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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은교/박범신

by 1004들꽃 2010. 8. 2.

술자리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하다 보면 가끔 신춘문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신춘문예에 당선되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그들이 요구하는 틀에 맞추어야 한다고. 그리고 등단이라는 것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제도이며 그 등단을 통해서만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비판하기도 했었다. 제도권에서는 그들이 정해 놓은 틀을 가지고 사람을, 아니 시인이든 수필가든, 소설가를 판단한다는 것이다. 본인이야 어떻든 상관없는 일일 뿐이고 그들의 존재를 유지하는 것이라면 어떻든 괜찮은 것이고 그들의 존재를 위협하는 일이라면 가차없이 제거해 버리는 것이 마치 정치판을 보는듯하다는 것이다.

 

열일곱 어린 처녀가 내뿜는 관능에 휩싸여 갈팡질팡하는 늙은 시인은 그 내면적인 마음이야 어떻든 간에 사회는 오로지 시만을 고집하며 새로운 장르를 개척해 나가는 영웅으로 대접한다. 또한 결혼도 하지 않고 오로지 시에만 전념하는 순수 그 자체, 스스로 발광하는 신비에 싸인 존재의 이미지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정작 늙은 시인은 소설, 희곡, 에세이 등 모든 방면의 글을 쓰고 있었고 남몰래 사창가를 드나들었으며 열일곱 어린 처녀가 내뿜는 관능에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여 열병을 앓는 주책바가지 노인, 질투의 화신일 뿐이었다. 그 늙은 시인은 어쩌면 고상한 척하며 너스레를 떨고 있는 우리들 자신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다. 아니 바로 우리들 자신인 것이다.

사회적으로 드러나 있는 자신의 겉모습 안에 들어있는 비굴한 모습을 교묘하게 숨기며 심장 깊숙한 곳에서 터져 나오는 갈망을 누르며 도대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이 술 취한 도시에서 비틀거리며 배회하고 있는 것이다.

 

 


도시의 밤

 

 

투명 유리창을 통하여
그들이 드나드는
어느 가게의 출입구에 눈을 멈춘다
유리창 너머 아른거리는
소리 없는 드라마 속에서
생의 단면을 느끼어 본다
그들이 볼 때 나도 그들에겐
소리 없는 한 편의 드라마이겠지
서로 보여주고 연극을 하는
세상사의 일상에서
누군가에 의해 조종되는
꼭두각시의 생을 떠올려 본다
술잔에서 떨어져 나온
지난 이야기가 그렇고
담배연기 속에 아른거리는
정해지지 않은 미래가 그렇고
수없이 짓밟힌 아스팔트 위의
발자국이 그렇고
급박하게 변해가는 그들의 삶 속에서
정지된 나의 일상이 그렇고…
깜박이는 신호등 불빛을 보면서도
아무 생각 없는
텅 빈 내 생의 한가운데

 

 


늙은 시인은 결국 자신의 모든 던적스러움이 담긴 노트를 일 년이 지난 후에 공개하라고 한다. 일 년이 지나면 자신의 기념관이 생길 것이고, 살아있는 그들이 그들의 위상을 높이기 위하여 죽은 시인을 이용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그 모든 추모사업이 완성되는 일 년이 지난 어느 날 세상을 뒤집는 충격을 세상에 안겨 그야말로 세상을 바로잡아 보고자 했던 것이다. 그 모든 던적스러움을 죽어서도 드러내고자 하는 늙은 시인의 세상 바로잡기 계획은 의도된 대로 진행되는 듯했다. 하지만 소설은 늙은 시인의 계획을 실패로 돌아가게 한다. 소설의 내용이 어떻든 소설의 세계가 아닌 현실세계에 그러한 사실을 내 던졌다는 것은 잘못되어가고 있는 한국 문단을 바로잡고자하는 소설가의 의도임은 분명하다.

은교가 이적요 시인과 서지우의 기록을 태워버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해할 수 없는 이 세상은 어차피 그렇게 가야만 한다는 것일까? 아니면 그 모든 내면적인 던적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표면적으로 드러난 일에 대해서만 판단해야 하는 것일까?

 

결국 소설가도 판단은 독자에게 맡겨버린다. 은교가 기록을 태워버림으로써 소설 속에서 움직이는 관계자들은 모든 은폐된 사실을 알 수 없게 되고 다만 독자들만 그 모든 사실을 알게 된다. 독자는 신의 자리에서 판단해야만 한다. 인간은 모두 상대방의 내면을 알 수 없고 자신의 모든 감각기관을 통하여 들어오는 것을 자신의 모든 이성과 감정을 동원하여 스스로 판단할 뿐이다. 그 누구도 상대방의 판단을 대신할 수 없는 것이다. 어쨌든 각각의 사회 구성원들에게 팽배해 있는 지배 이데올로기는 그 각각의 사회에서 상당한 부분을 각각의 개인이 추종하게 만드는데, 자신을 드러나게 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을 추앙하는 예는 사회 곳곳에서 보아왔다. 도대체 저 사람들이 정신이 있기는 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수시로 가지는 것이 바로 그 증거인 것이다.

 

소설 속의 이적요 시인을 생각하면서 나는 나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항상 순수만을 고집하며 행동에 있어서도 도우미가 나오는 술집을 꺼려하고 오로지 깡소주만 마셔대는 순정파 문학가의 길을 걷고 있다고 떠들고 있지만, 사실은 아무도 모르는 격정적인 관능의 세계에 지배당해 쩔쩔매는 불쌍한 알콜중독자일 뿐이다. 어느 누구에게도 관대하지 못하고 독선적이면서도 겉으로는 자비심에 가득 찬 부처인 냥 거드름을 피우고 있는 알량한 가짜문학인일 뿐이다. 부끄러워서 동굴을 파고 들어가 세상 밖으로 나오지 말아야 할 인물일 뿐인 것이다.

 

늙은 시인의 제자 서지우는 자신이 쓴 글도 아니면서 온갖 인터뷰에 응하면서 마치 자신이 쓴 것으로 착각하기까지 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그의 스승인 이적요를 사랑했고 스승이 사회에 비춰진 모습을 망가뜨리는 것을 막기 위하여 갖은 수단을 동원하지만 그것은 다만 스승의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도화선이 되고 만다. 결국 스승으로부터 버림받고 죽음으로써 스승을 떠나지만 스승이 생각하는 만큼 문학적 감각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다만 스승의 눈에는 허접한 문학인으로 비춰졌고, 최고가 되려는 욕심 때문에 제자는 더 나아가지 못했던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우리는 애초부터 최고의 작가에 눈을 맞추며 기초부터 자신을 닦는 노력을 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책의 줄거리에만 관심을 가지고 책 속에서 움직이는 문장이나 단어가 얼마나 많은 고민 속에서 선택되고 닦여졌는지 생각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과연 자신이 쓴 글에 대하여 자신과 얼마나 진실하게 대화를 나누었는가? 다만 보여주기 위한 문학을 하지는 않았는가? 스스로를 시인이라고 추앙하며 시인이라는 이름으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신만의 자리를 만들어가며 자만감에 빠져 허우적대지는 않았는가? 시인이라고 하면 우러러 볼까 싶어서 시인의 이름을 팔기 위한 행사에만 찾아다니지 않았는가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지금껏 문학이라는 가면을 쓰고 잘도 살아왔지만 이제 그 가면을 벗어야 할 때다. 소설 “은교”는 다양한 장르의 문학을 하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에게 가면을 벗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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