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네 집 / 박완서
박완서의 소설을 읽으면 평온해진다. 가식적인 모습으로 자신을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생의 깊숙한 곳이 있는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본성을 끌어올리게 된다. 사람마다 감추고 싶은 질투나 보여주고 싶지 않은 마음들이 책 속에 그대로 녹아 있다. 그래서 책 속에 질펀하게 빠져 들다보면 이내 책 속의 사람들과 하나가 된다.
[마른 꽃]
친정 조카 결혼식 때문에 대구에 갔다 오면서 고속버스에서 만난 노신사에게 명함을 받게 된다. 그는 우연하게도 같은 동네에 살고 있다. 사돈상을 당해 얼떨결에 맡게 된 강아지가 아픈 바람에 그에게 전화를 하게 되었고 강아지를 돌려보낸 후에도 차 한잔 하자는 만남으로 발전했다. 강아지를 핑계로 눈물을 흘릴 수 있을 정도로 간사스러워졌다.
하루는 목욕을 하다가 전화를 받게 되었는데 안방 경대에 본인의 하반신만 비친 모습에 경악하게 된다. 죽는 날까지 그곳만은 거울에게도 보여주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노신사와의 관계를 맏이인 딸이 알게 되고 재혼까지 들먹이게 된다. 하지만 딸에게 에미는 아버지 곁에 묻히고 싶다고 한다. 공원묘지의 남편 묘 곁에 가묘까지 만들어 놓았고 이미 묘와 묘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를 마지막으로 만난 날 미국 갈 수속 중이라면서 한 번 과부된 것도 억울한데 두 번씩 과부될지도 모를 일은 저지르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환각의 나비]
그 집은 행정구역상 Y시에 속했지만, Y시 사람들은 그 동네를 원주민 동네라고 불렀다. 원래 농사를 짓던 그 지역에 양옥집이 들어서면서 양옥집 동네라고 불렸지만 주변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그 동네가 원주민 동네가 된 것은 채 삼십 년이 지나지 않았다. 그 집은 양옥집 동네가 생겨나기 전부터 있었다. 원주민 동네가 Y시의 섬이라면 그 집은 원주민 동네의 섬이었다.
영주는 마흔 고개 마루턱에서야 겨우 대전에 있는 학교의 전임자리를 얻었다. 아파트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차 안에서 생각에 잠겨 있는데 아들 충우가 유리를 두드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충우는 할머니를 찾아 나왔다고 한다. 건망증이 심해지는 어머니를 한 때는 고속도로 순찰대가 의왕터널에서 발견한 적도 있었다. 할머니를 찾으러 나갔던 충우는 혼자서 돌아왔고 영주는 의왕터널 너머에 동생 영탁이가 살고 있기 때문에 어머니가 그곳에 갔을 거라고 생각한다.
장가들기 전부터 어머니를 자기가 모시겠다던 영탁에게 어머니를 맡기고부터 영탁의 집에는 현관문에도 밖에서만 열고 닫을 수 있는 자물쇠가 하나 더 달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방에도 자물쇠가 달렸다. 동생집으로 찾아간 영주는 어머니와 아내 사이에서 동생이 겪었을 마음고생을 생각하면서 다시 어머니를 모시고 온다.
그 집의 주인은 육이오 때 몰살당했고 주인의 살아남은 동생이 충격으로 인해 절에 들어가 이십 년 가까이 수도생활을 하다가 환속하여 그 집에 선원을 열었다. 마금네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마금이를 그 집에 잔심부름꾼으로 들여보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집의 도사는 열네 살짜리 마금이를 범하고 말았다. 그 사건을 계기로 그 집은 마금이의 소유가 된다. 마금이의 소유로 된 그 집은 점집에서 절집으로 변해갔고 천개사 포교원이라는 간판을 내 걸었다. 마금이는 자연 스님으로 불렸다. 초파일이 지나고 뒤란에 푸성귀를 뜯으러 간 마금이 앞에 노파가 나타난다. 노파는 아욱을 다듬을 줄도 모른다면서 자신이 다듬고 씻어준다. 그리고 부엌에 들어가 밥을 안치고 된장국도 끓여서 같이 겸상을 한다. 저녁까지 같이 먹고 같이 잠까지 잔다. 이렇게 편한고 꿈같은 달콤한 생활이 시작되었는데 가끔 먼 산을 쳐다보며 아들이 데리러 온다고 했는데 하며 중얼거리는 모습을 보며 계획적으로 버림받은 노인일 거라 생각하게 된다.
