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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마음을 일깨워주는 책- 그대 뒷모습

by 1004들꽃 2009. 2. 24.

글을 쓴다는 것은 마음의 정화작용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뭔가 허전하고 마음이 텅 빈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는 컴퓨터를 켜 본다. 삑 소리가 한번 나면서 컴퓨터가 정상이라는 신호를 알려주고서는 부팅이 되면서 낯익은 화면이 모니터에 자리잡는다.

컴퓨터 화면에다 무심코 써 내려가면서 지난날을 되새겨 보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어느샌가 가식없는 나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 아니라 뭔가 만들고 치장하게 되고 마치 아이들이 장난감을 조립하듯 단어를 조립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책상을 정리하다가 무심코 책꽃이에 있는 책 한 권을 꺼내들었다. 정채봉 선생의 첫 에세이 “그대 뒷모습”이다. 정채봉 선생은 1973년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꽃다발󰡑�이 당선되면서 문단에 데뷔하였으며 '대한민국 문학상', '새싹 문학상'을 받았다. 작품집으로 <초승달과 밤배>, <멀리가는 향기>, <내 가슴의 램프>, <오세암>, <하늘새 이야기> 등이 있으며 아쉽게도 지난 1월 9일 향년 55세로 우리들 곁을 떠났다.

<그대 뒷모습>은 그가 월간󰡐�샘터󰡑�편집기자로 입사해 23년간 몸담았던󰡐�샘터󰡑�사에서 ‘정채봉 전집’을 발간하면서 2001년 5월 3일 재출간한 것이다.

그의 글을 대할 때면 언제나 동심의 세계로 젖어든다. 또한 그의 책들은 한결같이 책꽂이에 꽂아두고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책을 펼쳐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가는 동안 가슴속에서 지난날의 추억을 새록새록 일구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금새 읽어 버리기엔 너무 아까워서 천천히 곱씹어 가며 읽어야하는 책이다. 화려한 치장도 없으며 읽는 이로 하여금 감동시키기 위하여 애를 쓴 흔적도 없다. 그저 읽어 내려가는 동안 마음이 정화되어가는 책이라고 말하고 싶다.

조그마한 들풀이라든지 도심지에 핀 민들레 한 송이에도 기뻐하는 소년같은 마음을 통하여 현대인들에게 찌들린 생활 속에서 잃어버린 양심을 되찾게 하는 감동이 있다.

<그대 뒷모습>은 어린시절과 청년기 그리고 현대를 살아가면서 느낀 이야기들이 잔잔하게 그려져 있다. 문장 하나하나에 담겨 있는 함축된 의미들로 인하여 수필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한편의 시를 읽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책 속에서 잔잔히 이어져 나가는 가식없는 이야기들은 그동안 애써 시어를 찾아내어 억지 끼워맞춤을 해 엉터리 글을 써 왔던 나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대 뒷모습>은 다섯 개의 장으로 나누어 58편의 작품을 담았다. 책 속에 들어있는 감동 몇 가지를 인용하는 것으로도 이 책에 대한 이야기는 충분할 것 같다.

‘그대 뒷모습’ 에서는 요즘같이 내용보다는 겉포장이 중시되고 실속보다는 이름값을 들추어 따지는 세상에서 모두가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사를 간 집의 전 주인이 남기고 간 편지 한 장이 소개된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번에 선생님이 이사해 오신 그 집에서 7년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날 사정상 선생님 댁이 오시기 전에 저희가 떠난 관계로 서로 상면할 기회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제가 오늘 펜을 든 것은 그 집에서 살아 본 사람으로서 일러 드리고 싶은 두어 가지가 생각나서입니다. 먼저 건넌방에 연탄 가스가 한 번 샌 적이 있었던 사실입니다. 물론 경미한 일이었고 수리도 곧바로 했습니다만 혹시 또 모르니 가구를 들여놓기 전에 한 번 더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어쩌다 부엌 하수구가 막힐 때도 있었는데 그것은 부엌 위치상 하수도 배관이 휘어져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럴 땐 부엌 뒤꼍에 있는 작은 돌무더기를 헤치고 뚫으면 큰 힘이 들지 않습니다.

옆에서 집사람이 또 하나 더하는군요. 아주머니께서 찬거리를 사실 때는 골목시장의 끝에서 두 번째 있는 할머니 가게에서 사는 것이 싸고 맛있다 합니다. 특히 그 할머니는 부모 없는 오뉘를 공부시키면서 근근이 살아가는 분이라 하는군요

그럼 선생님 댁에 두루 편안하시고 즐거운 나날이기를 기도드리면서 이만 줄입니다.

이 편지를 읽고서는 한참이나 멍하니 책을 들고 있어야만 했다. 이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서 ‘앞모습보다는 뒷모습이 아름다운 이들의 이웃이고 싶다.’ 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현재 ‘샘터’사에서 그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그의 딸 리태씨는 1999년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재학 중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화󰡐�굴뚝에서 나온 무지개󰡑�로 등단했다. 책의 87페이지로 가 보면 제목이 ‘리태’이다. 그 중 한 대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리태가 유치원 선생님으로부터 하느님이야기를 들었다면서 불쑥 물었다.

“아빠 하느님은 어디에 계셔?”

나는 그때 풀꽃들에 몰두해 있었으므로 이렇게 무심히 대답했다.

“하느님은 이 작은 풀꽃 하나하나에도 계시단다.”

그러자 느닷없이 리태가 이런 말을 했다.

“아빠, 그럼 하느님도 이 냉이처럼 작고 이쁘시겠네.”

리태의 이 한마디는 곡괭이가 되어 굳고 견고한 하느님에 대한 내 고정 관념의 벽을 쿵 소리가 나게 허물었다.

‘꽃뫼의 들녘길에서’ 에서는 시인 정호승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너무도 당연시 되어가고 있는 사회의 고정관념을 깨려고 시도하는 듯 보인다.

나는 당당함을 사랑하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문인 가운데 시인 정호승과 소설가 이균영을 좋아하는 이유도 이들의 당당함 때문이다. 정호승은 성당에서 결혼식을 마치고 신혼여행을 떠날 때 승용차 하나 준비하지 못할 처지가 아니었는데도 굳이 일반 버스를 타고 역으로 향했었다. 후일 결혼한 이균영도 교수 신랑인 처지에도 결혼식장을 향해 올 때 가족들을 이끌고 일반버스로 나왔었다.

생활의 한 실례가 이렇거늘 하물며 문학에 있어서의 그 당참은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 아닌가. 작품으로 구걸하고 살기보다는 차라리 필을 꺾고 말 것이며, 정신의 매춘으로 부를 누리기보다는 눈 부릅뜨고 얼어 죽기를 바랄 것이다.

10년전 제주도에 신혼여행을 다녀올 때다. 김해공항에 내려 리무진 버스를 타고 마산역에 내려 의령으로 가는 마지막 버스를 놓치지 않기 위해 무거운 짐을 들고 아내는 분홍치마에 노랑저고리를 입고 헐레벌떡 시외버스주차장으로 뛰어가 간신히 막차를 잡아 탔던 생각이 난다. 그때는 왜 택시를 탈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책의 마지막 부분인 ‘마음의 문을 열고’에서 이렇게 맺고 있다

돈을 나뭇잎처럼 보시오

감투를 물거품처럼 보시오

세상이 좋다는 것을 그렇게 보는 사람은

어떤 불행도 그를 보지 못할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