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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소풍/성석제

by 1004들꽃 2009. 2. 24.

제목만 보고는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라고 노래하는 천상병의 귀천을 떠올렸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음식과 관련한 체험담을 수록한 산문집이다.

어린시절 소풍을 간다는 것은 평소에 구경할 수 없는 김밥을 먹는다는 기쁨과 거기에 더하여 소풍가방에 사이다나(요즈음 00사이다 같은 것이 아니고 불량식품이다) 과자 등을 가득 채워서 등에 짊어지고 가는 황홀함이 더해진 그 어떤 것이었다는 것은 40대를 넘어 선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이 아닐까?

책을 읽고 있노라면 저자의 생활에서 여행이 먼저인지 먹는 것이 먼저인지 구분이 가지 않지만 나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모습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을 찾고, 그리고 그 음식을 먹기 위한 고독한 여행자의 모습이다.(고독하다고?)

여태까지 그러했지만 책을 읽고 있으면 그 작가의 어투라든지 표현 생각과 비슷해져간다. 그것은 그 책의 풍이 마음에 들었다는 이야기라고 해도 될 것이다.

첫 번째 이야기 “너비아니” 이야기에서 아주 얌전한 여인이 아주 얌전하게 안내를 하고 얌전하게 음식을 날라 얌전하게 차리니 우리도 아주 얌전하게 음식을 먹었고 마당 한켠에 피어 있는 꽃도 바람도 얌전해 졌다는 것. 삼투압의 원리처럼 닮아가는 것 아니겠는가.

군에 있을 때 라면과 관련하여 한 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고등학교 때 기숙사에 있었기 때문에 물을 끓이기 위하여 전기플러그에 철사를 연결하고 철사의 양 끝을 물에 담그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물이 끓었고 그 물로 세수도 하고 양치질도 했다. 그 실력을 군에서도 발휘하여 군용 숟가락 두 개를 전기플러그에 연결하여 도구를 만들었는데 플라스틱 바가지에 라면과 스프를 풀고 숟가락을 양쪽에 찔러 넣고 플러그를 콘센트에 꽂으면 1분이 채 되지 않아 라면이 끓었다. 더 발전된(?) 도구를 만들기 위해 생각한 것이 구리뭉치를 숟가락 대용으로 하면 열전도가 더 잘되니 더 좋을 것이라 생각하여 그야말로 발전된 도구를 만들었는데, 문제는 그 구리가 열을 받아 라면에 녹아들었던 것이다.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하여 단숨에 먹어버렸는데 문제는 다음날이었다. 단독군장으로 운동장을 돌았는데 전날 밤에 먹었던 소위 “구리라면”이 뱃속에서 요동을 치기 시작하였다. 한 바퀴 반을 돌았던가. 갑자기 폭포가 솟구치듯 뱃속의 내용물이 입을 통하여 터져 나왔는데 아니나 다를까 산화된 구리 색깔의 액체가 연병장에 쫙 깔리게 된 것이다. 그 뒷이야기는 하지 않겠다.

요는 작가도 소년시절에 그 도구를 사용하여 라면을 끓여 먹었다는 것이다.(소년시절의 맛 - 라면) 나에게도 “구리라면”을 만들기 전 숟가락 라면은 춥고 배고픈 군 생활에서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아있다.

냉면광들은 맛있는 냉면을 먹기 위해 다섯 시간을 차를 몰고 가서 십오분 동안 곱빼기에 사리까지 먹고 다시 다섯 시간동안 차를 타고 오면서 근래에 경험한 냉면 이야기를 하면서 돌아온다.(우리는 우리끼리-냉면) 음식에 대해서는 그저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해왔던 내가 이 책의 작가와 만난다면 그는 나를 “왜 사느냐고” 물을 것이 뻔하다.

맛이라는 건 시기, 색깔, 기대, 냄새, 인생관 등의 수많은 함수를 직감적으로 풀어낸 결정체이며, 맛을 결정하는 요소를 비율로 나타내면 오리지널리티 10, 명성 10, 위생상태 10, 식당 사람의 생김새 20, 냄새 10, 색깔 10, 간(염도) 10, 형태 10, 평상시의 손님 10으로 구분한다. 음식에 대한 이러한 구체적인 분류 내지는 분석에서 그 사람의 철학까지 느낄 수 있지 않은가.(가을낮 마법의 길에서-비빔국수)

세월이 흘러 문화가 바뀌고 사고방식도 달라졌다. 그 시대를 반영하는 음식이 있고 음식문화가 있을 것이다. 어린시절 라면 하나를 끓여 동생과 나누어 먹고 또 하나를 끓여 나누어 먹고 또 끓여 먹는 사이에 둘이서 10개를 끓여 먹은 적이 있다. 그것도 국민학생(요즈음의 초등학생) 둘이서. 한꺼번에 10개를 끓였다면 먹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 백 명이 소 백 마리를 잡아먹는다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당시에 라면은 제법 귀한 음식에 속했었다. 부모님의 표정은 설명하지 않아도 알겠지.

거의 20년 전 대학생 시절. 꾼들과 모여 자주 들락거리며 소주를 홀짝이던 “아줌마집”이 있었다. 천원 또는 천오백원씩 갹출하여 돈만큼 소주를 마셨다. 물론 안주는 김치가 대부분이었고, 명절이라도 지난 다음에야 그나마 메뉴표에 있는 “안주”를 시킬 수 있었다. 그건 진수성찬이었고 김치만으로도 소주가 달았던 시절이었다. 아직도 그때 그 아줌마가 세월과 함께 얻은 주름계급장을 달고 “아줌마집” 간판아래에서 장사를 하고 있지만 소주나 안주나 김치, 그 어디서도 그때 그 맛을 느낄 수 없다.

가장 맛있었던 음식에 대한 추억은 다만 추억으로만 남아 있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시기가 다르고 음식에 대한 기대 또한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라면을 먹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 그 시절을 먹고 싶어하는 거라고. 무지개를 찾는 소년처럼 헛되이, 저 멀리에서 황홀하게 빛나는 그 시절을 되찾으려는 것이라고.”(소년시절의 맛 - 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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