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목 / 박완서
이경은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망연자실한 상태로 생을 부여잡게 하는 건덕지라곤 아무것도 없는 부연 현실에 침전되어 있는 어머니와 함께 쓰러져가는 고가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경은 서울이 수복된 후 명동의 미군 PX 초상화부에서 일하면서 짧은 영어로 미군들을 상대로 초상화를 주문하도록 유혹하고 주문받은 일감을 환쟁이들에게 나눠주는 역할을 맡고 있다. 어느날 환쟁이 한 명이 더 들어오는데, 뭔가 우수에 젖어 있는 듯한 눈을 가진 진짜 화가인 옥희도 씨다.
피난 온 작은 아버지를 숨겨주기 위해 두 오빠가 숨어 있던 곳을 내어 주고 오빠들은 더 안전할 것 같은 행랑채 벽장으로 옮기게 되는데 그날 밤 폭격으로 두 오빠는 산산조각이 나 버린다. 자기 때문에 두 오빠가 폭격으로 죽었다는 죄의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암울한 집안 분위기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이경은 우수에 젖은 듯한 눈을 가진, 다른 환쟁이들과는 다른 진짜 화가인 옥희도에게 끌리게 된다. 둘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전쟁이 지루하게 이어지는 상황에서 살아가고 있다.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도무지 찾을 수 없는 환경에서 서로에게 위로를 받는다. 어쩌면 옥희도는 이경에게서 딸의 모습을 찾으려했고 이경은 옥희도에게서 아버지를 찾고자 했는지 모른다.
옥희도는 진짜 화가가 되고 싶어 했고 그림을 그리기 위해 초상화부를 며칠 쉬게 된다. 이경은 주급을 전달한다는 핑계로 PX에 나오지 않는 옥희도를 찾아 갔다가 웃방에 놓여 있는 캔버스에 고목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배웅을 나온 그의 부인에게 화가의 부인이 될 자격이 없다면서 질책하게 되고 둘은 심하게 다투게 된다. 삶의 기쁨을 발견할 수 없어서 저렇게 우울한 그림을 그리게 한 사람은 다름 아닌 옥희도의 곁에서 내조를 하는 부인의 영향일 수밖에 없다고.
두 사람은 매일 퇴근 후 침팬지가 술을 따라 마시는 장난감을 전시해 놓은 노점 완구점에서 만나게 되고 완구점과 명동 성당 사이를 거닐며 사랑을 확인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훗날 황태수와 옥희도와 이경이 만난 자리에서 이경은 옥희도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지만 서로 어울리지 않는 사이라고 하면서 옥희도는 떠난다. 물론 황태수도 떠나게 된다.
옥희도의 집에서 보았던 고목밖엔 아무것도 없는 황량했던 그림은 화가 박수근의 <나무와 두 여인>으로 완성된다. 박완서의 다른 작품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에서 미8군 피엑스에서 만난 화가 박수근에 대해서 먼 훗날 대한민국 최고의 화가가 될 줄 어떻게 알았을까하는 독백을 읽을 수 있다. 어쩌면 두 작품은 쌍둥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산>에서는 살아있는 어머니와 화해하게 되지만 이 작품에서는 어머니가 죽은 다음 화해하게 된다.
PX의 전공(電工)으로 일하던 황태수는 이경이 남자로 생각하던 사람은 아니었으나 어머니를 잃고 옥희도 씨도 이경을 떠나게 되면서 현실을 일깨워주는 황태수에게 다가가게 된다. 옥희도와 헤어진 후 빈대떡집에서 우연히 술에 취해 있는 황태수를 만나게 되고 황태수와 막걸리를 나눠 마시면서 이경은 황태수에게 손을 내어준다. 으스러지도록 잡아보라고. 이경에게서 아픔을 느끼고 참아 내는 것은 현실로 돌아오는 보이지 않는 문일 것이다. 둘은 이경의 고택으로 함께 가게 된다.
세월이 지나 부부는 중년이 되었고, 이경은 우연히 故옥희도 유작전이라는 신문기사를 보게 된다. 이름 앞에 故가 붙어 있는 것이 왠지 낯설다. 옥희도의 유작전에 가서 지난날 옥희도가 그리고 있었던 그림이 고목이 아니라 삶의 희망을 표현하고 있는 나목이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다. 위스키를 마시는 침팬지를 구경하면서 눈물이 나도록 웃게 되지만 태엽이 풀리면서 서서히 움직임을 멈추는 침팬지는 나목과는 반대 입장이다. 침팬지를 통해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처절했던 전쟁 상황에서 제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스스로 무너져 버리는 젊은이들의 실상을 고발하는 듯하다. 반면에 나목은 가을이 되면 잎을 떨구어내지만 찬란한 봄을 기다리며 희망을 잃지 않는 믿음이 깔려있다.
전쟁의 상처는 언제까지나 남아 있겠지만 그 상처로 인하여 스스로 몰락의 길을 걸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상흔은 오로지 상흔으로 남겠지만 봄이 되면 무수한 잎으로 가려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에서 완전히 지울 수는 없어서 침팬지처럼 위스키를 마시고 고주망태가 되어 태엽이 다 풀렸을 때 대책 없이 주저앉아버리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이경이 그렇게 침팬지 앞에서 서성였던 것은 희망을 잃지 않는 나목으로써 다시 태어날 것을 암시해 주는 작가의 의도인 듯하다, 어쩌면 눈앞에서 지워버리지 못하는 상흔 때문에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지 말라는 의미일 것이다. 어머니의 어느 것도 보는 것 같지 않는 부연 눈과 문득 문득 현실로 돌아오게 만드는 황태수의 말은 대비를 이룬다. 황태수는 이경을 현실로 돌아오게 만드는 장치로서의 역할을 한다. 허상을 안고 살아가던 이경의 눈에 보였던 고목은 현실로 돌아온 이경의 눈에 비로소 나목으로 보이게 된다.
“김장철 소스리 바람에 떠는 나목, 이제 막 마지막 낙엽을 끝낸 김장철 나목이기에 봄은 아직 멀건만 그의 수심엔 봄에의 향기가 애닯도록 절실하다.
그러나 보채지 않고 늠름하게, 여러 가지들이 빈틈없이 완전한 조화를 이룬 채 서 있는 나목, 그 옆을 지나는 춥디추운 김장철 여인들.
여인들의 눈앞엔 겨울이 있고, 나목에겐 아직 멀지만 봄에의 믿음이 있다.
봄에의 믿음. 나목을 저리도 의연하게 함이 바로 봄에의 믿음이리라.
나는 홀연히 옥희도 씨가 바로 저 나목이었음을 안다. 그가 불우했던 시절, 온 민족이 암담했던 시절, 그 시절을 그는 바로 저 김장철의 나목처럼 살았음을 나는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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