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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백제 고도 부여를 찾아서

by 1004들꽃 2012. 6. 14.

백제 고도 부여를 찾아서(2012. 6. 9 - 2012. 6. 10)


2012년도 문학기행은 총회때 결정된대로 부여를 향했다. 부여가 내 걸고 있는 화두는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즉,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 문장 속에 부여의 모든 문화적 성격이 함축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아직도 땅 속에 잠자고 있는 문화의 자취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것이며 지금까지 발견된 정설을 뒤엎을 수 있는 것들도 상당히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나당연합군에 의하여 패한 나라의 역사는 통일신라에 의하여 새로 씌어졌을 것이며 그 화려한 문화는 이미 1,300여 년 전에 세상에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희망이 있는 것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한 발굴은 계속될 것이며 그 발굴에 의해서 그 옛날의 모습들은 사람들에게 다시 새로운 모습을 드러낼 것이기 때문이다.


고도기행을 위한 여행은 설렘을 안고 시작되었고 초여름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산과 강과 바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낯선 고장으로 달려가는 것은 언제나 새롭고 행복하다. 글을 통해서 만난 사람들은 그들만의 개성이 강하기도 하거니와 관광을 위한 여행과는 그 모습과 성질이 다르다. 모두가 생각하는 방식이 다르고 다녀온 곳에 대한 스케치와 개별적으로 느낀 점을 각자 자기만의 문학세계로 끌어넣으려는 작업이 함께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 작업이 어떤 방식으로 흘러가게 될는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다양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올 것은 틀림없기 때문에 그 또한 설레는 것이고 행복한 일임에 틀림없다. 일행들은 마이산이 쳐다보이는 진안휴게소에 도착하여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여행을 위해 일찍 일어났던지 모두 커피판매점 앞에 모였다. 커피를 마시며 잠시 한담을 하고 다시 부여를 향해 출발했다.


부여로 들어서면 백제금동대향로를 형상화한 구조물을 설치한 교차로를 만난다. 이어서 백제 후기의 역사를 장식한 성왕상, 그리고 부여군청 앞에 우뚝 서 있는 계백장군기마상을 만날 수 있다. 부소산성에서 남쪽으로 큰 주작대로를 따라가면 인공으로 조성한 궁남지가 있고 도성의 동쪽 외곽으로 나성을 쌓았는데 나성의 외곽에 왕족의 무덤을 조성했다. 서쪽으로는 백마강이 흐르고 있어 자연적으로 해자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나성을 쌓지 않았다. 도성을 쌓기 위해 자연 조건을 충분히 활용하는 지혜를 엿볼 수 있다.


부여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한 시 가량. 여행 전에 미리 부여군청 직원과 통화하여 부탁한 관광해설사와 만나 구드래 공원 옆에 조성된 식당거리에 있는 향우정 식당에서 점심식사 시간을 가졌다. 첫 만남이라는 어색함도 잠시, 막걸리가 오고가는 동안 서로 어울리는 일행이 되었고, 부여에 대한 정보를 미리 살펴보았지만 요소요소에서 직접 해설을 듣는 것도 괜찮은 일이라 생각되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첫 번째 목적지인 능산리 고분군을 향했다. 고분군은 말이 없다. 현재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모습은 사료에 의한 복원일 뿐이지 그 모습 그대로는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증에 의해서 무덤의 크기나 형태를 추측해 낼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역사학자들의 노력이 있었다는 것이고 관광객들이 그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역사를 인식하는데 있어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고분의 주인은 알 수 없고 고분의 이름은 고분의 위치에 따라 이름 지어졌다. 다만 사비시대 백제 왕족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동쪽의 윗부분에 있으면 동상총, 중앙의 아래에 있으면 중하총 등 7기의 고분은 각자 서 있는 위치에 따라 자기만의 고유한 이름을 지어 갖고 있었다. 그 시대의 고분들은 대개 이런 식이어서 무덤에서 발견된 유물에 따라 이름이 붙여지기도 했는데 금관이 출토되었다고 하여 금관총, 천마가 그려진 말다래가 발견되었다고 하여 천마총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기도 하였던 것이다. 사비시대 왕족의 무덤은 도굴이 심했던 모양이다. 그만큼 무덤 속에서 발견된 부장품이 없었기 때문에 위치에 따라서 이름이 붙여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당 연합군에 패해 중국으로 잡혀간 의자왕과 그의 아들 융. 그곳에서 그들은 생을 마감했다. 긴 시간이 흐른 뒤 1995년 중국 낙양에서 의자왕과 융의 묘역으로 추정되는 지역을 확인했고 2000년에 와서야 이곳 능산리 능원에 영혼을 모시게 되었다. 당시 국가적 시책사업으로 새천년을 맞이하면서 자치단체별로 많은 사업을 추진하면서 분주했었는데 이 사업도 그 시책의 일환이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어쨌든 백제의 문화와 역사를 연구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며, 백제 후예들의 자긍심을 높이는데도 일조할 것으로 생각된다.


