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늦잠을 자고 일어나 생각 없이 멍하니 있다 보면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라도 어디론가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느 정도 운전을 하는 여유와 즐김을 누리기 위해서라면 대략 30분에서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이 적당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합천 황매산 모산재. 시간이 하락하면 모산재에서 곧장 황매산으로 향할 수 있고 여의치 않으면 공룡능선으로 향하면 된다. 체력이 문제는 아닌 것 같고 진정한 문제는 가고자 하는 욕구다. 황매봉까지의 여정은 아주 까다롭다. 멀리서보면 그렇게 멀지도 않은 것 같고 어쩌면 손에 잡힐 것 같기도 한데 걸어보면 참으로 멀다. 끝없이 걷는 것 같고 닿을 수 있는 시간은 도대체 언제쯤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혼자서 걷는 길이어서 쉬는 시간이 없어서 일까. 빨리 돌아와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서일까. 어쨌든 혼자서 걷는 산길은 항상 힘들다.
현충일이지만 토요일이어서 노는 날이라는 의미는 희석되었고 실로 오랜만에 산을 찾았다. 그동안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매일 새벽에 일어나 걷다 뛰다를 반복하며 거의 한 시간 정도를 돌아다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일을 약 두 달 가까이 했다. 집안 행사나 근무 때문인 것도 있었지만 아침에 돌아다니는 것으로 한 주의 운동을 마무리하는 것으로 생각해 버린 모양이다. 여전히 새벽에 일어나 돌아다니다 집으로 돌아와 깜박 잠이 들었고 이러다 하루 종일 잠을 자겠구나하는 생각에 무거운 눈꺼풀을 데리고 산을 찾았다. 다시 모산재다.
유월은 푸른 하늘과 녹음이 어울려 가장 보기 좋은 계절이다. 간간이 구름도 끼어 시원함도 느낄 수 있었고 산길을 다니기에는 더없이 좋은 날씨였다. 이런 날 혼자서 뚜벅뚜벅 산길을 걸어가노라면 흥얼흥얼 콧노래도 새어 나온다. 잠에 취해 정신이 없었던 시간은 온데간데없고 온 산에 펼쳐진 초록이 온 몸으로 스며든다. 알맞게 낀 구름 때문에 시원할 듯 했지만 계절이 계절인 만큼 걷는 시간에 비례하여 땀은 흐르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잠시 멈춘 틈을 타서 땀은 모자의 창을 따라 흘러 산길을 적신다. 풍경과 풍경이 겹쳐 진풍경을 만드는데 한가롭게 떠도는 구름이 나그네의 발길을 잡는다. 푸른색이 옅어지면서 보라색으로 멀어지며 하늘색을 닮아가는 산들을 보며 잠시 땀을 식힌다.
집에서 10시 정도 출발하면 모산재 주차장에 11시 정도 도착하게 되고 그때부터 걷기 시작하면 사람들이 많이 보이지 않는다. 늦은 만큼 느림을 즐기면 된다. 위쪽에서 사람들의 소리가 들리지만 상관하지 않는다. 그 시간에는 나보다 늦게 출발하여 올라오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에 홀로인 시간을 즐길 수 있다. 혼자서 사진을 찍고 혼자서 물을 마시며 혼자서 풍경을 만들며 허공에 글을 써 본다. 잠시 숨을 돌리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면 돛대바위에 도착한다. 돛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바다를 종횡무진 가로질러 다니는 바다짐승으로 보이기도 한다. 산을 세세하게 쳐다보면 많은 작품들을 볼 수 있다. 수많은 분재는 아무도 손대지 않았지만 스스로 컸고 휘어졌고 뿌리를 드러냈다. 사람의 손으로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 그 모습은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집으로 들고 갈 수 없는 수석들은 전설 속의 짐승의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간다. 먼 곳에서부터 자기를 찾아달라고 울부짖는 모습도 있고 가까이에서 몸을 기댈 수 있는 자리를 내어주는 푸근함도 있다.
돛대바위를 지나면 모산재까지는 잠시다. 해발 767m. 모산재 표지석에서 북서쪽을 바라보면 저 멀리 황매봉이 보인다. 언젠가 시간을 내어 황매봉까지 걷게 될 날을 기대해 본다. 사계절 산의 모양은 달라서 산에 오르면 항상 새롭다. 모산재를 자주 찾는 이유는 집에서 가깝기 때문이다. 단 시간에 오를 수 있고 바위를 타고 걷는 길이 좋다. 주변 풍광이 좋고 급할 때 빨리 집에 도착할 수 있다. 아는 사람을 만나기 쉽지 않고 따라서 산에서 술을 많이 마시지 않아도 좋다. 맨정신으로 오랜 시간동안 있을 수 있어서 좋다.
