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여자 사랑하기/빌헬름 게나찌노
(초판 1쇄 발행/2006년 6월 30일)
두 여자 사랑하기는 한국에 처음 소개된 빌헬름 게나찌노의 작품이다. 작품은 가정적이며 안정된 직장을 가진 잔드라와 예술적인 감각이 풍부한 가정방문 과외교사인(예술가로서는 실패한) 또 다른 한 여자인 유디트를 두고 과연 누구를 선택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주인공의 갈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작품의 초기부터 둘 중 한 사람을 선택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하지만 결국 선택하지 못하고 사랑의 혼돈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한다.
주인공은 어쩌면 두 여자는 내면에서 갈등하고 있는 주인공 자신을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회가 정해놓은 정상적인 과정을 밟으며 성공한 사람들과 정해진 과정에서 일탈하여 비정상으로 보이는 사람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스스로에게서 그 양면을 경험하고 있을 것이다.
“잔드라가 알고 싶어 하는 것은 단지 그녀가 선택한 남자가 이토록 멋진 말을 늘어놓을 수 있다는 것뿐이다. 잔드라는 아무것도 모르고 내 말을 믿는다. 이럴 때 나는 속으로 그녀를 조롱하기도 한다.” 반면 유디트는 실질적으로 그를 배려해 주는 점은 잔드라에 비하여 소홀하지만 유디트와 함께 있을 때는 실제로 아는 이야기만 말하는 것이 가능하며 그럼으로써 그의 진정성을 유지시켜 준다.
두 여자와 한 남자의 삼각관계는 파시즘적 종말론 쎄미나의 강의에서 암시되고 있다. “파시즘적인 질서의식의 전조는 공적인 공간에서 개인에 대한 조심성과 존중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너지면 단지 개인적인 특성이나 특별한 이력 때문에 손가락질 당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게다가 손가락질 당하는 사람들 스스로는 이런 사태의 미묘하고도 위험한 성질을 간파하지 못합니다. 동성애자들이 커밍아웃을 하는 순간에는 아무도 그 행위가 그들에게 이득이 될지 말할 수 없지만 이 행위가 일어난 후에야 비로소 규범이 반격을 시작하니까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합리화 과정을 겪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에 동조하는 집단 속에서는 그것이 정상적이지만 그렇지 않은 집단에게 비춰지는 그들의 행위는 극히 비정상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불교적인 입장에서의 종말론은 과거에 쌓은, 그러니까 전생에 쌓은 업 또는 공덕에 따라서 다양하게 다시 태어나는 윤회에서 벗어나 영원한 평화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을 말한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야기하는 요한계시록도 마찬가지다. 사실상 산다는 게 불가능해 지는 어느 날, 신이 나타나 새로운 세상을 창조한다는 것. 그래서 신의 판결에 따라 선택된 자들만이 영원한 삶을 누린다는 것. 결국 나날이 늘어나고 있는 사회문제에 정면으로 부딪혀 살아가고 있는 유토피아를 꿈꾸는 현대인들의 공통된 생각일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기존의 질서를 반박하는 새로운 이념이 생겨나고 그 둘이 서로 갈등하면서 새로운 대안이 마련되는 과정을 반복해 왔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 구성원들은 혁명이 일어나 완전히 사회가 뒤바뀌지 않고는 변화에 그렇게 민감하지는 않을 것이다. “연거푸 부정을 해도 결국 긍정으로 끝나버리는” 착란의 변증법은 잠시 또는 전 생애에 걸쳐서 일탈에 빠져든 사회 구성원들에게 도피처를 마련해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시 행정부에서 마련한 “여행을 떠나지 않은 시민들을 위한 문화 행사”에는 심심한 아이들과 휘청거리며 의자에 앉는 퇴직자들, 그리고 노숙자 몇 명과 그들의 퇴락한 여자들과 개들이 참석한다. 요한계시록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종말의 장면”이다.
책의 많은 부분에서 일탈자들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차라리 책의 제목에서 말하는 “두 여자”는 책의 내용과 별개의 모습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주인공 자체가 일부일처제의 기존 질서를 일탈하였으며, 주인공이 먹다 남긴 스파게티를 먹는 걸인이나 지하철역으로 가던 중 만난 검은 천을 덮어쓴 늙은 거지여인 등은 지나치기 쉬운 사회의 단면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선진국이며 복지국가라고 자처하는 사회에 묻혀있는 사회적 현상을 소설을 통하여 들추어내는 의도는 아닌가.
누군가에 의해 정해진 틀 속에서 꼭두각시처럼 일하기보다 스스로 질서를 깨고 밖으로 나와 버린 사람들. 휴가철이 되면 여행을 가야만하는 질서를 깨고 휘청거리며 문화행사에 참석한 퇴직자들은 어쩌면 요한 계시록에서 제시하는 신의 선택을 받은 자들은 아닌가? 또한 불교적 입장에서 볼 때 윤회를 그만두고 니르바나의 세계로 들어간 사람들은 아닌가?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은 지금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질서를 규정지은 자들은 과연 어떤 존재인지 의심스러운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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