능원 아래로 넓게 펼쳐진 잔디밭은 평온하게 보였다. 통일에 의하여 신라라는 땅이름을 갖게 되었지만 땅에서 솟아나는 문화와 하늘을 향해 펼쳐지는 그들만의 정신적 가치는 없어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문화와 정신은 자연스럽게 바람을 타고 신라와 일본, 중국 등으로 퍼져 나가고 다시 바람을 타고 다른 색깔을 가지고 다른 문화와 혼합된 문화가 흘러왔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서도 백제문화의 향기를 맡을 수 있고 백제 지역에서도 다른 지역의 문화적 향기를 맡을 수 있는 것이다. 여행에서 남는 것이 사진이라고 하던가. 회원들은 여기저기서 각자의 포즈를 취하고 사진 찍기에 바빴다.


고분군을 나와 다시 구드래 공원 옆에 있는 부소산성으로 향했다. 부소산성은 반달 모양의 언덕에 지어졌다고 하여 반월성이라고도 한단다. 또한 금강이 부여 쪽으로 오면서 그 이름을 백마강으로 바꾸어 부여 서쪽을 반달 모양으로 핥으며 휘어 감는다. 지조를 지키기 위해 지금의 낙화암에서 뛰어 내려 한 송이 꽃이 되었던 궁녀들의 한을 달래듯 백마강은 아직도 슬픔에 젖어 있는 듯하다.


부소산성으로 들어가 성충, 흥수, 계백의 세 충신을 모신 곳, 삼충사를 먼저 들렀다. 삼충사에 모신 세 사람의 초상을 보면서 계백과 김유신의 황산벌 전투를 떠올린다. 삼충사를 나와 나뭇잎으로 터널을 이룬 산책길에 들어섰다. 초여름 뜨거운 햇살을 가려주는 나무그늘은 회원들의 발걸음을 상쾌하게 해 준다. 왕자들이 산책을 하였다는 길을 따라 태자골 약수터에 도착한 회원들은 모두 약수를 한 바가지씩 마시고 더위를 씻어내고 부여 시가지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반월루에 올랐다. 궁남지까지 이어주는 주작대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지금은 자동차길이지만 당시로서는 도읍의 중심을 잡아주는 주축으로서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서쪽으로는 백마강이 부여를 감싸며 휘돌아 가고 백마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로 자동차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사실 노래 가사에 나오는 백마강과 금강의 다른 이름으로 변신한 강의 이름을 연결 짓지 못했었다. 강의 이름을 새롭게 명칭지우는 그들의 여유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산들로 둘러싸인 경상도 지방과는 달리 낮은 야산과 평야로 이어진 풍족함에서 나온 것일까. 산과 산으로 이어져 가쁘게 치닫는 땅의 거친 성격과는 달리 완만한 선으로 여유롭다. 느리게 빠져 나오는 충청도의 말씨도 그에 연유한 것일까. 반월루를 내려와 낙화암으로 가는 중 희귀한 현상을 볼 수 있다. 연리지! 가까이 있는 나무가 자라면서 서로 맞닿아 한 나무가 되는 현상. 이곳은 진정한 연리지는 아니고 한 나무에서 뻗어 나온 가지가 다시 서로 맞닿아 하나가 된 것이다. 어쨌든 얼마나 서로 간절하게 그리워했으면 하나가 되었을까. 연리지를 지나 낙화암으로 가면 백화정 옆에 큰 소나무가 세력을 왕성하게 뻗치며 서 있다. 바로 낙화암 천년송이다. 소나무 앞에 한 편의 시가 걸려있다.


