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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세석으로 가는 길(2015. 7. 11)

by 1004들꽃 2015. 7. 14.

7. 11()

 

며칠 전부터 산에 가기 위해 계획을 잡던 중 가야산 탐방을 생각했다. 만물상을 걸으면서 혹시라도 만물상으로 밀려오는 운해를 맛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로 설레기까지 했다. 가까운 곳이기 때문에 출발시간은 930. 시간에 맞춰 출발했고 대의면에서 한 명과 합류하기로 했다. 40분에 도착하기로 했던 사람이 도착하지 않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갑자기 장소를 바꿨다. 여름에는 무조건 지리산을 가야한다는 한 사람의 주장에, 옛날부터 여름에는 무조건 지리산을 가야한다는 나의 주장이 부딪혔고 따라서 가야산을 가야한다는 나의 주장은 지리산을 가야한다는 주장에 묻힐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지난 79일 지리산 수필가 백남오 초청 특강이 있은 다음이라 그랬는지 백남오 수필가가 지리산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이 세석이라는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은 상태에서 갈 수 있는 곳으로 생각해 낸 것은 오로지 세석뿐이었는지도 모른다. 곧장 백무동으로 향했다. 차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백무동으로 간다는 이야기에 세석과 백무동으로 연관시키지 못하고 그냥 지리산으로 가는가보다 생각하는 것 같았다.

백무동은 방문할 때마다 대번에 설레게 되는 곳이다. 그 옛날 그것도 한겨울 눈이 수북이 내린 어느 날 등산화도 없이 여름 운동화를 신고 찾았던 곳. 백무동. 이곳에서는 장터목 대피소로도 갈 수 있고 한신계곡을 따라 세석 대피소로도 갈 수 있다. 중산리 방향에서 거림계곡을 타고 세석을 오를 수 있었지만 일행 중 아직 가보지 못한 한신계곡을 구경시켜주고 싶은 생각도 작용했는지 모른다. 그날 기분에 따라서 어느 쪽이든 갈 수 있다. 겨울의 눈을 보기 위해서라면 장터목 쪽이 좋다는 생각이고 여름에 시원한 계곡을 끼고 걷고 싶다면 당연히 한신계곡이다. 다양한 폭포와 귀를 얼얼하게 하는 물소리를 들으며 걷는 발걸음은 상쾌하다. 세석 대피소까지는 6.5KM. 시작은 아주 수월하게 접근할 수 있다. 길은 잘 닦여진 임도수준이다. 들길을 걷듯이 시작된다.


한신계곡은 한여름에도 몸에 한기를 느끼는 계곡이라는 의미에서 불리게 된 이름이라고 한다. 계곡의 물이 차고 험난하며 굽이치는 곳이 많아 한심하다고 해서 한심계곡이라 부르던 것이 발음이 변해서 한신계곡이 되었다고도 하며, 옛날에 한신이란 사람이 농악대를 이끌고 세석으로 가다가 급류에 휩쓸려 몰죽음을 당했다고 해서 한신계곡이 되었다는 전설도 전해지고 있다. 백무동에서 첫나들이폭포까지의 넓은 길은 신작로처럼 잘 닦여져 있다. 19639월 마천면 강청리·삼정리·추성리 일대 국유림의 고사목에 대한 벌목을 시행하였는데, 당시 목재 운반을 위해 만든 임도라고 한다.


어쨌거나 목표로 정한 곳은 도착해야만 하는 곳. 쉽든 어렵든 시작해야 하고 다시 돌아와야 한다. 그렇게 경험을 통해서 생의 기억할만한 시간과 장소와 생각을 만들게 된다.

백무교를 지나면서 임도가 시작되고 울창한 숲 사이로 굉음을 울리며 흘러드는 물소리를 들으며 상쾌한 발걸음도 시작된다. 저렇게 쉼 없이 쏟아지는 물줄기를 볼 때 아무런 계산을 할 수 없다. 도대체 지리산은 얼마나 많은 물을 담고 있기에 일 년 365일 변함없이 이렇게 물을 쏟아낼 수 있을까. 하루에 흘러내리는 양을 생각해 보아도 그 양을 산출해낼 계산은 나에게 없다. 저 물소리는 도대체 무엇을 이야기하려는 것일까? 생각이 생각을 만들고 내 생각을 물의 생각인 것처럼 착각해 버린다. 나무뿌리를 벗어나 흙으로 흐르고 돌과 바위를 지나 모이고 모이는 곳. 물소리는 다시 물들을 부르고 모인 물들은 더 큰 소리를 내면서 주변의 물들을 불러 모은다.


