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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남도여행, 전남 곡성을 찾아서

by 1004들꽃 2013. 6. 18.

 

[의령문인협회 2013 문학기행]

 

남도여행, 전남 곡성을 찾아서

2013. 6.15∼6.16

 

 

 

여행의 시작

 

여행은 항상 떠나는 사람들에게 설렘을 안겨 준다. 뒤숭숭한 일상을 벗어나 잠시 여유를 가져보기 위한 것이고 또한 집을 떠나 낯선 곳에서의 하룻밤을 기대하며 더욱 설레는 것이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 하지만 각자 개성은 다르지만 특유의 고집과 글쓰기에 대한 열정은 완벽하게 다른 인간들 사이에서도 배려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것 아닌가.

고속도로를 따라 전라도 땅으로 가다보면 항상 쉬었던 곳. 섬진강휴게소에 잠시 들렀다 간다. 올해 문학기행의 목적지는 조태일 문학관으로 보아야 할 것이고 문학관 방문을 겸해서 태안사를 탐방하고 나오는 길에 섬진강 문화학교 김종권 남도사진 전시관을 방문하기로 했다. 또한 지난 정선 문학기행의 향수를 느껴보기 위한 레일바이크와 증기기관차 체험이 준비되어 있다. 축제는 끝났지만 아직도 여운이 남아 있는 장미공원 방문을 하루의 마지막 일과로 하고 그토록 기다리던 문학의 밤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지난 4월 문학기행을 위한 사전답사를 위해 방문했던 곡성으로 떠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별다른 기대감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가슴에 확 와 닿는 지명도 있는 지역도 아니고 역사적으로 가치 있는 뭔가가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아서 곡성이라는 지역을 방문하는 것보다는 마음 맞는 사람들과 함께 떠난다는 것에 더욱 초점이 맞춰지는 느낌이다.

하동과 구례 그리고 곡성은 지리산의 남쪽을 끼고 돌아 노고단의 서북쪽을 감싸고 돈다. 곡성에서는 동쪽을, 구례에서는 북동쪽을, 하동에서는 북서쪽으로 바라보면 노고단을 볼 수 있다. 노고단에서 뻗어 나오는 지리산의 기운을 느낄 수 있는 곳. 지난 4월, 눈을 뒤집어 쓴 노고단의 칼바람 때문에 몹시도 추웠던 날과는 대조적으로 6월 중순의 날씨는 거의 살인적인 더위로 보아도 좋을 만큼 후덥지근하고 따가운 햇살은 사정없이 온 몸으로 내리쬐었다. 그나마 첫날은 가끔 구름이 끼어 견딜만했으나 둘째 날은 모두 서로의 얼굴에서 기진맥진한 모습을 찾고 있었다.

 

 

조태일 시문학 기념관

 

태안사로 들어가면서 매표소 관리인에게 현전 스님을 만나러 간다고 하니 그냥 들어가도록 배려해 주었다. 태안사로 들어가는 초입에서 오른쪽을 돌아보면 조태일 시문학 기념관이 있다. 곡성 태안사에서 태어난 시인 조태일. 호는 죽형(竹兄)이다. 조태일 문학관 방문을 문학기행의 주목적으로 삼았으니 조태일 시인에 대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조태일 시인은 경희대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6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아침 선박〉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1969년 월간 시전문지 《시인》을 창간해 김지하, 양성우, 김준태를 배출했다. 1974년에 고은, 백낙청, 신경림, 황석영, 염무웅, 박태순 등과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창립하였고, 독재에 저항하다 여러 번 투옥되었다. 1988년에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민족문학작가회의’로 바뀌자 초대 상임이사를 맡았다. 1991년에 김현승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9년에 광주대학교 조교수가 되었고, 1994년에 예술대학 초대 학장이 되었다. 1999년 9월 7일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삼일장으로 계산하면 1999년 9월 9일이 출상일이다.

그가 등장하는 대부분의 사진과 수채화로 그린 초상화에는 담배가 함께 등장한다. 담배를 사랑하는 시인 조태일. 그가 피웠던 담배 연기를 따라 시들은 춤을 추었을까. 저항시인으로 살아가기 어려웠던 시절에 담배와 술은 세상을 견디게 해 준 버팀목이 되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특히 담배와 술은 그 당시 사람과 사람과의 연결고리로서 작용한 하나의 미덕으로 자리 잡고 있었을 시절은 아니었는지.