낙화암 천년송

 

남부여국 사비성에 뿌리 내렸네
칠백년 백제 역사 오롯이 숨 쉬는 곳
낙화암 절벽 위에 떨어져 움튼 생명
비바람 눈서리 다 머금고
백마강 너와 함께 천년을 보냈구나
세월도 잊은 그 빛깔 늘 푸르름은
님 향한 일편단심 궁녀들의 혼이런가
백화정 찾은 길손 천년송 그 마음

 

 

백마강 상류쪽에는 4대강 살리기의 일환인 부여보가 설치되어 있다. 보 설치로 인하여 생태계의 변화는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백마강의 형태가 인위적으로 변해가는 것은 어쩐지 석연찮은 느낌을 준다. 더 좋은 환경이 되도록 기대하는 수밖에 도리 없는 일이다.


부소산성 탐방의 마지막, 고란사를 향했다. 고란사에는 고란초와 고란약수가 유명하다. 고란약수를 마시면 삼 년씩 젊어진다고 하니 너무 많이 마시지 말라는 관광해설사의 당부다. 젊어지면 가족이 못 알아보고 후배가 반말을 하게 된다고 하니 많이 마실 수 없는 노릇이다. 고란사를 둘러보고 여자 회원들은 유람선을 타고 백마강 구드래 나루터로 향했고, 남자 회원들은 걸어서 입구 쪽으로 나왔다.


첫날 마지막 목적지 국립부여박물관으로 향했다. 청동기 문화, 금동대향로 등 발굴된 유적들을 둘러보고 밖으로 나오니 해가 서쪽으로 지고 있었다. 박물관에는 다음날 둘러보게 될 유적지의 모형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시대별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토기, 불상 등이 다양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특히 해설사의 말을 빌자면 금동대향로에 새겨진 코끼리는 인도코끼리라는 것이다. 그만큼 교역이 활발했다는 증거가 될 것이고 향로에 새겨진 다양한 모습들은 그림으로서 후세들에게 백제의 찬란했던 문화를 말하고 있다. 그 말은 현재도 진행형이어서 세월이 흘러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유적들이 발굴된 경우 또 어떤 식으로 이야기할는지 아무도 모른다. 다만 잠재되어 있는 많은 일들이 차근차근 밝혀질 것이고 향로에 새겨진 모습들은 그때마다 새로운 이야기들을 전해줄 것이다.

 

 

붉은 해가 하늘을 온통 붉게 물들이며 가로수 사이로 지는 모습은 산이 많은 고장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모습이다. 회원들은 삼겹살 파티가 준비되어 있는 숙소로 돌아왔다. 구드래공원 옆에 위치한 삼정부여유스호스텔의 팬션동이다. 하루종일 돌아다니며 마음속에 기대했던 것은 어쩌면 이 시간이 아니었는지 모른다. 거나하게 취해보고 하루 일과를 마감해 보는 시간. 회원들은 일사불란하게 준비를 했고 이야기에 취하고 술에 취하고 분위기에 취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기타소리가 들리고 기타소리에 흥을 맞춰 노래 소리가 흘렀다. 귀를 통해 들어온 기타 소리가 심장을 펌프질했고 뜨거워진 피는 입을 통해 소리로 흘러나왔다. 흘러나온 소리는 다시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흐르고, 마치 윤회의 시간을 만나 듯 고도 백제의 한가운데에서 천년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이번 문학기행 답사기행문을 쓰게 될 박현철 회원은 작년에 이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감싸 쥐며 시를 쥐어 짜내었고, 박래녀 회원은 원로답게 근사한 즉흥시 한 편을 물 흐르듯 흘려냈다. 취흥과 시흥에 젖은 회원들은 구드래공원 밤산책에 나섰다. 나뭇잎 사이로 가로등 불빛이 깜박였고 청동으로 만든 조각품들이 가로등 불빛을 받아 야릇하게 다가왔다. 밤산책에서 돌아온 회원들은 다시 술자리에 앉았고 시간이 지나면서 한사람씩 한사람씩 자리를 떴고 어느새 모두 깊은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다음날 웅성거리는 소리에 눈을 뜨니 새벽 6시. 부지런한 회원들은 벌써 새벽 산책길에 나섰고, 새벽잠이 많은 젊은 회원들은 잠자리를 부여잡고 있는 모양이었다. 엊저녁에 이야기한대로 궁남지를 둘러보기로 했다. 궁남지를 둘러보고 아침 9시 30분에 해설사를 만나 바로 다음 목적지를 향해 가기로 했던 것이다. 새벽의 궁남지는 차분하게 내려앉아 있었고 혹시나 안개가 내려와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생각은 생각만으로 충분했고 안개는 끼어있지 않았다. 아직 꽃잎을 열지 않은 연꽃은 수줍은 듯 웅크리고 있었고, 연잎은 아침 이슬을 머금고 청아한 모습으로 가늘게 흔들렸다. 숙소에서 궁남지까지는 걸어서 왕복 약 1시간정도 걸렸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기다리는 동안 “사람과 자연이 함께하는 아름다운 문학기행”이라는 현수막을 내 걸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해설사가 도착한 시간은 9시 32분. 회원들의 의견을 물어보니 다시 궁남지로 가자는 것이다. 가지 못한 회원들도 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다시 궁남지를 향했다. 백제 무왕시대에 인공호수로 축조되었다고 하나 지금의 모습은 근래에 와서 다시 복원한 호수다.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사기에 의하면 지금보다 그 규모가 훨씬 컸다고 하니 당시 사람들의 배포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다음은 문학기행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신동엽 시인의 생가와 시비 탐방이다. 신동엽 생가 서재 문 위에 “생가”라는 시가 걸려있다.

