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숭숭한 기분에 아침에 일찍 일어나게 되었는데
예정대로 산에 가볼까 생각을 했지만 어디를 갈까 생각하다가
문득 시계를 보게 되었다
7시
눈 쌓인 천왕봉을 볼 수 있을 것이란 생각
몇 주 산에 가지 못하고 어영부영하다가 시간을 다 보내 버린 탓인지
배낭부터 찾아야 했고, 장갑, 목수건, 아래위로 입을 옷 등등 찾다가 시간을 보내고
나가보니 차는 얼어서 꼼짝을 못하게 되어 있고
시동을 걸어 성에를 녹이고 나니 9시가 훌쩍 넘어 버렸다
마음을 다독이며 법계사라도 다녀와야지 하는 생각으로 집을 나설 수밖에~~
산이 가까워지면서
지리산에만 눈이 쌓인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도로 사정에 따라 산이 보였다 사라졌다를 반복한다
주변은 구름으로 인한 그늘에 들어앉아 있고
지리산만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인다
순두류로 버스를 타고 이동하여
칼바위방향으로 걷는 시간을 한 시간 가량 단축한다
일요일이라 시간버스는 수시로 운행하여 10시 41분에 순두류 입구에 도착했다
생각없이 길을 걷기로 했다
시간에 구애없이 그냥 눈구경을 하며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다
배낭에는 물 두 병과
캔맥주 한 개, 키스틱 5개.
혹시나 긴 시간 동안 눈 속에 노출 되어 있을까 생각하여 물 두병을 준비했다
생각보다 날씨는 따뜻하여
얼마 걷지 않은 상태에서 땀이 흐르기 사작했다
땀은 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 오산이다
걷는 내내 땀 범벅이 되었으니까
사진을 이렇게 찍는 이유는
쉬고 있다는 증거
땀을 닦는 핑계로 쉬고 있다
남부지방의 특성으로 인하여
눈밭에서도 이렇게 땀을 흘릴 수도 있구나 생각해 본다
날씨는 너무 맑아서
하늘에 구름 한점 보이지 않는다
지리산의 힘찬 기운이
주변으로 구름을 밀어버렸나보다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은 눈은
바위 위에서 고요하다
점점 옅어지다가 봄이 되면 바위의 민낯을 보여 주겠지
시간은 언제나 정직하다
어느정도 예상된 시간안에
사람을 그 장소에 데려다 놓기 때문이다
로타리대피소에 다다랐다
숨을 고르고 시계를 보니
11시 41분
정확하게 한 시간 걸렸다
당초 생각으로는 12시가 넘었을 경우
그냥 법계사를 방문한 이후 칼바위로 내려가기로 했다
12시가 넘지 않았으니
이젠 그대로 계속 강행군!
찬왕봉을 향해 걷기로 한다
법계사 일주문~!
어쩌면
대한민국에서 가장 닿기 힘든 일주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법계사 일주문에 도달하면
그동안 가슴에 쌓아 두었던 번뇌는
여기까지 걸어 오면서 다 없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다
법계사를 벗어나 점시 오르면
먼 산들이 끝도 없이 펼쳐진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멀어져 가면서
하늘이 되어가는 산들을 보며
나도 저 산들과 함께 하늘을 향해 다가가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눈이 내려 마른 땅도 돌도 발견할 수 없어
앉아서 쉴 수 있는 공간이 없다
계속 걷는 수밖에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눈길을 걸으면 가슴에 시꽃이 피어날 줄 알았다
추운 날씨 때문에 걷기가 함들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다만 나 혼자만의 생각에 불과할 뿐이었고
걷는 내내 땀범벅이 되어 처음 생각과 마찬가지로 아무 생각없이 걸었다
시란, 진실 추구를 위한 허구다. 그래서 시를 쓰는 행위, 즉 창조행위란, 허구에서 진실을 만드는 것이다
진실 또한 내가 살아가는 세상과 거리가 멀어서 믿기 힘들다
어쩌면 진실은 왜곡되기 쉬운 것이고
다만 사실만을 추구해야한다는 강박관념에 휩싸인다
개선문에 도착했다
거리표기로는 800m이지만
지처있는 다리는 지금까지 걸어온 거리보다 더 멀게 느껴진다
법계사에서 겨우 1.2km 걸어왔을 뿐인데
피로감이 엄습한다
어쩌면 땀을 많이 흘린 탓도 있을 것이다
시를 쓰는 방법의 하나로
감정을 열지 말고 닫으라는 이야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가 눈치 챌 수 있을 만큼만 열어두어라
그런데 이것이 가장 어려운 이야기다
어떻게 독자가 눈치챌 수 있을 만큼만 열어 둘 수 있겠는가?