 

 

태안사

 

조태일 시문학 기념관을 나와 곧장 걸어가면 태안사로 들어간다. 들어가는 길목 초입에서 정심교를 만날 수 있다. 태안사까지 들어가기까지 세 개의 다리를 만날 수 있다. 정심교를 지나면 먼저 동리산문을 만나게 되는데 일주문은 아니다. 산문에는 하안거 구순결제기도를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하안거, 동안거 두 번의 결제기도. 입제와 회향의 과정을 겪고 다시 소통의 세계로 나올 것이다. 어쩌면 그 소통조차도 안거의 연장선 속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두 번째 다리 반야교를 지나고 세 번째 다리 해탈교를 지나면 태안사의 진정한 입구라고 할 수 있는 능파각을 만난다. 계곡의 물과 주변 경관이 아름답기 때문에 능파淩波라고 했다고 한다. 특이한 점은 다리와 금강문 그리고 누각을 함께 겸비한 건물로 이 다리를 지나면서 세속의 번뇌를 던져버리고 불교의 세계로 들어간다고 하니 숙연해지는 느낌마저 든다.

태안사는 통일신라 경덕왕 원년(742)에 이름 모를 스님 세 분이 세웠다고 전한다. 조선초에 태종의 둘째 아들 효령대군이 이곳에 머물렀던 인연이 있는 곳이다. 한국전쟁 때 많은 피해를 입어 지금 있는 건물은 대부분 복원된 것이다.

태안사 성기암에서 수행하고 있는 의령 용덕면 출신인 현전 스님을 만났다. 미리 약속을 하고 온 터라 반갑게 맞아 주었다. 문학기행의 첫 방문지가 태안사라고 하고 조태일 문학관, 섬진강 문화학교, 레일바이크 체험, 장미공원, 그리고 화엄사 등을 방문할 예정이라고 대강의 일정을 이야기해 주니 스님의 조용하면서도 놀라운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굉장한 여행이네요!”

그 한 마디가 감동으로 물결져 온다. 굉장한 여행! 참으로 우리는 굉장한 여행을 떠나온 것이다. 그 한 마디를 듣기 위해서 여행을 떠나온 것처럼 여행 전체가 꽉 찬 느낌이다. 아무에게도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어서일까.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은 그래서 나온 말인 것 같다. 그래서 우리들의 여행은 굉장해지기 시작했다. 여행 중 스님과 마주 앉아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절의 건축 양식이나 역사를 꿰뚫어 보는 것보다 절의 향기를 맡았다고나 할까. 절을 방문하는 것은 그 절의 외부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라 향기를 맡는 것이 오로지 절의 방문 목적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았다. 도량은 그저 도량으로 보아야 할 터이고 스님을 통해서 도량에서 풍겨져 나오는 향기를 맡을 수 있는 혜안을 가지는 것이 보다 중요할 것 같았다.

성기암에서 현전 스님과 작별하고 태안사로 들어간다. 일주문을 지나면 광자대사비, 승탑, 탑비 등 부도탑을 만나볼 수 있다. 대웅전과 해회당을 둘러보고 새로 만든 범종 앞에 섰다. 종의 표면에 임진년이라는 표기가 눈에 들어온다. 올해가 계사년이니 아마도 작년에 새로 만든 종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구리 색깔이 선명하고 종각의 단청도 선명하다. 연못 가운데 자리 잡은 삼층석탑도 새로 만든 듯한 돌로 만든 다리를 통하여 닿을 수 있다. 연못을 바다라고 본다면 바다의 한가운데 자리한 셈이다. 어디론가 흘러가고 싶은 탑을 석교가 붙들고 있는 형상으로 보아야 할까. 연못의 한가운데 두둥실 떠 있는 탑은 중생들이 탑으로 접근하기 전에 물로써 몸과 마음을 씻고 오로지 충만한 불심으로 다가오라는 뜻일 게다.

탑을 돌아서 내려오는 길 오른쪽에는 경찰 충혼탑이 있다. 1950년 6월 민족상잔의 비극이라고 해야 하나. 6.25때 희생당한 경찰들의 위패가 안치된 곳이다. 어째 충혼탑이라는 어감은 선뜻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누구를 위한 전쟁이었는지가 생각나서였을까. 형제간에도 서로 적이 되었던 그 전쟁에서 누구의 조국을 수호했는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 것이다. 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 사람의 조국은 각기 다른 것인가. 다를 수 있는 것인가. 그 전쟁은 단지 비극으로서만 기억될 뿐 조국이나 충혼 같은 단어들은 어울릴 수 없는, 아무리 섞어도 섞일 것 같지 않는 단어들이다. 그 배후에 누가 있었는지, 어쩌면 영원히 알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섬진강 문화학교 김종권 남도사진 전시관

