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 기
시가 무엇이지 생각하고 싶었다. 아니 시를 쓰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싶었다. 다른 사람의 생을 들여다보고 그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수채화를 그리듯 그려 나가는 것일까. 어쩌면 그들의 생을 핑계 삼아 나의 이야기를 써나가는 것일까. 나무에 잎이 나고 열매를 맺고 잎이 떨어지고 열매가 떨어지고 나목으로 살아가는 겨울을 지나 다시 찬란한 햇빛을 보며 새순을 틔우는 과정을 보면서 우리네 인생을 생각해보는 것일까.
어쩌면 허무할 수도 있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정확하게 관찰하여 정확한 언어로 기록하고 싶은 욕망, 하지만 번번이 그 앞에서 좌절하는 경험을 가진 많은 시인들은 시를 포기할 것도 같은데, 포기하지 않는다. 이유는 단 하나, 시인이기 때문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어떤 상황에 직면했을 때 왜 그 상황이 되었는지 그 상황에 도달하기까지 어떤 몸짓이 있었는지를 종합적으로 판단하기 위해서 다양한 방법으로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일반인들과 전혀 다른 생각을 하면서 많은 생각을 몇 줄의 문장에 담아내려다 보니 전혀 엉뚱한 이야기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느새 독자들에게 다가가기 힘든 사차원적인 글을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일상에서 매일 만나는 인물이나 풍경으로는 내면에 잠재해 있는 시를 끌어내기가 수월하지 않다. 시는 나오고 싶어 속에서 들끓고 있는데 그것을 끌어낼 도구가 없다. 그럴 때는 빈 가방을 둘러매고 길을 나서야 한다. 자연이 주는 공기로 호흡하면서 오직 자연만이 전해주는 느낌을 받으며 자연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그것을 글로 옮길 수만 있다면 더는 시를 쓸 필요가 없겠지만, 신을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세상에 시인이 많기를 바라는 신은 결코 시인의 마음에 드는 시를 시인에게 안겨주지 않는다. 그래서 시인은 죽을 때까지 시를 계속 쓰고 있는 것이다.
타인의 고통에 직면할 때 시인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법은 도덕의 최소한이라고 한다. 이 사회는 도덕이 무너지고 만 것인지. 아니면 도덕의 판단 기준이 사람마다 달라서 진정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도덕이라고 하는 것을 규정할 수 없는 것인지. 사람으로서 마땅히 취해야 할 도리는 각 개인마다 달라야 하는 것인지. 생각할수록 점점 답을 찾아내기가 불가능해 진다.
하지만 그들의 고통을 다양한 방법으로 생각해보는 것은 가능하다. 시라는 제목으로 다양한 생각을 하면서 여백을 채워나가는 일은 실로 흥미롭다. 시에서 자주 등장하는 “당신”은 오로지 “시”일수도 있고, 친구일수도 있고 언제까지나 말없이 곁에서 지켜주는 아내일수도 있다. 살아온 나날들을 그들의 이름으로 또는 나의 이름으로 생각해보는 것이다.
아내가 며칠 집을 비운 사이
냉동실을 차지하고 있던 것들을
모두 꺼내 쓰레기통에 버렸다
앞으로 당분간은
냉동실 문을 열다가 떨어진 정체불명의 봉지에
발을 찧는 일은 없을 것이다
상하지 않도록 음식물을 보관하는 냉동실은 내 속에 가득차서 가슴을 답답하게 하는, 어쩌면 쓰지도 않을 것이지만 버리지 못하는 낱말들일 것이다. 시에서 쓸모없는 조사를 버리고 행을 버리고나면 제대로 된 시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작업을 대리석 속에 잠자고 있는 천사를 깨워서 자유롭게 해 주는 것이라고 했다. 그만큼 정성을 들여 작업에 몰두하라는 말일 것이다. 천사를 깨우고 있다고 생각하면 천사가, 부처를 깨우고 싶다고 생각하면 부처가 깨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리석을 덜 쪼아 내거나 너무 많이 쪼아서 원하는 모습을 찾아 내지 못하고 있다. 이미 있는 언어를 얼마나 정성 들여 잘 맞게 정리하느냐에 따라 읽는 사람의 마음에 들어갈 수 있는 확률은 높아질 것이다.
