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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함양 화림동 계곡 농월정을 찾아서

by 1004들꽃 2015. 8. 26.

함양 화림동 계곡 농월정을 찾아서

 

 

경상남도에서 살아가면서 경남의 서부지역에 있는 명소로 거창의 수승대나 함양의 농월정을 떠올리곤 했었다. “그렇겠지라는 말로 위안을 삼으며 한 번도 찾아보지 못했던 곳이다. 찾아보는 것과 찾지 않는 것의 차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그 어디에도 없으리라. 어쨌든 화림동 계곡을 찾아 나섰고 화림동 계곡을 가장 효율적으로 볼 수 있으려면 어떤 방향으로 걷는 것이 좋으냐에 대하여 함양군 문화관광해설사의 추천을 받아 거연정에서 농월정까지의 여정을 찾아 나섰다.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관광과 여행을 구분하라는 모호한 이야기에 대해서도 별로 신뢰성이 가지 않는다. 구분의 틀도 없을 뿐 아니라 개인의 주관에 의해 관광과 여행은 구별되기 때문이다. 이제 여행과 관광을 구태여 구별하지도 않을 것이며 여행을 한다든가 관광을 한다든지의 말장난에 얽매이지 않고 그저 살고 있는 현재의 장소를 떠나 낯선 곳으로 나의 발걸음을 옮겨서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던, 보고 싶었던, 생각하고 싶었던 시간을 가져보는 것으로 정리해야겠다. 말장난에 의해 그동안 피해를 본 것이 얼마인지 가늠할 수도 없지만 어쨌든 그 모든 언어적 유희에도 불구하고 산과 들을 찾아 헤맸던 많은 날들이 현재를 위로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거연정은 말 그대로 자연 속에서 함께 자연이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그 옛날 처음으로 거연정으로 이름 지을 때 생각했던 것과 다를지 모르지만 현재 자연 속에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유지한 채 들어선 정자의 모습을 보면 자연의 일부로 보이기도 하고, 어느 부잣집 마당의 연못 위에 지은 고요한 정자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정자를 지은 목적이 어떠하든 현재 눈앞에 펼쳐진 거연정의 풍경은 아득한 옛날의 학동들을 가르치는 선비의 유유자적하는 모습을 대하는 듯하다. 계곡의 중앙에 우뚝 솟은 바위 위에 걸터앉은 거연정의 모습을 보노라면 자연을 생각한 옛 선비의 마음을 존경할 만하다. 요즈음 건축물을 보면 대부분 기초를 한답시고 평평하게 깎아버리는 것이 대수인데 거연정은 그와 반대다. 바위를 있는 그대로 두고 정자를 받치는 기둥을 바위의 높낮이와 맞추었고 기둥의 밑면을 바위의 형태에 맞추어 울퉁불퉁하게 깎았다. 그래서 계곡의 중앙에 우뚝 솟은 바위는 그 형태를 조금도 손상하지 않고 정자는 바위의 일부가 되었고 바위 또한 정자의 일부가 되었다. 거연정으로 접어드는 다리를 돌다리로 설치했다면 더욱 운치가 있었을 텐데 하는 마음을 가졌지만 그러지 못했던 여건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로와 거연정을 이어주는 다리는 과거와 현재를 잇는 상징으로서 존재한다고 보아도 좋을 것 같다. 다리가 없어도 어떻게든 거연정 정자를 들락거릴 것이지만 다리를 놓아 차라리 많은 사람들에게 공개하는 것 또한 각자의 아끼는 마음을 더하여 옛 정취를 보존하는데 일조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거연정을 검색해 보면 정부 공식 지정 명칭으로 문화재 지정 당시의 건물주 이름인 '함양 정병옥 가옥'으로 나와 있다. 또한 하동 정씨 대종가, 정여창 고택, 일두고택, 정병옥 가옥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린다. 함양은 선비와 문인의 고장으로 이름나 있으며 대표적인 인물이 일두 정여창이다. 조선조 5현이자 동국 18현으로 성균관을 비롯한 전국 234개 향교, 9개의 서원에서 모시는 성리학의 대가다.