본격적인 산길이 시작되기 전에 접근이 쉬운 계곡에는 더운 날씨 때문인지 대부분 계곡에 들어 앉아 있다. 대피소에서 밤을 보내고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내려오다가 쉬는 것인지 올라가다 잠시 쉬는 것인지, 아니면 아예 이곳에서 쉬기 위해 찾은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물소리를 들으며 다양하게 앉아 있다. 울창한 나뭇잎이 만들어내는 그늘로 인해 습기가 많아서 바위마다 나무의 뿌리마다 이끼가 끼어있다. 이끼와 함께 바위에 들러붙어 함께 자라고 있는 구실바위치. 나비처럼 나폴나폴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려는 듯 숲 속에 숨어 있는 산수국. 카메라는 당장 그들을 잡아 세상 밖으로 끌어내 버리고 만다.


지난겨울 입산통제로 길이 막혀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산 너머 휘몰아쳐 오는 눈보라를 온 얼굴로 맞았던 곳, 임도가 거의 끝날 무렵에 서서 숲을 쳐다보니 숲은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사람들을 향해 미소 짓는다. 계절에 따른 변화무쌍한 산의 변신을 사람이 어찌 따라갈 수가 있겠는가.


다리를 지나면 가내소폭포를 만날 수 있다. 도를 닦다가 여인의 유혹에 못 이겨 수도를 포기하고 "나는 가네" 하면서 떠났다고 하여 가내소 폭포라고 한단다. 하얗게 부서지면서 떨어지는 폭포 아래 모여 있는 물들은 마치 저 먼 바다의 색깔을 미리부터 상상하기라도 하는 듯 짙푸른 색깔을 만들어 내고 바다로 가서 다시 그 기억을 끄집어내는 모양이다.


가내소 폭포에서 잠시 걷다보면 오층폭포를 만난다. 몇 년 전 여름. 땀으로 범벅이 된 몸을 이곳에서 씻은 적이 있다. 물속에 들어 앉아 언제까지나 있을 줄 알았지만 단지 그것은 생각일 뿐 15초를 넘기지 못하고 물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뼈가 부서질 것 같은 동통 때문에 다시 물속에 몸을 담그지 못했다. 오층폭포를 지나면 편안했던 길은 끝나고 가파른 길이 사람들을 맞는다. 인생의 황혼기와도 같이 쉬어가는 시간과 횟수가 많아지고 사람들도 점점 지쳐간다. 마지막 폭포일 것 같은 장소에서 점심식사를 하기로 했다. 시간은 1230. 땀에 전 손수건을 씻고 세수도 하면서 식사준비를 했다. 각자 가져온 음식을 풀어 놓으니 만포장이다. 많을 것 같았던 음식의 대부분을 먹어 치웠다. 대단한 일이다. 아무도 술을 가져 오지 않아 내가 가져간 맥주 한 캔과 소주 한 병으로 다섯 명이 나눠 마셨다. 모두가 소주 한 병과 맥주 한 캔씩을 마신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면서.


식사를 마치고 한 줄기 기다란 획으로 흘러내리는 희디 흰 물줄기를 쳐다본다. 끝없이 바위틈으로 흘러내리는 물의 두께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고 일정한 두께를 유지하며 그렇게 하루 종일 흘러내린다. 가야할 길을 정확히 알면서 흘러내릴 곳을 알고 흘러내리는 물은 그 누구의 비난의 대상도 아니며 또한 흐르는 물은 그 누구도 칭찬하지 않고 오로지 흘러내리는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한다.


백무동으로 오는 차 안에서 우스운 또는 웃지도 못할 장난스런 제안을 해 보았다. 어디든지 가야할 장소를 정하고 회원을 모집하여 승용차 한 대에 5명 정도가 타고서 그날 도마에 올릴 한 사람을 정하고 종일 그 사람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이벤트를 마련하는 것은 어떠냐고? 당장, 모든 여행에 참여하겠다는 즉답이 흘러나온다. " 내 욕 못하게" 무조건 참여한단다. 재미있는 일이다.