의왕터널 쪽으로 갔을 거라 생각했던 영주의 추측은 들어맞지 않았고 결국 경찰에 신고 했다. 신문 찌라시도 돌리고 포스트도 붙였다. 그렇게 반년이 흘렀다. 노인요양시설을 돌아보고 돌아오던 중 이상하게 끌리는 외딴집에서 천개사 포교원이라는 간판과 함께 빨랫줄에 나부끼는 어머니의 스웨트를 보게 된다. 연등 아래 널찍한 마루에서 회색 승복을 입은 두 여자를 본다. 큰 승복 때문인지 날개를 접은 큰 나비처럼 보이는 어머니가 그렇게 자유롭고 천진하게 보일 수가 없었다. 마치 환상을 보는 것 같았다. 영주는 어머니를 지척에 두고서도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다. 자신이 서 있는 곳은 현실이고 저쪽은 환상이니까. 현실과 환상 사이는 아무리 지척이어도 절대 넘을 수 없는 별개의 세계니까.
[참을 수 없는 비밀]
하영은 이름난 해수욕장의 호텔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날 해변으로 나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다가갔다가 사람이 죽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하얀 운동화를 신은 시체를 보고는 시체의 발치에 앉아 운동화 신은 발을 움켜쥐고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둘러선 사람들의 웅성거림 속에서 음독자살을 한 춘식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그녀는 계면쩍은 듯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눈물 자국도 없었다. 미친년이라는 말을 뒤통수로 듣고는 모래사장을 빠져나와 횟집으로 들어갔다. 이 층으로 안내받은 하영은 커피 한잔 마시겠냐는 주인아주머니의 말에 소주 한 병을 시킨다. 소주를 마시던 중 한 무리의 손님이 들이닥치자 하영은 식사는 아래층에서 한다고 한다. 진이 빠진 밥이지만 별안간 심한 허기가 느껴져 허둥지둥 밥그릇을 비웠다.
모래사장에는 죽은 사람도 구경꾼도 사라진 뒤였다. 얼마를 걷다보니 초당두부 가게가 많은 초당마을에 도착했다. 눈이 많이 내리던 날 허난설헌 생가를 보기 위해 남편과 이곳에 와서 순두부를 먹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중 허난설헌 생가를 찾아볼 생각도 없이 고가 앞에 서게 되었다. 고가를 들어가 사랑채의 사랑 마루에 드러누워 스르르 눈을 감았다. 인기척에 잠이 깬 하영은 널어놓은 고추를 뒤척이고 있는 노인과 마주한다. 역적질하면 삼족을 멸했으니 허씨라고는 안 산다는 말이 맞을 거라는 노인의 말을 듣고는 인사도 없이 사랑마당을 뛰쳐나왔다.
하영은 오빠 친구인 세준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여름방학때 시골로 내려 온 세준과 하영은 바람 쐬러 나갔다가 들길에서 마주쳤다. 세준의 얼굴을 보면서 성인용 상상력을 마음껏 펼치던 하영은 뭘 그렇게 보냐는 세준의 말에 화들짝 놀라 물귀신이 있다는 여울목 웅덩이에 들어갈 수 있느냐고 묻는다. 세준은 신발도 안 벗고 여울목으로 뛰어 드는데 하영의 기억은 거기에서 끊어지고 물에 젖은 세준이 하얀 운동화를 신고 풀밭에 누워 있는 장면부터 이어진다. 남의 집 대를 끊어 놓은 년이라는 세준 어머니의 애통은 소름끼쳤고 장례 후 며칠 안 돼서 세준 어머니가 다시 나타나 다짜고짜 하영이 홀몸이 아닌 줄 다 알고 있다면서 아들 하나만 낳아 달라고 한다. 원하면 비밀도 지켜주겠다고 한다. 사자와의 입맞춤이 최초의 입맞춤이라는 사실은 얼마나 참을 수 없는 비밀인가.
하영이네는 그해가 가기 전에 수도권 위성도시의 아파트로 이사했다.
