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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푸른 달의 체취를 찾아서

by 1004들꽃 2015. 7. 22.

푸른 달의 체취를 찾아서

 

2015. 7. 4(맑음)

 

급하게 해야 할 일이 없는 한 주말에는 대부분 산을 찾는다. 산길을 같이 걸을 사람 있느냐는 메세지에 응답한 사람 4. 나를 포함해서 5명이 길을 나섰다. 편안하게 걸을 수 있는 길 음정마을에서 벽소령까지 연결된 임도를 걷기로 했다 거리는 5.5km 왕복 11km. 벽소령(碧宵嶺). 한자를 찾아보니 푸를 벽, 밤 소. 푸른 밤이라는 뜻이다.


차로 도달할 수 있는 마지막 장소에 도착하여 임도에 접어들었다. 숲이 짙어 길의 대부분은 그늘이었고 그 숲은 발걸음의 진행 방향에 따라 방문객들에게 변화무쌍한 모습을 보여준다. 산수국은 지천으로 피었고 푸른 잎을 비집고 나온 개망초 꽃잎이 상큼하다. 달걀노른자를 둘러싸고 있는 실보다도 가는 흰 꽃잎은 여리다 못해 안쓰럽다. 길옆으로 푸른 벽을 만든 산딸기나무에는 때늦은 산딸기가 주렁주렁 열렸고 산수국도 지천으로 깔렸다. 혼자서 걷는 길은 그저 속도를 빨리했다 늦췄다 조절을 하며 계속 걸을 수 있지만 둘 이상 걷다보면 서로서로 속도를 맞추고 쉬어가면서 체력을 안배한다. 임도는 꾸준하게 오르막이 계속되지만 완만하기 때문에 오르막이라는 것을 거의 느끼지 못한다.


산길을 걷다 뒤를 돌아보면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앞만 보며 나아갈 때는 보지 못했던 풍경들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산과 산이 겹쳐지고 한가로이 노니는 흰구름은 산의 능선을 따라 걸릴 듯 말 듯 유영하다가 때마침 불어 온 바람을 타고 솟아오른다. 하늘에 깔려 있던 구름과 솟아 오른 구름이 만나 죽어서도 천 년을 산다는 주목의 형상을 만들기도 하고 한쪽 옆에는 긴 코를 뽑아내는 코끼리 형상을 만들기도 한다. 먼 계곡에서는 물소리가 들리지만 가 닿을 수 없다. 여름에는 물소리를 들으며 걷는 산길이 좋다. 마천 음정마을에서 벽소령까지의 임도에서는 물이 흐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뿐 물에 가 닿을 수 있는 구간은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한 시간을 걷다보면 길가에서 물소리가 들려온다. 물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가 보면 얼음보다 찬 물이 계곡을 따라 소리를 내며 흐른다. 이 길에서 만날 수 있는 "첫 물이다.


땀을 흘리며 걷다가 물을 만나니 일행들은 물에 손을 담그고 땀을 씻는다. 물이 차가워서 생각만큼 오래 담그고 있지 못한다. 지리산에 오면 항상 신기하게 느껴지는 것이 물은 산의 위에서부터 조금씩 모인 것이 아래로 모여 많은 양이 흘러갈 것이라 생각하는데 지리산의 물은 거의 중턱에서도 샘물이 솟듯 펑펑 솟아나오니 도대체 지리산 물의 근원은 어디에서 시작되어 어디로 연결이 되고 지금 이 순간 눈앞에서 이렇게 진풍경을 만들어 내는 것은 도대체 무슨 조화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두 번째 만난 물은 더욱 강하게 쏟아져 내리지만 길과 멀리 있어서 손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 도대체 이 물은 어디에서 발현되어 이렇게 흘러내리는 것일까. 이렇게 높은 곳에서 이렇게 많은 물을 흘러내리게 하는 지리산의 위용을 실감케 하는 순간이다. 물론 지리산의 다른 계곡에서는 이 순간 이보다 더 많은 양의 물이 흘러내리고 있을게다.


지나온 길 뒤로 펼쳐져 있는 저 아득한 먼 산들은 오히려 그들보다 나를 더욱 아득하게 만든다. 군데군데 일어서 있는 고사목의 배경이 되어주는 저 산들은 겹겹으로 멀어지며 아름답다. 사람들의 마음은 한결같은가? 지나가는 사람마다 고사목과 어울려 풍경이 되는 푸르고 푸른 그림들을 카메라에 담는다. 그런데도 왜 떠다니는 말들은 그렇게 불통이 되어 소통되지 않고 서로 기를 세우며 싸우는 것일까. 말과 말이 싸워서 말을 만들려고 하지만 그 말들은 결코 말이 되려고 하지 않는다. 어쩌면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소통의 부재를 경험하면서 그 불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통로를 찾고 또 찾는지도 모른다. 하고 싶은 것을 쟁취하기 위하여 악을 쓰고 울면서 부모로부터 원하는 것을 얻어내고 커서는 원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하여 자기 합리화를 하기도 하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남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자기 이야기만 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일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지 않은가.

