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의 함성! 나라사랑
의병정신 계승을 통한 전 국민 나라사랑 운동으로 승화
- 의병의 날 국가기념일 제정에 즈음하여 의병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
세계화 시대에 있어
한국인의 정신적 지주로 피어나는 의병정신
우리 한민족은 역사상 수많은 전쟁을 처러야 했지만 그 중 임진왜란만큼 나라와 백성을 지리멸렬하게 고통을 준 경우는 없었다. 임진왜란으로 가장 큰 피해를 당한 것도 조선이고 승전국도 조선이다. 명나라가 조선에 지원군을 보냈고 관군들과 함께 왜군에 맞서 승전을 이끌어냈지만 그 속에는 국가수호 의지로 뭉쳐 각 지방에서 일어난 의병의 결집이 보다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곽재우는 일본군이 침입한 지 9일째 되는 날 4월 22일. 경북 달성군 유가면 가태리의 큰댁 가묘에 나아가 의병을 일으켜 왜군을 물리치겠다고 고한 후 성묘하고 봉분을 없애고 가재를 정리한 후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로 돌아와 현고정 느티나무에 큰북을 매달아 북소리를 울리면서 의병을 모집했다. 이때 그의 나이 41세였다.
의병 창의 당시 곽재우 장군의 심경을 ‘난중잡록’에서 읽을 수 있다.
<벼슬아치나 백성들이 왕조의 보살핌을 받은 지가 200년이나 되었는데도 나라가 위급하게 되자 스스로 보전할 계책만 세우고 임금의 어려움을 돌보지 않는다. 이제 나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 나라 300고을에서 남자가 한 사람도 없는 것이니 어찌 만고의 수치가 아니겠는가 하며 울분을 참지못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곽재우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국에서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그의 전공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특히 정암진의 방어는 경상우도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의 의병활동 중 가장 빛나는 전과로 꼽히고 있다.
의병의 날은 지난 1971년 의병기념사업회가 발족되고 이듬해인 1972년 4월22일 국회의원 82명의 동의를 얻어 국가기념일 제정을 건의한 이후 의령군민의 숙원사업으로 오랜 세월 추진돼왔다.
1972년 4월 22일 의병의 날 제정을 염원하는 제1회 의병제전 행사를 개최했고 1976년 9월 14일 대통령의 의병전승지 성역화사업 지시로 1977년 10월 5일 충익사 정화사업을 착공했으며 1978년 12월 22일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준공식을 개최했지만, 이후 추진사업은 한동안 침체에 빠졌다가 2008년 8월 의병정신을 애국정신으로 승화시키기 위한 “의병의 날” 국가기념일 제정을 위하여 군민 15,586명의 서명을 받아 청원서를 접수하였다. 이후 대정부 건의문 발송, 청원심사위원회 심사, 공청회, 국회 본회의 의결 등을 거쳐 2010년 5월 25일, 6월 1일을 국가기념일로 하는 “의병의 날”이 무려 39년 만에 제정된 것이다.
애국 애족 정신에 입각하여 자발적으로 일어난 의병정신 승화
그렇다면 과연 의병에 대하여 어떻게 정의 내릴 수 있을까? 의병관련 학술단체에서는 의병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의병은 외적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태로울 때 뜻있는 백성들이 나라의 소집이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오직 정의 수호와 애국 애족 정신에 입각하여 자발적으로 일어나 군사 대오와 무장을 갖추고 외적에 대항하여 목숨까지도 바치며 싸운 민병이다.>
또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이며 민족 사학자 박은식 선생은 “나라의 민군(民軍)이며 민족의 국수(國粹)다.”라고 했다.
의병은 병역의무 이행 차원의 군사복무와는 전혀 다른 민병이다. 특히 일제의 근세 재침략에 맞서 싸운 의병전쟁(1894-1915)은 나라가 반신불수 상태였거나 사라진 상황에서 열악한 무기와 훈련 태세임에도 불구하고 결연한 자세로 대적했던 것이다.
그동안 의병과 관련하여 의병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현재와 미래의 애국애족 ‘국민정신’으로 승화시키고자 뜻있는 단체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조국의 국난극복과 독립을 위하여 자발적으로 신명을 바친 의병선열들의 공훈을 기리고 그 분들의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 대의정신, 자발적 희생정신을 선양하여 민족정기와 국가관을 바로 세우고 민족의 통일번영과 건전한 사회발전을 위한 움직임이 전국 도처에서 일어났다.
민족사를 통해서 본 의병의 활약상
우리 민족사에서 의병의 활약은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백제는 수도 함락 후 왕족 복신(福信)과 승려 도침(道琛) 등이 군사를 이끌고 당나라 군대에 항쟁했으며, 고구려 멸망 후 검모잠이 왕족 안승(安勝)을 받들어 당나라 군대에 항거하기도 했다.
고려시대에 삼별초(1270-73)는 몽고군 침공 시 배중손, 김통정 등이 백성을 이끌고 진도와 제주도에 들어가 끝까지 항쟁했고, 공민왕 때는 몽고 정권 원(元)에 반기를 든 한족(漢族) 중심의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 안성 민중이 선봉부대를 격파하여 홍건적의 남진을 저지했다.(1361년) 1232년 12월 16일 몽고군이 침략하자 승려 김윤후는 용인군 입보면민들과 합세하여 몽고 장수 살리타를 살해하고 몽고군을 퇴각시켰다.
조선시대에는 일본의 두 차례 큰 침략을 받았다. 그 중 하나는 임진왜란이요, 또 하나는 근세의 재침략으로 강제합병까지 이어진 사건이다.