하영은 지금까지 일어난 나쁜 일들이 모두 자신 때문에 일어난 일처럼 불길한 예감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마흔이 된 하영은 이제 불행을 예방하는 것은 선수를 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번 가출은 여느 때의 소풍하고는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해두기 위해서 호텔로 돌아와 집으로 전화를 건다. 전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차갑고 기품 있는 목소리. 뉘시유? 응. 당신 누구요? 누가 남의 집에……
[길고 재미없는 영화가 끝나갈 때]
어머니를 무시하는 난봉꾼 아버지. 소실을 집으로 데리고 와 큰절을 시키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말없이 받아주었던 어머니가 암에 걸렸다. 그런 어머니는 암에 걸린 사실을 아버지에게는 알리지 말라고 한다. 어머니를 소 닭 보듯 하는 아버지의 태도가 조금도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곧 죽을 마누라한테 여전히 데면데면하게 굴 영감 꼴을 보게 될 것을 피하려는 마지막 자존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아버지는 어머니로서는 그렇게 저항할 수밖에 없는 상대였다.
시장에서 사다 주는 반찬은 도저히 못 먹겠다고 언제까지 이 고생을 시킬 것이냐고 투덜거리는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말기 암환자고 남은 명이 다섯 달도 안 될 거라고 말해버리고는 아버지 반응은 살피지도 않고 나와 버렸다.그날 밤 아버지한테 전화가 왔다. 아버지가 어머니하고 직접 통화를 하고 싶어한 건 처음 있는 일이었는데 흐느끼는 음성으로 “여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요”라고 사랑 고백을 한다. 칠십에 처음 들은 사랑고백 때문에 배를 잡고 웃었고 죽을 때까지 즐겁게 보내셨다.
장례 때 상주인 오빠의 얼굴은 길고 지루한 영화가 끝났을 때의 관객의 얼굴을 연상시켰다. 길고 재미없는 영화는 아무도 또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난해한 영화를 보고 나면 혹시라도 이번엔 조금이라도 더 이해할 수 있을까 해서 한두 번 더 보게 되는 수가 있다.
아버지를 집 가까운데 모시기로 하고 아버지를 만나러 롯데월드 지하광장에 갔는데 거기서 여자 노인네 허리에 팔을 감으며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아주 자유스럽고 느긋해 보였다. 어릴 적 소실 집에 심부름을 갔을 때 집에서와는 달리 근엄함을 벗어버리고 편안하게 보였던 아버지가 생각났다. 아버지는 장남 노릇으로 몸을 옥죄는 걸 참지 못해서 편안함을 찾아 난봉을 핀 게 아니었을까. 소녀 시절에는 추악하게 보였는데 지금은 난봉기도 관록이 생겨서 멋있고 풍류스럽게 보이기까지 했다. 그런 아버지에게 웃으며 다가갔다.
[너무도 쓸쓸한 당신]
아들의 후기 졸업식에 참여하기 위해 별거 중인 남편과 만나기 위해 파바로티라는 찻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남편과 자연스럽게 별거가 된 것은 딸이 서울에 있는 대학에 합격하고 그 뒷바라지를 위해 서울로 오게 된 것이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을 딸보다 더 좋은 대학에 보내고 싶다는 그녀의 욕심과 과년한 딸을 혼자 객지로 내돌릴 수 없다는 남편의 생각이 자연스럽게 맞아 떨어졌다. 조회 때마다 교장 관사에서 들어야 하는 정권에 충성하는 판에 박힌 연설로부터의 탈출이다.
남편은 위로가 필요 없는 사람이다. 위로가 필요 없는 인간처럼 참을 수 없는 인격이 또 있을까하고 생각한다. 그렇게 역대 정권에 충성을 다하던 남편이 어찌된 일인지 명예퇴직을 당하고 휴전선하고 가까운 시골에 헌집과 거기 딸린 땅을 사놓은 게 있는데 거기 가서 살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같이 살게 되는데 대한 걱정은 없었으나 마이크 대고 연설을 못해서 어쩌나 하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났다.
안사돈이 제주도 왕복 항공권과 호텔 이용권을 건네면서 아이들에게 주라고 한다. 지나치게 처가 쪽에 신경을 쓰는 듯 보이는 아들 며느리의 즐거움을 훼방 놓기 위하여 항공권을 주지 않고 남편과 함께 그 자리를 탈출하듯 벗어난다. 실수로 항공권을 전달하지 못했다는 것을 안사돈에게 전화로 이야기 하지만 저쪽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는 예약한 것이 어디로 가느냐는 공허한 대답뿐이다. 하루 종일 꾸민 음모가 허사가 되고 말았다.
