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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내 마음의 무늬/오정희

by 1004들꽃 2009. 2. 24.

작가가 글을 쓰지 않을 때, 혹은 글쓰기가 되지 않을 때 무슨 생각을 하게 되는가에 대한 질문의 대답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책을 읽고 그 느낌을 기록한다는 것은 어쩌면 가장 어려운 숙제가 아닌가 생각된다.

밑줄 친 몇 부분을 옮겨 보고자 한다.

사람들은 집에 깃들이고 집은 사람에게 깃들인다

일본의 작가 소노 아야코는 “교도소에서 출소하는 날, 아무것도 묻지 않고 조용히 맞이하여 목욕을 하게 해주고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해 주는 것, 그것이 부모이고 가정”이라고 말한다.

이 세상에서 사는 일도…… 한바탕 펼쳐놓고 살다가 어느 날 누군가의 부름에 놀던 것, 지녔던 것들을 그대로 놓아두고 황황히 떠나가게 되는 것이라는 뜻일 게다.

마흔이 된 사람에게도 봄이 찾아온다는 것은 기적이다(피천득)…… 설혹 잘못 들어 선 길이라는 것을 깨달아도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와 있다는 것, 인생의 성패는 이미 판가름 난 것이 아닌가라는 성급한 판단에 초조해지기도 하고 잘못 끼워진 첫 단추가 이제야 확연히 보이는가 하면…… 게다가 한 인간으로서의 내가 무엇이며 어디에 서 있는가라는 실존적인 물음 앞에 피할 도리 없이 맞서야 하기 때문이다.

한껏 비운 손이 충만하고 놓음이 진정한 소유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허전함과 쓸쓸함을 얼마나 더 견디고 겪어야 해방되는 거냐고, 종내 그런 평온이 오기는 오는 것이냐고 물으니 어머니는 그런 게 인생이라고 담담하게 말씀하신다.

‘불확실성에 머물 수 있는 능력’이 아직 제게 남아 있는 가능성이라고 다행스럽게 여기는 마음이 있습니다. ……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사회적, 실존적 의미에 대한 천착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요. …… 냉정하게 말하자면 우리가 종종 빠져드는 절망과 회의 역시 하나의 도피처가 아니던가요?

똑같이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매일의 삶이 창조적이지 못하다고 불평하지만 또한 그러한 일상이 구원이 됨을 알지 않는가.

내게 주어진 삶의 조건에 정직하고 충실하지 않다면 어떤 높은 가치도, 진정한 아름다움도 볼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사랑하는 관계가 그러하듯 문학은 내 안의 천국이고 지옥입니다. … 한 단어 한 단어가 이어져 문장을 이루고 그것이 정신의 결정체가 되고 보이지 않는 것들에 형체를 주며 전달이 되고 타인과 공유하는 어떤 것이 된다는 것이 신기하고, 문학을 생각할 때마다 남모를 기쁜 비밀을 지닌 듯 든든하고 행복했습니다.

문학 활동을 하면서 한 번은 느꼈으리라 보는 재미있는 부분이 있다.

여담입니다만 얼마 전에 화장품 회사 사장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분이 제게 물으셨습니다.

“요즈음 어떤 걸 쓰고 계십니까?”

“제대로 쓰기나 하나요.”

“그래도 열심히 쓰셔야죠. 이제 나이도 있으시니 얼마큼 관심을 갖고 성의를 갖느냐에 따라 천지 차이가 납니다. 포기하지 마세요…….”

“그러게 말예요. 시간이 얼마나 남아 있다고…….”

“이런 거 부지런히 쓰세요. 봄철에 자칫 방심하면 피부가 엉망이 되어 버립니다.”

그분이 주시는 화장품을 받으면서 비로소 저는 그분은 화장품 얘기를 하시고 저는 글 쓰는 얘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매일매일 수많은 물건들을 쓰고 도구를 사용하는 제게 ‘쓰기’란 단지 ‘글쓰기’만을 뜻하는 것이었으니 참 깊고 오랜 중독이구나, 더 이상 도망갈 길이 없구나 싶어 쓴웃음이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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