 

생가

 

임병선


우리의 만남을
헛되이
흘려버리고 싶지 않다

 

있었던 일을
늘 있는 일로
하고싶은 마음이
당신과 내가
처음 맺어진
이 자리를
새삼 꾸미는 뜻이라

 

우리는
살고 가는 것이 아니라
언제까지나
살며 있는 것이다


 신동엽 시인의 미망인 임병선 여사가 쓴 글이다. “언제까지나 살며 있는 것이다”라는 말은 정녕 헤어짐은 헤어짐이 아니라 언제까지나 마음속에서 함께 생을 걸어갈 것이라는 절실함과 여유가 섞어진 마음이 여운으로 다가옴을 느낄 수 있었다. 시내에서 서쪽으로 떨어져 있는 신동엽 시비에는 “산에 언덕에”라는 시가 새겨져 있었다. 시비 옆 소나무 숲속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정림사지 박물관과 정림사지 오층석탑. 백제의 사찰은 1탑 1금당이라는 형식의 가람배치를 고수했다고 했다. 이러한 배치형식이 일본에서도 나타나는 것을 볼 때 일본은 백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정림사지 금당에는 석불좌상이 있는데 오른손으로 왼쪽 검지를 감싸 쥔 부처로 비로자나불이라고 한다.
참고적으로 석가모니불을 모신 금당은 대웅전, 비로자나불을 모신 금당을 대적광전 또는 비로전, 화엄전 등으로 부르며, 아미타불을 모신 금당은 무량수전이라 부르고 있다고 한다. 더 자세한 것은 별도로 공부해야 할 것이다.
정림사지 박물관에서는 정림사지의 모형도를 볼 수 있다. 보통 사찰터에서 발굴한 초석의 크기에 기초하여 기둥의 두께 길이 등을 산출하여 사찰의 규모를 계산해 내고 당시의 건축 양식 등을 토대로 옛 모습을 복원한다고 한다. 상당히 과학적인 작업이 아닐 수 없다. 박물관에는 그 외에도 불교가 전파된 경로 등 사찰과 관련된 자료들을 볼 수 있다. 학교 다닐 때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외우기만 했던 마라난타의 불교 전파 경로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나볼 수도 있다. 박물관을 나와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우뚝한 모습에 반한다. 백제문화를 함축적으로 말하고 있는 문장. “소박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는 의미를 그대로 드러내주는 탑이다. 백제문화의 대표성을 띠는 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목탑의 흔적을 그대로 가져온 석탑이기에 목탑과 석탑이 공존하는 세계를 보여준다.
정림사지 탐방을 마치고 점심식사를 위해 백제문화단지 부근에 있는 독립로식당으로 향했다. 여행지 주변의 특성을 모두 살린 식당으로 상당히 큰 규모의 식당이었다. 그런데도 식당 주인이 모자라는 부분이 없는지 불편한 점이 없는지를 일일이 살피며 미소를 잃지 않고 직접 챙기는 모습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근처에 있는 백제 문화단지로 들어섰다. 새롭게 단장된 새로운 곳. 경주의 보문단지와 같이 인공적으로 조성한 고도의 모습이지만 고증에 의하여 새롭게 조성된 곳이기에 하늘 아래 다시 서겠다는 취지를 실감케 해주는 작업이라고 보아야할 터였다.