점심식사를 마친 후 오후 1시경 출발하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점심식사를 마칠 시간 즈음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는데 그냥 스쳐가는 비거니 생각했다. 일기예보에는 전혀 비가 온다는 소식이 없었고 일요일인 내일 비가 온다고 했기 때문에 그냥 안심하고 길을 나섰다. 비가 그렇게 많이 내릴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채. 또한 아직도 반이나 남은 길을 재촉하여 걷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나 하는 심정이었다. 내심 비가 그치겠거니 하는 생각이었으나 비는 그치지 않았고 빗방울은 더욱 굵어졌고 옷은 점점 젖어갔다. 하지만 그 누구도 하산하자는 소리를 하지 않으니 그냥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


산의 고도가 높아지면서 최근에 익숙해진 식물을 만난다. 지난 벽소령 탐방 시 보았던 식물이다. 노루오줌. 지리산에서만 핀다는 지리털이풀과 함께 보았던 꽃이다. 비를 친구삼아 걸으면서 가파른 길을 통과했고 비를 맞는 시간에 비례하여 옷은 점점 젖어갔다. 거의 다 젖은 사람들이 거의 마지막 폭포 아래에 섰다. 기분전환을 위하여 폭포 앞에서 만세를 부르라고 했다. 그나마 지친 몸을 추스릴 수 있을지 모르니까. 카메라 앞에서 만세를 부른 모습은 또 하나의 추억을 만들게 될 것이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카메라에 담지 못해 안쓰러울 뿐이다. 비를 피할 수 있는 보호장구 하나 없이 계속 비를 맞으니 한기가 찾아왔다. 저체온증이 밀려와 피부는 닭의 피부와도 같이 오돌토돌하게 변한다. 몸에 열을 내기 위해서라도 걸어야 한다. 그렇게 걷고 또 걷는다. 엄청난 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부러진 나무가 길옆에 버티고 있다. 어머어마한 뿌리다. 그 뿌리들이 다시 어마어마한 바위를 끌어안고 있다. 엄청난 바람의 힘을 견디지 못했을까. 단단히 버티고 있는 뿌리는 바람을 견디지 못하는 둥치를 찢어놓고 말았다.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비는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고 비와 계곡을 타고 흐르는 물이 어울려 자욱한 물안개를 만들어 낸다. 구름속의 산책! 지치고 지친 몸은 어느새 괴성을 지르고 어떤 사람은 다 왔다는 안도에 미소를 머금는다. 비를 대비한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은 일행들은 온 몸으로 비를 맞았고 기필코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제 잠시 대피소에 들렀다가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갈 것이다. 어디로 갈 것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길을 짙은 안개에 묻혀 있다. 그 와중에서 바람에 휘청이는 지리털이풀을 발견한다. 대피소로 가는 길목에 흔들리며 피어 있다. 대피소에 도착한 일행들은 모두 한기를 느끼며 떨었다. 비를 맞으며 걸었던 산길. 오늘 비로 이 시간들을, 함께 지나왔던 모든 시간들을 마음속에 화석처럼 새겨졌으리라. 어쩌면 사진 속에서 영원히 나오고 싶지 않을 비오는 날 세석의 풍경을 만들고 있는지도 모르리라.


운무에 뒤덮인 대피소의 모습이 아련하게 가슴속에 들어온다. 대피소 주변에 비에 젖은 구상나무가 서글프다. 일부러 심은 것인지 사람 키보다 큰 것들도 보이고 1m 정도 되는 것들도 많다. 비와 운무에 뒤덮여 산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대피소의 모습도 어렴풋하다. 철쭉을 보기 위해 무작정 찾아왔던 약 25년 전의 풍경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시기가 늦었던 것일까. 연분홍 꽃들은 시들어가고 있었다. 천왕봉을 넘어 도착한 세석에서 시든 꽃 속에 넋을 잃고 앉았다가 거림으로 내려왔다. 그 옛날의 발자취를 찾아 이렇게 와 보지만 이젠 점점 다리가 무거워지고 오랜 시간동안 걷지 못한다. 하지만 어쩌겠나. 두 다리를 내딛을 수 있을 때까지 걸을 수밖에. 한창 젊은 시절 대원사에서 천왕봉을 찾아 길을 나섰을 때 70대 노부부를 만났었다. 그때의 충격으로 지금도 지리산을 찾고 있는지 모른다. 나의 지리산을 향한 행로는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