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탐방은 세 번째다. 겨울산행은 처음이다. 며칠동안의 푸근한 봄바람을 만끽하면서 산을 찾았는데 예상을 뒤엎고 산은 눈으로 뒤덮혀 있었다. 산길의 초입에는 눈도 물도 얼음도 없었고 그야말로 평온한 길로서 사람들을 맞았다. 소원성취탑이 보이고 백운교가 보이고 소나무들은 푸르름을 잃지 않고 건강한 모습으로 산 속에서 삶을 버티고 있었다. 버틴다기보다는 오히려 그들만의 삶을 지탱해나가고 있었다.
황량한 계곡에는 물소리도 바람소리도 들리지 않고 잔잔한 겨울, 초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긴장한 듯했다.
얼마를 걸어가니 얼음길이 나타났다. 길은 눈을 밟고 지나간 사람들의 발길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얼음길이 되었고, 늦게 출발한 내 앞에는 사람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바위들은 잔설을 머리에 이고 보이지 않았던 물도 보인다. 얼음 사이로 졸졸 소리를 내며 흐르는 물은 계곡의 하류에서는 어디에 숨어 있는 것일까.
위로 올라갈수록 계곡은 물의 자취를 드러내 준다. 이윽고 물소리는 귓전에 울리고 물소리가 끊기는 사이사이에 새소리가 끼어든다. 새들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는데 물소리가 변형된 소리였을까. 푸드득거리는 소리에 물소리의 변형은 아닐 것같고, 정녕 새는 겨울을 넘기며 산속에서 물소리와 눈과 바람을 견디며 살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점점 눈이 많아져 간다. 푸근한 날씨 때문에 아이젠을 가져오지 않아 내심 불안한 마음이 밀려 나온다. 미끄러운 길때문인지 다리가 받는 힘은 거의 두 배를 육박한다. 다리 근육이 긴장되는 것을 느낀다.
얼마를 지나니 어느 여자분이 말한다. 아이젠 없으면 못갈것이라고. 기왕에 출발한 산행을 포기할 수는 없다. 한발한발 내딛는 걸음이 모여 언젠가는 어디든지 도착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으로 계속 발걸음을 옮긴다. 나무계단이 나타나 안도한다. 나무계단에는 눈이 없다. 저 멀리 사람의 모습도 보이고 그 사람의 발에도 아이젠이 없다. 갈 수 있는 길인 모양이다.
여름에 왔을 때 계곡을 넘쳐 흐르던 물은 꽁꽁 얼어붙어 절벽을 이룬다.
어떻게 이렇게 얼 수 았단 말인가. 물이 흐르는 그 모습대로 일순간 얼어버린 듯.
서성재를 지나 한 고개를 올라서니 눈으로 뒤덮힌 먼 산을 볼 수 있었다. 사방에 눈으로 덮힌 산을 본다. 아득하고 정겹다. 국립공원이라 대놓고 담배를 피울 수 없어 감상을 하기엔 역부족이다. 저 산을 보면서 담배연기를 깊게 들이마실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침만 삼키고 돌아선다. 점점 가팔라지는 산에 눈은 점점 더 많아진다.
정상에 가까워지니 눈은 푸근하게 다가오나. 밟지 않은 눈은 내린 그대로 있었고 눈 사이로 걷는 기분은 아무런 말도 필요없었다. 이대로 계속 걸어서, 언제까지나 끝나지 않는 길을 걸어서 가고 싶은 마음이다.
길이 미끄러워 일순간 180도 뒤집어지면서 굴러 떨어졌다. 하늘이 노랗다. 정신을 차리고 일어서니 뒤에서 사람이 다가온다. 그도 미끄러진 모양이다.
상왕봉에 도착. 엉금엉금 기어서 도착한 상왕봉은 새하얀 눈을 뒤덮어 쓰고 있었는데. 어렴풋이 저 멀리 천왕봉인듯한 봉우리가 보인다. 아니면 그만이고. 땀이 식으면서 추위가 밀려든다.
이런 신발로는 도저히 내려가지 못할 것만 같다. 눈길을 오르는 것은 그나마 쉽지만 내려가는 길은 도무지 생각할 수 없다. 운명에 맡기는 수밖에. 어떻게든 내려가기는 갈 것이기에 내려가는 경로는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만물상 경치를 보면서 내려온다. 예상외로 눈은 적다. 계곡보다 훨씬 눈이 적어서 내려오는 길은 평온했다. 갖가지 표정으로 서 있는 바위들을 보면서 발걸음은 가볍다.
겨울에만 볼 수 있는 이 풍경들이 언제까지 남아있을까. 여름에는 망각해버리고 다시 짙은 안개와 더불어 망각의 세월을 보내겠지
부처의 형상을 한 바위, 괴로운 듯 구부리고 있는 모습이 처량하다.
백운동 주차장까지 2KM. 싸늘한 기운이 감돈다. 땀이 식고 열도 식고. 옷깃을 여미며 터벅터벅 길을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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