모텔 밖에서 서성이다가 방으로 돌아와 잠든 남편의 초라한 몸을 보며 평생을 가부장의 고단한 의무에만 얽매여 살아온 남편에 대한 연민으로 목구멍이 뜨겁게 치받쳤다. 모기에 물린 남편의 정강이를 가만가만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 여자네 집]
북한동포돕기 시낭송회에서 김용택 시인의 <그 여자네 집>을 낭송하기로 하고 그 시를 처음 읽고 고향마을과 곱단이와 만득이의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곱단이네는 가을이면 마을에서 제일 먼저 이엉을 이는 집이었고 만득이는 제일 먼저 곱단이네 지붕에 올라앉아 부산을 떨었다. 동네에서도 노인들은 그 둘이 짝이 된다면 보기 좋은 한 쌍이 될 것이라는 상상만 해도 즐거워했다.
만득이는 곱단이를 과부로 안 만들기 위해 혼사를 치르지 않고 입영했다. 여자 정신대 징집에 대한 소문이 흉흉할 때 도시 군수공장에 다니는 곱단이 오빠는 공사판에 측량기사로 일하고 있는 한 번 장가갔던 남자를 데리고 왔다. 군사적인 일을 하고 있어 징용은 면제된다고 하여 곱단이를 그의 재취로 보내 버렸다. 열아홉에 신의주로 시집간 곱단이는 돌아오지 못했고 살아서 돌아온 만득이는 순애와 혼사를 치렀다. 그후 서울로 이사를 갔고 육이오 이후 그어진 휴전선은 고향 행촌리를 이북땅으로 만들어 놓았다.
나는 이후 군민회에서 만득이를 만나게 된다. 만득이 아내 순애와 전화번호를 교환해 자주 만나게 되었고 순애는 장만득 씨가 아직도 곱단이를 못잊어하고 있다며 하소연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여러 번 듣다보니 넌더리가 나게 됐고 장만득 씨가 불쌍해질 무렵 그 여자의 부음을 듣게 됐다. 그녀가 손수 마련한 이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영정사진을 보고는 오히려 그 여자가 불쌍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만득이가 상처한 후 정신대 할머니를 돕기 위한 모임에서 나는 장만득 씨를 우연히 만나게 된다. 곱단이를 잊지 못해서 이런 모임까지 왔느냐고 묻지만 만득이는 곱단이를 잊지 못한다는 것은 순전히 집사람인 순애가 지어낸 말일 뿐이라고 한다. 정신대와 관련하여 강도의 폭력을 피하기 위해 얼떨결에 십 층에서 뛰어내려 죽었다고 강도는 죄가 없고 자살이 되는 것인지 묻는다. 당한 사람이나 면한 사람이나 똑같이 제국주의적 폭력의 희생자였노라고 천인공노할 범죄를 잊어버린다면 사람도 아니며, 당한자의 한에 면한자의 분노까지 보태고 싶다는 장만득 씨의 눈에 눈물이 그렁해졌다.
[꽃잎 속의 가시]
언니의 부음을 들은 것은 언니가 미국으로 돌아간 지 두 달이 채 안 되어서였다. 손자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한국에 들른 셈이다. 가방에서 여러 가지 선물을 꺼내 놓지만 루이뷔통 가방에 든 것은 보여주지 않아 모두들 궁금해 한다. 하지만 그 가방에는 수의가 들어 있었다. 그것을 본 며느리는 물론 모두 놀란다. 아들 결혼식에 수의가 뭐냐고 하면서 분통을 터뜨린다. 이후 수의보다 더 해괴한 일이 일어났는데 언니는 사돈집에서 보내온 예단으로 분홍 꽃이파리들을 찍어낸 듯 싹독거려 뿌려놓고 그 낙화 위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미국에 있는 조카에게 이야기하고 언니를 쫓아내듯 미국으로 보낸 후 두 달이 채 안 되어서 부음을 듣게 된 것이다.
