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을 읽고

불란서 안경원/조경란 소설집

by 1004들꽃 2011. 3. 28.

불란서 안경원/조경란 소설집

 


조경란의 소설집이다. 불란서 안경원은 199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작품이다. 조경란 소설 속의 “나”라는 사람의 이미지는 불우하다. 한결같이 갇혀있다. 갇힌 곳에서 생을 이끌어간다. 지독한 속박 속에서 끊어지지 않는 삶을 끌어가고 있다. 여자 혼자서 살아가는 생이 만만하지 않다는 이야기다. 소설 속의 “나”는 모두 조경란의 생이 아닌가 착각할 정도다. 아니 그녀의 생을 그대로 소설 속에 녹여 놓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나는 조경란이라는 사람을 전혀 모른다. 다만 소설집을 접하고 그 소설 속의 주인공이 조경란의 분신이라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소설가든 시인이든 수필가든 그들의 이상을 떼어놓고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전혀 경험하지 않은 일들은 이야기로 만들어질 수 없고 그 사람의 생각 속에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비슷한 일들을 경험삼아 상상을 동원하여 이야기는 새롭게 태어난다. 새롭게 태어난 이야기는 전혀 글쓴이의 경험이 아니고 새로운 가상의 세상일 것이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행복만이 있을 수 없다. 그가 떠나고 없는 안경점에서 혼자서 살아가는 그녀는 주변 남자들의 갖은 유혹을 견뎌야만 했다. 혼자서 살아가고 있는 여자에 대하여 남자들은 무작정 대쉬한다. 또 혼자서 살아가는 여자는(목이 긴 사내 이야기에서) 중학생 남자애를 유혹한다. 언젠가 실제로 뉴스에서 나왔던 여자교사가 중학생을 유혹하여 정사를 벌였던 이야기와 흡사하다.


어쩌면 사람으로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상상력의 동원이 아닌가 생각된다. 소설에 대하여 해설을 한 사람의 표현을 빌자면, 섬세한 묘사에 내재된 풍부한 시적 충전은 그 자체로도 아름다운 재능이며 개인의 실존적 동기에 대한 섬세한 소설적 탐문은 소설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인간학적 성찰에 값한다고 했다. 하지만 조경란의 소설집을 펼쳐들고 읽어본 사람이라면 그 말에 백퍼센트 찬성할 수는 없다. 물론 사람의 내재적인 부분에 대한 성찰은 뛰어났고 감히 고백할 수 없는 일들을 가감없이 표현했지만 뭔가 부족한 느낌을 받았다. 너는 그렇게라도 쓸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뻔하다. 그렇게 쓸 수 없다는 대답을 일초의 여유도 두지 않고 할 수 있겠지만 소설가가 아닌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된다. 아니, 어쩌면 소설의 소재나 내용은 탁월했다. 그러나 소설이 펼쳐져나가면서 배경을 꾸미는 수사는 뭔가 부족했다. 김훈의 화려한 수사에 빠져있다가 느닷없이 간결하게 나가는 내용들이 헐빈해 보였으리라. 그만큼 사람들은 한 곳에 빠져있다 보면 다른 곳에 소홀해 질 수 있다는 것을 생각했다. 길들여지기 나름이라는 생각이다. 한 문장을 진정 지겹도록 파고드는 김훈의 문장은 때로 난감했다. 그 난감함은 더욱 집중하게 만들었고 심지어 책을 아껴 읽을 정도로 집착했다. 주로 장편소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조경란의 단편소설집은 단편인만큼 단편적으로 끝났다. 단편소설이 끝난 그 뒤의 이야기는 상상력으로 채워야 했다. 그럼에도 그 속에서 말하는 내용들은 상상 속에서 살아가는 나의 상상을 채우기는 충분했다. 유리거울 속에 갇혀 살아가는 불란서 안경원 주인은 유리창 밖의 그저 지나가는 사람들 한사람 한사람에게 섣불리 눈을 놓지 못한다. 혹시라도 안경원에 한번이라도 찾아왔던 고객이 아닐까 싶은, 그래서 만약 그들이 고객이었다면 그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안경원 주인은 그것으로서 장사를 그만두어야 하는 심정.


기억이 그렇게 뛰어나지 못한 우리들도 가끔 느끼는 심정이다. 문득 시내를 지나가다가 낯선 사람이 인사를 할 때 속으로는 도대체 저 사람이 누굴까 생각하면서도 웃으면서 인사를 한다. 두고두고 그 사람이 누굴까를 생각할지라도 그 순간을 모면하기 위하여 인사를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는 의구심. 도대체 누구일까? 정도가 심해지면 밤잠을 설치기까지 한다. 끝내 밝혀내지 못하고 세월을 보내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그러한 일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잠에서 문득 깨어났을 때 새벽 세 시. 남편은 옆에 없고 현관문이 열려있고 밖으로 나가보니 남편은 공중전화 박스에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있는 상황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사소한 날들의 기록에서) 출장을 간 남편을 기다리지만 끝내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안다. 가끔 “나”를 쳐다보면서 안타까워하는 것. 그 눈에 담긴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겨우 서른세 살의 나이. 겨우 서른세 살이다. 너무 늦은 서른세 살이 아니라 겨우 서른세 살인 것이다. 서른세 살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나이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서른세 살과 너무 늦은 스물여덟 살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나이에 대하여 생각하는 잣대는 분명 사람마다 다를 것이지만 어떤 나이를 기준으로 하든 사람은 현재의 나이에 가장 불만이다. 지나온 나이들은 이미 살아내 버렸기 때문에 안도할 수 있고 다가올 나이는 희망이 있기 때문에 밝다. 그 옛날 빨리 마흔이 되고 싶었던 날들을 기억해보라. 빨리 나이를 먹어 어른이 되고 싶었던 마음을 가져보지 않았던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래서 현재는 늘 불안하다. 불안한 현재를 잘 살아낼 수 있도록 많은 책들이 나왔다. 그 책들은 오로지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그만큼 현재는 과거와 미래를 총괄할 수 있는 시간이라는 것이다. 현재가 없다면 과거도 미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설에 대하여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쩌면 현실과 동떨어지지 않는 문장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더 끌어안는지 모른다. 그런점에서 조경란은 간결한 문장과 현실감있는 문장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간다. 화려한 수사보다는 거울을 보듯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한다. 무너져가는 가부장의 모습들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이, 상상속에서만 말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소설의 형식을 빌려서 이야기된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지만 밖으로 끌어낼 수 없는 이야기들이 소설 속에서 까발려진다. 어쩌면 모두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조경란은 사람들과의 인터뷰 속에서 끌어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소설 속에서 대리만족을 한다. 단편 소설이기에 대리만족의 정도는 강하다. 장편 소설 속에서 느끼지 못하는 대리만족은 어쩌면 끝나지 않은 이야기의 결말을 독자가 맺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독자들의 다양한 상상력은 단편 소설의 결말을 다양한 방식으로 이끌어낸다.

 

'책을 읽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착한 여자/공지영  (0) 2011.05.06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 2/박경철  (0) 2011.04.17
동화처럼/김경욱  (0) 2011.03.09
내 젊은 날의 숲/김훈  (0) 2011.03.05
공지영의 지리산 행복학교  (0) 2011.0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