정양문을 지나 천정문을 지나고 다시 천정전을 만나게 된다. 마치 중국의 천안문을 들어선 것처럼 웅장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남북으로 연결된 이러한 양식은 백제의 문화인지 외부로부터 도입된 양식인지는 알 수 없으나 백제는 백제 나름대로 그 양식을 재구성했을 것이다.  백제는 서역으로부터 직접 불교를 받아들였고 고구려는 북방으로부터 받아들였다. 또한 신라는 백제에서 건너갔으니 동양 전체가 비슷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사비성 오른쪽에는 능사리사(능사)를 복원해 놓았는데 오층목탑의 모습은 웅장하게 다가온다. 안으로 들어가면 대웅전이 보인다. 석가모니불을 모셔놓은 금당이다. 오층목탑과 마찬가지로 불상도 목조불상이 모셔져 있다. 오층목탑은 절의 입구에 배치해 놓은 두 개의 연못에 투영된다. 목탑의 모습이 연못에 내려앉은 모습이 아지랑이처럼 흔들린다. 사찰에 들어서기 전에 연못에 투영된 목탑의 그림자를 보고 스스로의 마음을 살펴보라는 의미는 아닐까.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 사찰로 들어오라는 의미일 것이라 생각해 본다.


새로 만들어진 사비궁 뒤쪽에 있는 제향루로 올라가면 백제 초기 수도인 위례성과 군관들의 거주지, 백제 초기의 생활문화마을 등을 복원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어느새 회원들은 지쳤는지 소금에 절인 배추처럼 푹 퍼졌다. 더운 날씨에 강행군을 했으니 그럴만도 하다. 회원들 중에 시원한 막걸리 한잔이 그립다는 제안이 나온다. 만장일치로 의견이 모아져 주막촌으로 향했다. 막걸리를 마시면서 마지막 행선지인 송국리 선사취락지로 가느냐 마느냐를 두고 의논했는데, 피곤하지만 둘러보고 가면 시간이 지난 다음 후회하지 않을 것이란 의견이 지배적이어서 둘러보기로 했지만 백제역사문화관을 관람하며 시간을 많이 보내는 바람에 송국리 선사취락지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백제역사문화관에는 오층목탑, 천도를 위한 황제의 이동 행렬, 백제인들의 생활상 등을 재현해 놓았다. 또한 무령왕릉의 내부 모습과 부장품들을 재현한 모습은 가히 사실적이었다. 무덤을 막기 전에 촛불을 켜서 산소를 없애 진공상태를 유지하도록 하는 지혜도 엿보였다.

 

이틀 동안의 긴 여정은 이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이틀 동안 정성을 다해 백제 유적지에 대하여 해설을 해 주신 관광해설사 분께 감사하는 마음이다.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대하여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본받을만했다. 어느 곳에서도 설명을 빠뜨리지 않으려는 열정적인 모습이 아름다웠다. 나 자신은 과연 이렇게 열정적인 모습으로 세상을 보아왔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약 1,400여 년 전 그 화려했던 문화가 다시 부활하는 시간들. 그 시간은 진부하고 지루했다. 사업의 착수에서부터 기공식을 하기까지 거의 5년의 세월이 흘렀고 지금의 모습을 보이기까지 총 17년의 세월이 흘렀다. 짧다면 짧은 세월이지만 길다면 긴 세월이다. 어떻게든 이런 사업을 구상한 사람들이 있어서 과거와 현재는 연결되는 것이다. 한 나라의 수도로서 군림했던 지역이 1,000년의 역사 속에서 거의 사라지다시피 한 것에서 출처를 알 수 없는 비애를 느끼기도 했지만 다시 시작하려는 모습들은 희망을 준다. 아무것도 없었던 곳에서 지금 세상이 있는 것이 아니고 똑같은 땅 위에서 삶을 이어온 사람들이 현재 그 땅 위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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