언니는 60년대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냉동회사에 정식으로 출퇴근 하는 일자리를 얻었고 슈퍼마켓으로 넘긴 새우가 대량 반품되어 왔는데 언니가 작업한 것만 정직하게 일한 것으로 드러나 사무직으로 진급하게 되었다. 행여나 누군가 시기할까봐 아이 앰 쏘리를 달고 다니는 언니를 누군가가 고해바쳐 생선을 뼈째 가는 무시무시한 기계가 있는 곳으로 쫓겨난다. 곧 그 직장을 그만두고 일본사람이 운영하는 직업소개소를 통해 학교다닐 때 가장 좋아했던 과목이 양재였다는 것으로 불란서 사람이 운영하는 양장점에 취직하게 되었다. 양장점에서 가장 쉬운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은 미안감 때문에 늦게까지 남아 있다가 청소까지 마무리하고 퇴근하곤 했는데 금지된 장난에의 유혹으로 아직 찾아가지 않은 맞춤옷을 걸쳐보곤 했다. 어느 날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취재를 나왔는데, 부자들의 수의를 비싼 값으로 잘 만들기로 소문난 불란서 양장점을 취재하러 왔던 것이다. 그날로 양장점을 그만두었다. 직접 송장을 다루지는 않았지만 송장에 대한 금기가 워낙 격렬하고 유구한 내 나라의 문화를 극복한다는 것은 내 능력 밖의 일이었다.
[공놀이하는 여자]
철거민들에게 열 평 미만의 땅을 나누어주고 그들을 쓰레기처럼 부려놓고 간 후에 생긴 동네. 아란이 최초로 장만한 다세대 연립은 그 동네 끄트머리에 자리 잡고 있다.
집을 지나쳐 조각공원 쪽으로 갔다. 마침 어린아이가 걷어찬 공이 아란의 앞으로 굴러왔다. 그 공은 그녀의 유년기로부터 굴러오는 듯 했다. 어린 시절 어린이날 선물로 문방구에서 고무공을 골랐고 싫증이 날 때까지 가지고 놀았다. 아이가 걷어찬 공은 조각공원의 존재의 아픔이라는 팻말 근처에서 갑자기 사라졌는데 조형물이 있었던 자리의 깊은 구멍에 공이 빠졌다. 가까스로 공을 끄집어냈는데 아이는 벌써 저 만치 멀어져 갔다. 모욕감을 느끼며 주인에게 버림받은 공을 그 구멍 속으로 되돌려 주었다. 일 년이 지난 후에도 공이 있을까 구멍 안에 팔을 밀어 넣으니 탄력을 잃고 더러워진 공이 만져졌다. 깨끗하게 씻어 잔디밭에 풀어주고 햇빛을 받아 다시 부풀어 오른 공을 굴리면서 자유를 느낀다.
진회장의 호적에 입적하기를 원하면서 엄마는 항상 재산이나 가문이 탐나서가 아니라 다만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받고 싶었노라고 한다. 아란은 이런 엄마의 잘난 척에 신물이 났다. 엄마가 죽고 호적에만 올랐다 뿐 남남이나 다름없었던 진씨가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온다. 만나는 장소는 회사가 아니라 아파트였는데 진회장이 운명한 곳이자 그의 마지막 재산인 아파트를 아란에게 상속하도록 하는 유언장을 공증까지 해 놓았다. 형제들은 모두 재산을 나누어 가졌는데 아란은 아파트 한 채 밖에 안 되지만 전부를 가진 것처럼 느낀다며 자식들은 일종의 배신감으로 받아들인다고 한다. 아들 정기는 아란이 이 아파트에서 사는 걸 누님이 보지 못하겠다고 하며 아파트를 아란으로부터 사겠다고 제안한다. 삼억오천에 아파트를 넘기고 수표다발을 어쩌지도 못하고 있던 중 정기에게서 돈의 안부를 묻는 전화가 온다. 곧 은행 지점장이 와서 수표를 인수해 간다. 돈을 가져가고 난 후 속은 것은 아닐까 전전긍긍하지만 염려하던 일은 생기지 않는다. 돈에 의해서 진씨집과 화해하게 된 것에 대해 문득 비애를 느낀다. 잡힐 듯 말 듯 모호하고도 생뚱스러운 비애를.