  

 

거연정에서 조금 옆으로 가면 군자정이 있다. 이 또한 바위 위에 지은 정자로 바위를 거스르지 않고 정자를 받치고 있는 기둥을 조절하여 정자를 앉혔다. 함양에는 조선시대 5(조선유학을 대표하는 정여창,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이황) 중 한 분인 일두 정여창 고택이 있다. 그 일두 정여창 선생이 시를 읊으며 유유자적했던 곳을 기념하기 위해 그 후손이 이곳에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지금은 각 읍·면의 마을마다 정자 한두 개는 있는 형편이다. 마을 주민들의 건의에 의해 마을 놀이터의 일종으로 지어주고 있고 그 정자는 그 마을의 노인들이 차지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런 정자와 그 옛날 양반들의 전유물로서의 정자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누구든지 나만의 정자 하나 쯤 가지고 싶은 욕망은 가지고 있으리라.


그 옛날 임금과 사상이 맞지 않아 유배를 보낸다고 했지만 이러한 풍광을 안고 평생을 산다한들 후회가 있겠나 싶은 생각이다. 더 큰 포부가 있어서 임금의 옆에서 정책을 논해야겠다고 생각한다면 이런 곳은 전혀 맞지 않겠지만 세상을 떠난 선비가 자연과 함께 자연에서 자연을 좋아하도록 후학을 양성한다면 그 또한 좋지 않았을까. 요즈음같이 무자비한 폭력이 어느 한 정세를 뒤흔드는 형편이라면 굳이 그 자리에 남아 있을 이유가 있을까 생각하지만 떠나지 못하는 안타까움만 마음 깊숙한 곳에 숨겨둘 뿐이다. 그래서 밥벌이의 지겨움을 지독하게 느끼는 것인지 모른다.


손잡는다는 것. 손잡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손을 잡지 않으면 어차피 그 옛날의 유배생활과 같은 처지가 된다면, 어쩌면 마음 깊숙한 곳에 감춰둔 마음은 그 유배 생활을 갈망할지도 모르겠다. 정자에서 유유자적하는 양반들을 생각해 볼 때, 뼈 빠지게 농사짓는 농민들에 비하면 신선노름을 했을 것인데, 그들을 비판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그들도 그들 나름의 고민이 있었으리라. 어떻게든 그들의 유유자적의 흔적 때문에 지금 세대들은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불공평한 세상이었던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거연정과 군자정을 돌아서 계곡을 따라 잠시 내려가면 영귀정을 만날 수 있다. 영귀정은 요즈음 동네마다 세워진 정자와 같은 종류의 정자다. 최근 들어 새로 만든 모양이다. 영귀정은 개인 재산이기 때문에 들어오지 말라는 경고판이 붙어 있다. 화림동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소리와 함께 스스로 자연이 되었음직한 곳이란 생각이 들지만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어떻게 계곡 옆에 이러한 정자를 개인이 소유할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현재 개인 소유라고 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일 년이 지나도록 물이 흐르지 않는 말뿐인 구거도 국가 재산인데 이렇게 넓은 면적이 개인 소유라니. 자꾸 뒤돌아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


영귀정을 지나면 동호정을 만난다. 길옆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계곡의 건너편에 있다. 능히 태양을 가릴 수 있을 규모의 큰 바위라고 하여 차일암이라고 이름 붙인 너럭바위 너머로 동호정이 보인다. 화림동 계곡의 대표적인 정자로 거연정, 군자정, 동호정, 농월정을 들 수 있는데 동호정은 동호 장만리 선생의 후손들이 그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1890년에 세웠다. 동호 선생은 임진왜란 때 선조가 의주로 몽진하였을 때 임금을 등에 업고 수십 리를 재촉하여 피신하였는데 그 충성을 기려 호성공신에 올랐다고 한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 이곳에서 낚시를 즐겼다고 한다. 마흔이나 되는 임금을 등에 업고 피난길에 오른 사람. 전해져 내려오는 일들이 진정 사실이라면 업는 사람과 업히는 사람의 모습이 참으로 가관이었겠다. 역사는 어차피 가진 자들이 쓴 역사이겠지만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얼마나 많은가. 오로지 나라를 구하겠다는 마음 하나로 일어나 목숨을 바친 수많은 무명의 의병들의 흔적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마흔의 임금이 업혀가는 동안 왜놈과 맞서다 떨어져 나간 목숨은 얼마나 많았을까.