임진왜란 때는 스님들의 의승군을 포함하여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이 왜군을 몰아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전란이 끝난 후 조정에서는 4대 의병대장(고경명, 곽재우, 김천일, 조헌)과 유공 의병을 찾아 포상하였으며 곽재우 홍의장군이 그 중심에 있었다.
근세에 일본의 한국침략은 1875년 운양호 파견을 시작으로 1894년 동학혁명을 계기로 삼은 청일전쟁 승리를 기해 본격화 했으며 러일전쟁 승리 후 을사늑약을 통해 강제합병으로 이어졌다.
한편 의병은 1894년의 안동 봉기, 1895년 을미년 제천 등지의 궐기, 1908년초 ‘13도 창의군’의 서울 탈환작전, 1909년 호남의병 대격전을 거쳐 1915년 평남 성천의 채응언 부대가 포로가 되어 순국할 때까지 무려 21년 동안 일본군과 관군을 상대로 항쟁했다. 그 후 의병은 광복단, 의열단, 독립군, 조선의용대, 광복군 등으로 이어졌고 해방 후 국군으로 이어졌다.
한말 의병의 참여 규모는 약 30만 명 내외로 추정되며, 그 중 약 15만 명이 순국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무기의 열세, 군사훈련을 받지 못한 점, 자금의 열세 등을 감안할 때 일본군에 의한 대학살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한말 의병에 대하여 정부에서는 순국자 15만 명 중 1,920명에 대하여 포상했다. 내용을 보면 대한민국장 3명, 대통령장 14명, 독립장 465명, 애국장 1,096명, 애족장 643명 이다. 대부분의 의병 순국자에 대한 자료가 없고 오랜 시일이 경과하여 자료가 멸실되어 순국자 중 약 1.3%만이 정부포상대상자가 된 것이다. 이에 비해 조선을 구한 임란의병은 방대한 자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방치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의병정신의 바탕은 무엇인가?
세계화 시대에 부합하는 한국 국민정신의 방향은 그 역사성에서 찾을 수 있다. 먼저 왕정시대에는 천(天)․지(地)․인(人) 세계관 속에 인간의 안녕과 번영을 추구하는 홍익인간 정신이 있었고, 신라의 사군이충(事君以忠), 사친이효(事親以孝), 교우이신(交友以信), 임전무퇴(臨戰無退), 살생유택(殺生有擇)을 기본으로 하는 화랑정신, 학문(學問), 충신(忠信), 의리(義理), 측은(惻隱)을 기본으로 하는 조선의 선비정신, 그리고 사대주의 사상의 배격, 민족자결 정신, 위정척사 사상 등의 자주독립정신이 있었다.
민주시대로 오면 세계화 속의 민족국가정신의 유지 계승 및 민족 통일을 지향하는 민족정신과 경제적 자립과 전통문화의 자립과 독자성 및 고유성을 유지하려는 자립정신, 그리고 새마을 운동, 사회정화운동 등 역대 정권에 의한 국민정신 등이 있다.
현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국민정신으로서의 의병정신은 정의수호(正義守護), 국난극복(國難克服), 위국보은(爲國報恩), 솔선수범(率先垂範), 자발희생(自發犧牲) 정신을 그 근거로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의령지역에서는 곽재우가 가장 먼저 봉기해 의병을 모아 관군을 대신했다. 곽재우의 전공은 임진의병의 시발이 되었다고 볼 수 있는 기강나루 전투와 정암진 전투로 요약된다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군은 선조 25년 4월 14일 부산진을 공격하고 다음날 동래를 함락시켰다. 이후 왜군은 급진격하여 상륙한 지 20일 만에 한양을 점령했다. 이러한 관군의 붕괴와 무정부 상태에서 의병은 자발적으로 일어났다. 이를 촉발시킨 것이 곽재우를 비롯한 의병장들이며, 또한 농민과 천민도 이에 호응하여 자발적으로 가담하게 된 것이다.
“선조수정실록”은 임진왜란 의병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여러 도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경상 전라 충청 3도의 병사들은 모두 인심을 잃고 있었다. 때문에 왜란이 일어난 뒤에 군량을 독촉하니 사람들은 모두 미워하여 왜적을 만나면 흩어져 도망갔다. 마침내 도내의 거족으로 명망 있는 사람과 유생들이 조정의 명을 받들어 의를 부르짖고 일어나니 소문을 들은 자들은 격동하여 원근에서 이에 응모하였다. 비록 적을 크게 이기고 얻은 것은 적으나 인심과 나라의 운명은 이에 힘입어 유지되었다.>
세계화 시대에 우리민족이 가야할 길
현재 우리나라는 공동체 의식의 결여 등 급변하는 주변 정세에 대처할 역량이 부족한 실정이다. 황금만능주의, 물질만능 풍조, 실업문제, 저출산으로 인한 노령화 등으로 국력신장과 국민통합의 저해요인이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 바로 의병정신인 것이다. 나라와 겨레사랑, 정의구현, 자발적 솔선 희생정신, 진취적 기상과 학문을 겸비한 선비정신이야 말로 국민통합을 이루고 사회 정화를 이루는 으뜸정신인 것이다.
일제 침략으로 나라 없던 시기의 고통은 현재 이스라엘 등과 같은 주변 국가의 예를 보면서 귀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제 현대를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그 옛날 의병의 함성과 나라사랑 정신을 되새겨 국민 대통합의 공통분모를 의병정신에서 찾아 국민정신운동으로 승화시켜야 할 것이다. 올해는 국가기념일로 제정되어 처음 의병의 날 기념식이 열린다. 민족의 뿌리이자 정체성인 의병의 고귀한 자기희생 정신을 계승하여 나라사랑 정신을 함양하고 국민화합을 통해 국가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참고
o 홍의장군 의병선양회 편저 『누가 이 나라를 지켰나!』
o (사)의병정신선양회 2010년도 학술회의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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