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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있는풍경

투명인간

by 1004들꽃 2017. 5. 15.


투명인간


전화번호를 검색하다가 문득 알지 못하는 이름을 발견한다
그 이름은 언제 무슨 일로 나의 전화번호부에 새겨졌던 것일까
며칠 동안 생각해 봐도 떠오르지 않는 이름
삭제를 누르다 말고 또 며칠
그러다 지우는 일도 잊어버린다
이미 고인이 된 사람의 문패를 보며
이름을 지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생각하게 된다
남편의 문패가 박혀 있는 집에서 매일 밥을 먹고 빨래를 한다
온 몸에 문신처럼 박힌 이름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쉽게 적었다 지워버리는 이름 속에 나의 이름도 있는 것은 아닐까
지워지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들여다보면 떠올랐던 얼굴 이름을 지운 후에 다시 떠오르지 않는다
이름이 없어진 것과 사람이 없어진 것은 같은 일이라고 하는 것일까
김춘수 시인은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된다고 했다
이름으로 세상은 구분되고
지워진 이름으로는 누구에게도 다가갈 수 없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살아갈 수 있다
매일 이름을 지운다
그 누군가의 명부에 씌어 있을 나의 이름을 지우기 위해
그의 이름을 지운다
이름이 없어진 후에 비로소 자유를 찾을 수 있다
누구에게도 떠오르지 않을 자유


정확한 이름이 아닌 누구였으면 좋겠다
정확하게 거론되어 정확하게 처단되는 정확한 이름보다는
그저 누구였으면 좋겠다
세상에는 알려진 정확한 이름보다
누구들이 더 많이 살아가고 있다
너와 나 그를 뺀 누구들이 나를 보고 누구라고 한다
나도 그들을 누구라고 한다
세상에는 같은 말을 쓰면서도 모르고 지내는 사람이 더 많다
알지 못하는 보이지도 않는 모르는 누구들이 세상을 이룬다
누구가 없으면 누구의 세상도 아니다
정작 자신이 누군가에게 필요한 누구라는 걸 모르는
누구들과 누구들이 그냥 어울려 살아가는 세상
밥을 많이 먹는지 술을 많이 마시는지 전혀 모르던 누구도
어느 순간 너가 될 수 있고 그가 될 수 있다
너가 되었다가 그가 되었다가 다시 누구가 될 때 찾아오는 해방감
누구가 되어 누구의 세상에서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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