내 이름을 지우고
너의 이름을 지우고
시의 이름으로만 생각하는 밤
그 속에서 나는
시간을 데리고 여행을 한다
멈췄던 시간이 흐른다
길을 걷는 이유도 모르고 길을 걷고 있을 때가 있다. 지나온 길은 기억에 없고 나아갈 길은 기약도 없다. 지난밤 내가 걸었던 길이 다음날 없어져 깜짝 놀라는 일이 많아지고 허둥지둥 남들이 가는 길을 덩달아 걷다가 다시 돌아오는 일도 많아졌다. 한 번 쌓아 둔 날은 다시 들추지 않아 차곡차곡 쌓아 둔 날들에서 곰팡내가 나는데 돌아보지 않는 날들을 얼마나 더 쌓아야 할까. 비 오는 날 영문도 모른 채 따라나선 그림자는 주인을 잃어버렸다. 그림자를 따돌릴 수 있는 방법은 비 오는 날 나서기 싫어하는 그림자를 데리고 문을 나서는 것이다. 제각각 길을 가다가 마침내 황혼에 섰을 때 더 갈 곳도 없는 지친 그림자는 길바닥에 길게 드러누워 일어설 줄 모른다. 모두 비울 때까지 긴 휴식이 필요하다.
술에 취해
털썩 주저앉아 일기장을 꺼냈을 때
눈물겹지 않을 만큼만 쳐다보는 것이다
시를 쓰는 일이란
살아가면서 기억해야할 일들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되새겨보는 것이다
살아가는 일이 버릇처럼 반복되더라도 그냥 아름답다고 느끼고 싶은 일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살아온 길이다. 나만의 비밀번호로 잠가 둔 눈물과 외로움과 괴로워했던 날들이 기록된 일기장을 들춰보는 일은 부끄럽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술에 취해서 쓴 글은 술에 취해야만 이해할 수 있다. 어쩌면 불행했던 날들도 기억의 어느 곳에서는 사진의 한 장면처럼 웃고 있었으면 좋겠다고, 살아가는 일이 버릇처럼 반복되더라도 그냥 아름답다고 느끼고 싶은 것이다.
큰 행복은 없더라도
하루에도 몇 번씩
작은 행복을 만들어내는 것
나를 안아주는 시간
가까이 있는 행복을 발견하지 못해 먼 곳까지 가서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요즈음 유행하는 “소확행”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다. 가까운 곳에서 행복을 찾자는 이야기다. 시를 쓰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 시를 써서 시집으로 묶어 내는 일이 애먼 나무만 죽이는 일이 될지도 모르겠다. 내가 살아온 날들이 나를 안아주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고 누군가의 상처를 보듬어주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희망사항이 될 가능성이 많겠지만 그래도 시를 쓰는 사람들은 시 쓰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고, 시 쓰기는 현재 진행형이 될 수밖에 없다.
다시 만나는 날에도
언제나 새로운 얼굴
말이 없어도 어색하지 않은
너와 내가 마주앉아 술병을 바라보며
한겨울 눈 내리는 날의 풍경화가 되는
긴 여행을 다녀온 것처럼
문득 집이 낯설어 질 때가 있다
내 얼굴이 집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고
책상에 앉아서도
처음 앉아보는 것처럼 어색하기까지 하다
말만 들어도 눈물 나는 글자 그것은 또 <집>이다. 다시 돌아온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집>이라는 글자. 그 한 글자 속에는 평생 이야기해도 모자랄 이야기가 들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집으로 돌아온다.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이 없다면 집은 아마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집은 목적지가 아니라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선물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잠시 쉬었다가 다시 길을 나선다. 그 나섦은 곧, 집으로 돌아오기 위한 것이다.
시를 쓰면서 스스로 한 폭의 풍경화가 되기도 하고 매일 돌아오는 집이 낯설게 느껴질 때도 있다. 시를 쓰는 사람으로 소원이 있다면, 비 갠 하늘에 한줄기 무지개를 그려서 산 너머 그리운 사람에게 전할 수 있는 시인이고 싶다. 매일 잠이 들지만 아침이면 다시 일어날 것을 믿으면서 힘을 얻는 곳.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인생의 충전소가 “시”였으면 좋겠다.
시인
사람은 사람인데
사람도 아니고
참 기찬 그
떠오르지 않는 시상 잡으려
책상 앞에 우두커니
한 글자도 쓰지 못하고
하루를 마감하는 사람
머리에 열을 올리고
글자의 앞뒤를 조절하는 동안
혼자서 눈물도 흘리고
쓸쓸해지기도 하는
가을 같은 사람
글자만으로
사람의 어깨를 쓰다듬을 수 있지만
사람을 만나서는
쑥스러워 고개도 들지 못하는 사람
참, 인간적이지 못한 사람
사람은 사람인데 사람도 아니고
참 기찬 그
2018. 11.
김양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