 

태안사를 돌아 나오는 길에 폐교를 이용한 섬진강 문화학교 김종권 남도사진 전시관에 들르면 30년을 넘게 우리 산과 바다, 들, 그리고 꽃들을 사진으로 담아 낸 김종권 작가를 만날 수 있다. 특히 독도 사진작가로 명성이 난 작가로 독도에 한 번 들어가면 한 달 가량을 머물면서 사진을 찍는데, 무려 30번 이상 독도를 방문했다고 한다. 현재는 한국비경촬영단 단장으로 있으면서 섬진강 문화학교 교장으로 활동하며 한국의 아름다운 산과 들과 꽃을 담아내며 독도를 알리는데 앞장서고 있다고 한다.

시계바늘이 거의 세 시를 가리키고 있는 시간. 먼저 점심을 예약하러 간 회원들의 빨리 오라는 아우성 때문에 빨리 둘러보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기차마을, 레일바이크와 증기기관차 체험

 

레일바이크라고 하면 지난번 정선 문학기행 때 한밤 중 불쇼를 펼치며, 한 회원을 독거노인으로 만들었던 날들이 생각난다. 3월이라 쌀쌀했던 날씨에도 불구하고 어둠을 등에 지고 불을 턱에 받치고 삼겹살 파티를 했던 추억이 뭉글뭉글 솟아난다. 다음날 늦게 일어나 서둘러 레일바이크 역까지 갔었던 기억. 여치를 형상화하여 2층 건물로 카페를 만들어 놓았던 정선이었다.

증기기관차를 타기 위해 숙소로 정해 놓은 펜션 앞에 위치한 가정역에 도착했을 때 증기기관차는 간발의 차이로 떠나버렸다. 숙소에 짐을 풀어놓고 레일바이크를 타기 위해 침곡역으로 향했다. 침곡역에서도 마찬가지, 레일바이크 체험 마지막 시간이라 뛰다시피 가서 겨우 예매를 할 수 있었다. 시간들은 가까스로 일정들을 맞춰주고 있었다. 그 시간들 속에서 차곡차곡 일정들을 쌓아가고 있는 회원들. 마치 가야만 하는 여정 속에서 앞만 보고 걸어가는 나그네들처럼 시간을 등에 업고 그렇게 정해진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레일바이크 체험이 끝나고 마지막 증기관차를 타기까지는 약 한 시간 정도 남았다. 증기기관차 출발 시간은 6시 30분. 모처럼 자유시간을 얻은 셈이다. 회원들은 제각각 자기 시간을 가졌다. 무리지어 물에 들어가 노는 회원, 담배를 피우며 쉬는 회원, 노는 회원들을 카메라 속으로 끌어들이는 회원 등, 모두 제각각이었다.

증기기관차에 탑승한 회원들은 다시 동심으로 돌아간다. 추억의 교련복을 입고 승객들을 즐겁고 신나게 해 주는 반장 완장을 찬 안내원. 싸이의 강남스타일에 맞춰 꼬마들이 춤을 추도록 유도한다. 장난기가 발동한 아이들은 어느새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앉아서 구경하는 어른들도 박수를 치며 동조한다. 바로 뛰어 나가서 춤을 추고 싶은 회원들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수줍음이 더 강하게 작용했는지 뛰어나가는 회원은 없었다. 한 회원은 두고두고 후회할 일이었다고 후일담으로 이야기 했다.

 

 

곡성 섬진강 기차마을 장미공원

 

기차가 도착하고 아쉬움을 뒤로한 채 장미공원으로 향했다. 7시가 넘어서 도착했기 때문에 입장료를 내지 않고 장미공원에 입장할 수 있었다. 지체된 시간만큼 여행경비를 아낀 셈이다.