[J-1 비자]
이창구 선생이 김혜숙의 전화를 받으면서 23회 졸업식 때를 생각하게 된다. 반에서 수석을 배출했고 서울대학교에 합격했으니 거하게 한턱내야 한다고 성화에 못 이겨 구내식당에서 고기반찬을 더하는 정도로 할까 생각하다가 그래도 겹경사니까 조촐한 대중음식점에서 갈비로 하기로 했는데 교직원들은 모두 호텔 뷔페가 아닌 것에 이상해하는 눈치더니 한턱의 주체가 김혜숙의 부모가 아니라는 것에 모두 그를 바보취급했다.
LA에 유학 중인 김혜숙은 이창구의 소설 <삿갓재 마을>을 통해서 우리나라 식민지 시대를 분석하는 주제발표를 하게 되었고 원작자로서 이창구를 초대하자는 거였다.
영역본으로 헬렌 강의 번역본을 사용한다는데 울컥 화가 치밀었다. 번역을 하면서 미심쩍은 부분을 물어오면서 ‘서까래’나 ‘무리꾸럭’ 따위의 순우리말을 친절하게 대답해 주기란 참을성을 요하는 일이었지만 ‘정신대’가 뭐냐는 질문에는 드디어 말문이 막혔다. 영어 좀 한다고 우리말 모르는 것에 대해선 전혀 위축되지 않는 헬렌 강의 당돌한 태도보다도 더 한심한 것은 그걸 끝까지 참아낸 자신의 참을성이었다. 그 이전부터 해외문학세미나에 몇 번 참석하면서 그 모든 것이 가족이나 학교 동료들에게 그럴듯하게 보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미국으로 가기 위해 J-1 비자를 내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터라 절차가 까다로운 J-1 비자로 가야하는지 문의한 결과 학교의 방침이며 J-1 비자라야 대학에서 사례금과 제반비용을 부담할 수 있다는 답변을 받는다. 비자용 서류는 늦게 도착한다. 5월 26일이 학회 날짜인데 서류는 5월 19일 도착했고 비자발급은 일 주일이 더 걸려 학회 날짜를 6월 8일로 잡겠다고 했다. 그런데 서류상 학회 날짜가 26일로 되어 있어서 또 허탕을 쳤다. 마음을 홀가분하게 접고 있었는데 대학에서 대사관으로 학회날짜가 연기됐다는 사실을 알리겠다는 전갈이 왔다. 우여곡절 끝에 비자가 나왔고 대사관 정문으로 로버트를 직접 찾아가야하다는 전갈을 듣는다. 하지만 로버트는 비자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 여권만 가지고 와서 신청서를 내면 빠른 시일 안에 내주도록 노력하겠다고 한다.
결국 징징 울다시피 하는 김혜숙을 위로하며 발표요지와 예상 질문에 대한 답변들은 글로 만들어 보내면서 기죽지 말고 성공적으로 모임을 이끌기를 당부했다. 며칠 후 그는 이번 사태의 요지를 동아시아 연구모임 앞으로 보냈고 앞으로 이런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미대사관에 항의하도록 요구했다. 학회에서는 한국의 문화인사에 대한 무지를 드러낸 일이라며 항의서한을 보냈다.
[나의 웬수덩어리]
컴퓨터 바이러스로 인해 A4용지 삼십 장 분량의 원고가 사라졌다. 가장 쓰기가 힘든 처음의 반의 반이 날아가 버린 것이다. 반의 반이 완성되면 그 다음은 수월해진다. 그런데 처음 반의 반이 날아가 버려 장편 소설 한 편을 날려 버린 셈이 됐다. AS기사가 있는 자리에서 그 증상을 보여 주고자 하는데 두 줄에 한 번씩은 나타나던 증상이 한 페이지를 다 치도록 나타나지 않는다.
더딘 타자 실력을 보던 기사는 할머니에게 그 실력으로 채팅을 하느냐, 게임을 즐기느냐고 묻다가 할머니가 컴퓨터를 쓴 게 맞느냐고 거듭 묻는다. 젊은이에게 이 기계를 이용해 글을 쓰는 게 직업이라고 하지만, 젊은이는 그 타자 실력으로 얼마나 벌겠다구. 자식들에게 용돈 받아서 관광 다니시며 편안하게 살라고 한다. 얼떨결에 동의를 하고 말았는데, 청년은 난다 긴다 하는 타자수도 많은데 할머니한테까지 돌아올 일거리가 있다는 게 신기하다고 한다. 칠천 원짜리 청구서를 받으며 중얼거리는 말에 나도 신기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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