 시어가 부족하여 글을 이어나갈 수 없다. 진퇴양난의 기로에 선 나는 바람 앞의 등불처럼 항상 위태롭다. 그만두자니 생이 재미없고, 계속하자니 글이 재미없다. 아무도 읽지 않는 글을 쓴다는 것이 어떤 심정이라는 것은 글쟁이들은 잘 안다. 그림은 한 눈에 들어오지만 글은 읽어야만 된다. 그림은 읽지 못할지라도 볼 수 있으나 글은 읽지 않으면 읽을 수 없다. 그림은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그 세부를 살필 수 있다. 색깔과 색깔의 차이에 의해서 사물의 형태가 드러나고 그것이 그 자리에 있게 된 이유를 생각하게 한다.

 

글로서 그려지게 되는 것은 어디까지일까. 글로서 삶을 설명할 수 있는 곳은 어디까지일까. 글로서 드러낼 수 있는 색깔은 어떤 색일까. 글로서 삶을 그릴 수 있다면,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싶고, 그들의 삶을 아름답게 그려서 가장 행복한 색깔로 채색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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