그리고 감정을 숨겨야 하고, 말하지 않고도 말하는 방법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는, 감정 그 자체가 아니라 '감정의 기억'이어야 하며 관념과 추상은 시의 지옥이다
시는 많은 이론에 얽혀 갈 길을 찾지 못하는 모순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소통에 더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내가 쓴 글을 상대방이 이해하지 못하고
상대방이 쓴 글을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글을 쓰는 방식이 아닌 것 같다
이렇게 내린 눈을 바라보며
그저 눈으로 보야야만 이 겨울을 올바로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중산리 방향에서 천왕봉으로 가는 길에 이렇게 눈이 많이 머물러 있는 경우는 드물다
양지바른 곳이어서
눈이 온 다음 거의 녹아내리고
일부만 바람에 실려오는 습기와 어울려 상고대를 형성하게 된다
어제까지만 해도 천왕봉은 통제되었다고 한다
어제 이곳에 왔다면
그냥 돌아갈 뻔 했다
살다보니 운수 좋은 날도 있는 것 같다
눈산 뒤로 구름이 산을 이루고 있다
대학시절 MT를 천왕봉으로 왔던 경험이 있다
여름에 텐트를 치고 자는데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온 몸이 물에 잠긴 후에야 겨우 잠이 깨어서
로타리산장으로 피신한 적이 있었다
다음날 천왕봉으로 올라갔는데
천왕봉 아래, 바로 발 아래로 양탄자같이 끝도없는 구름이 펼쳐져 있는 광경을 보았다
바로 그 구름이 - 멀긴 하지만 - 저 멀리에 펼쳐져 있다
천왕봉을 향해 끝도없이 이어진 행렬!~~
긴 여정 끝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천왕봉 표지석과 함께 사진을 찍기 위해 길고도 긴 줄이 형성되었다
천주 - 天柱 -
지리산은 하늘을 받치고 있는 기둥이다
반대편 장터목으로 가는 길이다
갈까말까 망설이다
발길을 돌린다
다리가 피로함을 전해온다
천왕봉에서 장터목까지의 길은 하늘길을 걷듯 멋진 길이지만
장터목에서 내려가는 길은
젊은 시절에나 하는 일이지 하면서 합리화 해 버린다
눈길은 보통길을 걷는 것보다 1.5배 정도 더 힘이 들어가기 때문에
몸이 느끼는 피로도 또한 마찬가지다
머리가 비상한 사람들이다
비닐로 가설 건축물(?)을 지어서 그 속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
멀리서 반야봉이 살포시 엉덩이를 드러내건만
그 모습에 긴장을 했는지
사진이 흔들리고 말았다
긴 여정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일만 남았다
다시 찾는 그날까지 안녕~~
올해는 1월에 지리산을 찾았기 때문에
홀가분한 한 해를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마음만 먹으면 곧장 올 수 있는 이곳이
왜 그렇게 멀게만 느껴지는 것인지
사람들은 왜 그렇게
천왕봉 표지석과 사진을 찍으려 하는 것인지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을 것처럼
사력을 다해 사진을 찍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인생은 제법 짧은 모양이다 하고 생각해 본다
그렇게 짧지 않다면
다음에 또 오면 되는데~~~
어쩌면 다른 사람도 아닌
그 또는 그녀와 함께 왔기 때문에
저렇게 공들여 사진을 찍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2018년 흔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산재(2018-3-24) (0) | 2018.03.24 |
---|---|
모산재(2018-3-11) (0) | 2018.03.11 |
가야산(2018-3-3) (0) | 2018.03.03 |
자굴산(2018-2-3) (0) | 2018.02.03 |
모산재(2018-1-21) (0) | 2018.0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