 

 

푸른 밤

 

 

꽃이 피었다 지는 것을

보지 못했다

붉게 붉게 뜨거워져

태우고 또 태우는데도

보지 못해서 미안하다

보고 싶지 않아서 보지 못했고

꽃 붉게 핀 세상이 싫어

고개 돌렸다

어둠 속에 색깔을 묻고

붉은 것도 검은색이 되는

푸른 달빛 찬란한 밤

푸른 밤에는 사람도 푸르러

바람이 불 때마다 푸르게 흔들린다

고개 들어 하늘을 보면

온 밤이 온통 푸르고

꽃이 진 자리마다 푸른 세상이 열린다

살아가는 일들이 눈물겹고

푸르른 웃음이 서글프다

평생 흘릴 눈물 쏟아 내어

푸르게 웃는 사람

푸른색만 있는 푸른 밤에

푸른 그림자로 피는 사람

 

 

산에 오면 꽃과 나무와 숲과 산과 하늘과 구름, 그리고 그림자, 바위도 있다. 그들 모두를 산이라고 부르면 그만이어서 나 자신도 산에 들어왔으니 산이 된다. 먼 산들이 아득하듯이 구름을 품은 하늘도 아득하다. 하늘을 인 벽소령 대피소 입구에 도착하면 마치 하늘로 올라가는 길목에 선 듯 발걸음도 둥실 하늘을 밟는 듯하다. 구름을 밟고 지나가듯 그렇게 하늘나라로 가는 입구에 선 기분이다. 적당히 낀 구름 때문에 걷기 좋은 날이었다. 바람까지 선들선들 불어와 상쾌한 기분을 더했다. 노고단에서 오는 사람. 세석으로 가는 사람. 음정에서 올라온 사람. 연하천 대피소로 갈 사람들이 모여 제각각 쉬고 있다.


겹겹이 쌓인 산위로 떠오른 달빛이 희다 못해 차라리 푸른 빛을 띤다는 벽소명()월에서 유래했다는 벽소령. 벽소한()월이라고도 하며, 벽소를 푸른 하늘의 뜻으로 풀이하기도 한단다. 푸른하늘재.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자를 그대로 풀이한 "푸른 밤"이라는 말이 더욱 가슴에 와 닿는다. 한자를 찾아보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은 아니지만 푸른 밤! 말만 들어도 행복할 것 같은 이름이 아닌가? 그냥 도착한 사람, 겨우 도착한 사람, 사진 찍기 위해 도착한 사람 등등 제각각의 사람들이 제각각의 모습으로 대피소 마당을 어슬렁거린다.

지리산을 많이 다녀 본 사람인 듯 우리들에게 지리산에서만 볼 수 있다는 지리털이풀을 소개한다. 얼핏 보면 산수국과 비슷하지만 자세히 보면 산수국과 그 미미한 차이를 구분할 수 있다. 지리털이풀은 세석 가는 길에서도 보았지만 다른 산에서는 보지 못한 것 같다. 그와 함께 노루오줌이라는 풀도 소개한다, 노루오줌은 다른 산에서도 볼 수 있다. 전체적인 형태가 원뿔형인데 아래로 갈수록 넓은 원을 그리고 위로 가면서 뾰족하게 마무리된다. 아래쪽은 노루가 오줌을 싼 듯 노랗게 물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시들어가면서 색깔이 오줌색깔로 변하는 모양을 보고 노루오줌이라고 이름지었나 보다.

 

 

얼굴/박인환

 

우리 모두 잊혀 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기를 꽂고 산들 무얼 하나

꽃이 내가 아니듯 내가 꽃이 될 수 없는 지금

물빛 몸매를 감은

한 마리 외로운 학으로 산들 무얼 하나

 

사랑하기 이전부터

기다림을 배워버린 습성으로 인해

온 밤 내 비가 내리고

이젠 내 얼굴에도 강물이 흐르는데

 

가슴에 돌단을 쌓고 손 흔들던 기억보다

간절한 것은 보고 싶다는 단 한 마디

 

먼지 나는 골목을 돌아서다가

언뜻 만나서 스쳐간 바람처럼

쉽게 헤어져버린 얼굴이 아닌 다음에야

 

신기루의 이야기도 아니고

하늘을 돌아 떨어진 별의 이야기도 아니고

우리 모두 잊혀 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벽소령 대피소를 뒤로하고 다시 돌아 내려오는 길. 하루를 보내며 이렇게 잠시 여유를 부려보는 것. 낭만적이라고 해야 하나. 겨우 산에 와서야 이렇게 여유를 찾을 수 있다. 여유로운 단 하루를 위해 여유롭지 않은 많은 날들을 보내고 있는데 언제쯤에야 항상 여유로운 날들을 데리고 가장 여유롭게 산책을 할 수 있을까? 푸른 밤을 보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고 밤을 보고서는 내려오지 못할 것이기에 아쉬운 발길을 돌려야 했지만 하루 동안의 벽소령 가는 길을 걸으면서 생각했던 푸른 밤을 마음 깊은 곳에 새겨본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밤 달이 가장 아름답다는 푸른 달의 체취를 찾아 떠난 벽소령의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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