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에 오르면
옛날 옛적에 거인이 산을 짊어지고 남산천 앞을 지나가고 있었는데 남산천에서 빨래를 하던 아낙네가 깜짝 놀라 “어머나 산이 움직이네!” 하고 소리쳤는데, 그 소리를 들은 거인도 덩달아 놀라서 산을 두고 도망쳐 버려 지금의 남산이 생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그때 빨래하던 아낙네가 말없이 빨래만 하고 있었다면 의령의 모습은 지금처럼 꽉 막힌 듯한 모습은 아니지 않을까.
하지만 남산은 남산으로 인하여 꽉 막힌 의령을 만든 것이 아니라 언제나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의령인들과 함께 희노애락을 같이해 온 산이라는 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어린시절 눈만 오면 버릇처럼 남산에 오르곤 했다.
책 속에 나오는 장면. 눈이 오면 토끼를 잡으러 쫓아다니는 모습을 흉내내고 싶었던 것이다.
남산 수월사를 조금 지나면 어느 높으신 분의 무덤인지 고분군으로 복원되어 웅장한 모습을 갖추고 있지만 그 시절에는 마치 관처럼 돌을 쌓아 사람이 드러누워 있을 정도의 공간이 있었고 주변에는 소나무들만 즐비하게 들어서 있었으며 가끔씩 부는 바람에 등골이 오싹하여 ‘나 살려라’ 하며 도망을 치곤 했다. 좀 지나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고분은 그 당시 도둑들에 의해 도굴되어 파헤쳐졌던 것이다. 고분군이라는 것은 책에서 배운대로 경주에나 가면 있는 것이라 생각한 시절, 한창 토끼몰이에 정신이 팔려 산을 헤매고 다니다 무덤 같은 것을 발견했으니 옛날 고려장의 풍습에 의해 노인들이 버려졌던 곳이라 생각했었다.
요즈음의 놀이터와 같은 아이들이 즐길 수 있는 마땅한 장소가 없었기 때문에 남산은 의령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가장 좋은 놀이터로 기억되고 있을 것이다.
여름이 되면 남산천은 풀장이 되었고 겨울이면 썰매장이 되었다. 괭이 하나 짊어지고 남산에 올라 능선을 따라다니며 칡덩굴만 보면 주변을 파헤쳤고 그러다 보면 무덤 앞까지 파 들어가기가 일쑤였다. 너도나도 칡뿌리 하나씩 손에 들고 입 주변에는 칡물과 흙과 땀범벅으로 산을 내려오곤 했다.
그리하여 우리들에게는 새로운 단어가 하나 만들어졌다. 그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남산 밑에’라는 말이다. 아이들의 머릿속에는 ‘남산 밑에’가 하나의 고유명사였었다.
지금은 충익사가 들어서 있지만 그때 당시 충익사 부지는 의령읍(당시 의령면)의 유일한 공설운동장이었고 옆에 있는 체육공원은 포도밭이었다. 고무재질로 만들어진 축구공 하나에 해가 지는 줄 모르고 운동장을 누비고 다녔으며 과수원에 열려있는 포도를 몰래 훔쳐먹다 혼쭐나게 도망을 치기도 했다.
방학이 되면 아이들은 새벽부터 이집저집 다니며 “야! 남산 밑에 가자!”라며 동네 아이들을 끌어모아 남산 밑으로 갔던 것이다.
이토록 ‘남산밑에’라는 말은 의령인들의 추억을 떠 올리는데 한 치의 부족함 없는 고유명사로 자리잡고 있다.
요즈음도 틈나면 남산을 오른다. 처음에는 가파르게 치고 오르다 보면 점점 완만해진다. 절을 지나고 고분군을 지나 얼마간 오르면 정상에 닿을 수 있다. 정상에는 얼마 전에 체육시설을 설치하여 간단한 몸풀기 운동을 할 수 있다.
어쩌면 오랜 세월동안 변화가 없는 듯 보이지만 세월은 많은 것을 변하게 만들었다. 산 입구에 체육공원이 만들어졌으며 충익사가 남산 주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등산로도 새롭게 만들어 졌으나 안타까운 것은 아이들의 방문이 드물어졌다는 것이다. 인구가 줄고 학생수가 줄어들고 학교의 숫자도 줄어들고 그나마 학생들은 상급학교 진학이라는 과제에 발목이 묶여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할 것이다.
지리산에 도로가 뚫리고 의령의 명산인 자굴산도 순환도로 개설공사로 한창이다. 의령 남산의 등산로도 언제부터인가 시멘트로 포장되었다.
길이 없어도 불편함이 없었고 산 속에서 전쟁놀이를 했던 남산도 그렇게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살아가며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지만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심정에서 아직도 ‘남산 밑에’라는 말을 쓰고 있다. 요즈음에는 ‘충익사에 가 보자’라는 말을 쉽게 들을 수 있지만 ‘남산 밑에 가 보자’라는 말은 아직도 향수에 젖게 하는 말이다.
어린시절, 청년시절, 그리고 성인이 되어서도 마땅히 갈 곳이 없으면 남산을 찾았다. 늦잠을 자고 일어나 자굴산에라도 가볼까 하는데 시간이 마땅치 않으면 남산을 오른다. 산을 오르며 생각을 정리하기도 하고 아무도 없는 산 정상에서 고함을 지르기도 하고 무료한 하루를 달래기도 하였다. 그토록 남산은 살아오면서 사색의 길이 되어 주기도 하였고 울적한 마음을 달래주기도 하였으며 무미건조한 생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기도 하였다.
지금도 가끔씩 남산을 찾는 것은 그 어린시절의 향수를 느끼고 싶은 마음에서인가 보다. 남산에 오르면 의령읍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내가 다닌 초등학교와 중학교, 아이들과 지지고 볶으며 살아가고 있는 집, 내가 다니고 있는 직장과 가끔씩 목을 축이던 술집과 들불지르며 다녔던 둑길과 모두가 떠난 빈자리에 홀로 서 있었던 그 옛날 젊은 청년의 모습이 눈가에 아른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