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86
다 버리고나면 뭐가 남지
버리지 못했던 날들이
발목을 부여잡고 있다
언젠가 모두 버려야 할 것들
덕지덕지 붙은 집착 덩어리
그래
사랑이라고 했지
먼지 쌓인 책과
쓰다 만 시 몇 편
강박적으로 모은 숫자들
빠진 숫자를 찾기 위해
헤매고 다녔던 일을
사랑이라고 생각했지
지난 일은 고쳐질 수 없고
다가올 일은 알 수 없는 일
현재를 사랑하는 일보다
더 사랑스런 일은 없는데
과거를 등에 지고
미래의 꼬리를 부여잡고 있었다
내가 없는 세상에서
나는 있는 것일까 없는 것일까
버리는 일이 살아가는 일이다
더러운 생각이 묻은 침도 뱉어 버리고
희망도 버리고나면
마음이 편안해질까
하루하루 세상을 견디는 일이 희망이다
희망을 버리는 일이 희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