동호정을 지나 호성마을을 지나면 경모정과 람천정을 만난다. 넓디넓은 계곡의 풍경이 좋다. 비가 온 뒤라 그런지 수량이 풍부하고 쉼 없이 흐르는 물소리도 흥겹게 들린다. 정자의 유래나 형태에 관계없이 그저 자연과 어울릴 수 있는 풍경으로서 보았으면 좋겠다. 커다란 너럭바위와 굴러 내려오다 물 한가운데 서 버린 바위와 잠시 쉬었다 다시 굴러 가려는 바위들을 보면서 자연과 하나가 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람천정에서 계곡으로 내려가면 넓은 바위와 어울리는 물결을 만날 수 있다. 물과 바위가 조화롭게 흘러가는 중간중간에 시멘트 포장이 되어 있었고, 계곡의 이곳과 저곳을 연결하는 다리도 시멘트 다리였다.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계곡의 이쪽과 저쪽을 연결하는 구름다리를 놓았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았다. 람천정을 뒤에 두고 계곡을 지나 얼마간 걸어가면 자동차 도로를 만난다. 왼쪽 편을 보면 황암사(경남 함양군 서하면 황산리)가 보인다. 황석산성 순국선열을 모신 사당이다. 정유재란 때 황석산성에서 왜군과 싸우다 돌아가신 3,500분의 위패를 모셔놓은 곳이다. 멀리서 쳐다보고 가 보지는 못했다. 동호정과 황암사를 생각해보면 뭔가 이상한 생각이 든다.


곧장 농월정으로 향했다. 농월정으로 가면 지금까지 보았던 계곡 풍경의 절정을 맛볼 수 있다. 농월정은 함양 정자의 진수라고 이름나 있었지만 2003년 화재로 소실돼 안타까움을 주었다. 12년 만에 복원되었는데 물레방아축제기간(2015. 9. 17 ~ 20)18일 오전 농월정 복원 준공식을 한다고 한다. 아직은 나무의 노란 속살이 정자의 전체를 이루고 있어 낯설게 느껴진다. 세월이 지나 세월의 더께가 붙어야 할 모양이다.


화림동 계곡을 뒤에 두고 동방오현 중 한 분인 일두 정여창 선생 고택이 있는 함양군 지곡면 개평마을로 향했다. 일두는 한 마리 좀처럼 미약한 존재라는 의미로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낮춰서 부른 말이다. 일두고택에 들어서기 전 솟을 대문을 올려다보면 효자 정려패 네 개, 충신 정려패가 한 개 걸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일두고택은 드라마 토지, 다모 등을 촬영한 장소이기도 하다. 고택의 사랑채, 안채, 행랑채 등 일반인에게 개방하고 있었고 민박을 할 수 있도록 이부자리도 준비되어 있었다. 아담한 방의 구조가 옛 정취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고택의 마당에는 산을 들여와 정원을 꾸몄다. 석가산石假山이라고 한다. 석가산을 뒤덮고 있으면서 고택의 지붕과 조화를 이루며 어울려있는 소나무가 멋진 자태를 뽐내고 있다. 집 안에서도 산 속을 거닐겠다는 의지의 표현인가. 아니면 산을 집으로 들여와 산과 함께 스스로 자연이 되겠다는 것인가. 현대를 살아가는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엄두도 내지 못할 대지의 면적과 안채, 사랑채, 행랑채 등 건축물과 마당에 들여 온 석가산 등을 생각해보면 그 시대 양반가의 생활을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한 마리 좀처럼 미약한 존재라고 스스로를 낮춰 부른 그였지만 고택의 규모로 볼 때 오히려 사치스러움을 느끼게 되고 미약한 존재가 이러하다면 그렇지 않은 존재는 과연 어떠했을까를 생각해보면 나의 생각의 끝은 도대체 어디까지 가야할 것인지를 가늠할 수 없는 것이다.


일두고택을 둘러 나오는 길에 고택 형식으로 웅장하게 지은 건물 앞에 섰다. 면사무소와 보건지소였다. 면사무소와 보건지소를 일두고택에 어울리도록 건축했다. 건축의 형태 또한 관광 상품이 되는 시대다. 어쨌든 시대를 살아가면서 그 시대를 뛰어 넘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민주주의라는 제도를 택하여 살아가고 있는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과 그 옛날 제도와 풍습에 따라 살았던 사람들의 생각은 다를 것이다. 그 차이는 극복되지 않을 것이고 우리는 이 땅에 전해 내려오는 사상과 풍습, 그리고 건축양식들을 그저 바라볼 뿐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취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받아들이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어쩌면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지난 날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으로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최근 들어 고택이나 종택, 서원 등 옛 건축 양식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고 있다. 하지만 건축 양식의 이면에 숨어 있는 기득권자들의 특권이 아닐까하는 의구심은 건축물을 있는 그대로 보기 힘들게 만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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