모산재 표지석을 뒤로 하고 공룡능선으로 접어든다. 기이한 바위의 형상을 만날 수 있다. 그야말로 드러누워 있는 공룡을 만날 수 있고 슈렉을 만날 수도 있고 아기자기한 수석들을 만날 수 있다. 공룡능선이 끝날 즈음 순결바위를 만날 수 있다. 두 조각으로 갈라진 틈새에 순결하지 못한 사람이 들어가면 바위가 오므라들어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전설이 있단다. 순결바위를 지나 곧장 내리막을 걷다보면 국사당이 보인다. 국사당은 태조 이성계의 등극을 위하여 천지신명께 기도를 올렸다는 곳으로 지방관찰사로 하여금 매년 제사토록 하였고, 이후 고을 현감, 관내 면장으로 이어져 왔으며 지금도 음력 3월 3일에는 인근 감안주민이 제사를 올려 나라와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고 있단다. 국사당 앞에는 여의주를 물고 하늘로 올라가는 형상을 한 웅장한 소나무가 국사당을 지키고 있다. 산을 내려오면 영암사에 닿는다.
영암사터에는 삼층석탑 뒤로 금당으로 보이는 절터를 볼 수 있고 그 앞에 두 마리의 사자가 받치고 있는 석등을 볼 수 있다. 쌍사자석등. 석등을 받치고 있는 두 마리 사자의 다리도 이제 지칠 때가 되지는 않았을까. 석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곳이 대웅전이라는 것을 짐작케 한다. 쌍사자석등은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제6권의 표지 모델로 쓰였다. 절터에는 석화를 뒤집어 쓴 주춧돌들을 볼 수 있고 뒤로 돌아 내려다보면 그 옛날 웅장했을 절의 규모에 놀란다. 영암사터는 앞이 낮고 뒤가 높으면서 배산임수(背山臨水)의 기본을 제대로 갖춘 공간으로 전혀 손색없는 절터인데 앞에 그다지 높지 않은 봉우리가 있으니 확 트인 곳보다 도를 닦는데 유리하므로 소원성취를 빌기 좋은 기도처가 된다고 한다.
영암사지 옆으로 가면 또 하나의 진풍경을 만날 수 있다. 바로 영암사지 귀부다. 금당터의 동서에 위치한 두 개의 비석은 비와 머리장식이 없어졌다. . 동쪽 거북모양의 비석받침은 용머리에 목을 곧바로 세운 힘찬 모습이다. 겹줄로 귀갑문이 새겨진 등은 급한 경사를 이루고 있어 강인함과 율동감을 느끼게 한다. 서쪽 거북의 모습은 비석받침은 크기도 작고 움츠린 목에 등도 평평한 편이다. 두 개의 비석 모두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나 이러한 차이에서 동쪽의 비석받침이 다소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구 거북 비석받침 사이에도 절터가 있는데 어떤 용도로 지어졌는지 절에 대한 지식이 짧아 추측할 수 없다.
참고적으로 영암사터에 남아 있는 삼층석탑(보물 480호), 쌍사자석등(보물 353호), 비석을 잃어버린 돌거북받침(보물 489호) 등 세 개가 모두 보물이다.
다시 돌아가는 길 위에서 생각해 본다. 모든 계절들이 나와 함께 이 길로 와서 이 길로 가기도 하겠지만 그 모든 계절은 사람들이 볼 때마다 달라진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계절은 느끼지 못하는 가운데 성큼 다가와 있다. 이제 여름을 온전히 느끼기도 전에 금방 가을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여름옷을 입고 있다가 갑자기 겨울옷을 입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무들만 꽃을 피우고 새싹을 돋게 하고 다시 낙엽을 만들고 잎을 떨구어 내며 모든 계절을 온전하게 맞이하고 보내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너무 빨리 살아가서 계절을 느끼지 못하고 그저 세월만 보내는지도 모른다. 그 숱한 세월들을 살아오면서 매일 배가 고팠고 머릿속은 텅텅 비었다. 왜 살아 왔는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 채 시간의 한복판에서 방황하고 있다. 방황의 끝을 잡아보기 위해서 산을 찾는지도 모른다. 산에서 오래오래 머물고 싶다. 다시 산을 찾는 그날 해가 저물 때까지 오래오래 앉아 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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