축제기간이 지난 터라 장미는 시들어가고 있었지만 석양과 함께 조화를 이루어 보는 이들로 하여금 황홀감을 안겨 주었다. 인공으로 만든 연못의 한가운데 소망정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모두 마음속에 소망 하나씩을 담고 소망정을 배후에 두고 사진 찍히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사진을 찍는 사람과 찍하는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 거의 200여 장의 사진을 찍는 동안 내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어쩌면 영원히 풀리지 않을 의혹이라고 해야 할까.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데 어째 사람들은 물을 분석하고 산을 파헤쳐 그 본연의 형상들을 부수고 파헤치려고 하는지 알 수 없다. 파헤쳐진 산은 이미 산이 아니라 흙과 돌과 죽은 나무들의 잔해일 뿐이지 않겠는가.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노력들은 이러한 장미공원을 만들게 했고, 자연보다 인공을 더 높이 사는 세상을 만들게 했다. 울타리에 핀 한 송이 장미보다 이 장미공원이 더 아름답다고 말할 수는 있는 것일까. 무슨 일이든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버릇이 있는 나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이다. 고독하지 않으면서 줄기차게 고독을 주창한다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고독을 고집하는 나는 소속될 아무 곳도 없는 것이다. 고독 시 한 편 옮겨 놓는다.

 

고독 70

- 무서운 것


말이 너무 많아져
젊은이들 앉혀놓고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천년 묵은 이야기
늘어놓고 있지 않을까
술 마시고
미친개처럼
고함치지 않을까
내 할일 하지도 못하면서
새파란 녀석들 잡고
훈계하려하지 않을까
했던 이야기 또 하며
횡설수설하지 않을까
싫어하는 줄 모르고
존경하는 줄
착각하지 않을까
이 모든 것들이 무서워
밤이슬 아래 입술 깨문다

확실한 고독의 정체를 찾아서 헤매고 있는 나는 실로 고독하다. 아무도 찾지 않는 길을 찾아 홀로 헤매는 것을 고독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모든 고독한 사람들이 신세계를 발견했고, 고독의 절정에서 최고의 음악을 완성했다. 나의 고독은 신세계를 찾는 구도자의 그것도 아니고 최고의 작품을 만들겠다는 것도 아니다. 단지 원하는 것은 알고 싶은 고독을 마음으로 느끼고 몸으로 부딪쳐 보고 싶은 것이다. 그것이 마음처럼 되지 않기 때문에 아직도 고독을 찾아 헤매고 있는 것이다.

 

 

곡성 기차마을펜션

 

여행을 떠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부분. 바로 숙소다. 하루 저녁을 유하며 한잔 술에 취해 세상 근심을 잊어보는 곳. 기차마을펜션이지만 큰 기차방은 모두 예약이 끝나 전형적인 펜션모양으로 지어놓은 방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방 두 개를 구했고 여자 회원들은 네 명이 한 방을 사용했고, 남자들은 여덟 명이 한 방을 사용했다. 또 두 사람은 차에서 밤을 새우다시피 했으니 모두가 평화로운 밤을 보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새벽 두 시에 잠을 청하여 새벽 5시 31분에 잠을 깼으니 또한 온전하게 잠을 잤다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문학기행에서 가장 중요하고 핵심이 되는 순간은 분명히 기행 첫날을 마무리하는 밤의 문학기행 시간이 될 것이다. 그런 순간을 맞게 되는 시간. 그 순간들은 밤이라는 시간으로 한꺼번에 묶을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며, 시간의 단위마다 순간이라는 것으로 각각 이름 지어야 할 것이다. 그 순간들의 한 복판에서 문학의 밤은 깊어가고 진지하면서도 떠들썩하고 장난스럽지만 심금을 울리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추억으로 스며드는 시간인 것이다.

섬진강을 굽어보며 발 아래 펼쳐지는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부러울 것 하나 없는 신선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다. 가족을 떠나고, 살고 있는 생업의 현장을 떠나 자연과 함께하는 시간이야말로 일상을 일탈한 진정 아름다운 시간이 아니겠는가. 술잔을 기울이며 시간 위에 추억을 쌓아가며 밤을 통과해 새벽으로 간다.

 

 

다시 떠나는 시간들을 위하여

 

예년과는 달리 술을 많이 마시지 않은 까닭에 잠자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맑은 정신으로 새벽을 맞이할 수 있었다. 혼자서 산책을 나가 한 시간을 나 자신 속 깊은 곳으로 구겨 넣었다. 그 한 시간은 오로지 나만의 시간이었고 안개 자욱한 풍경 또한 나만의 것이었다. 숙취를 느끼지 않은 아침은 출발시간 또한 앞당겼다. 아홉 시를 조금 넘긴 시간. 모두 출발 준비를 끝내고 펜션 앞으로 모였다.

곡성 기행을 마치고 화엄사로 가는 도중 심청이 마을을 둘러보기로 했다. 그냥 이름 붙여진 마을이 심청이 마을 펜션가가 되었다. 가장 봉사를 많이 했다는 심청의 아버지. 그래서 호가 봉사인 심학규. 그리고 왕비가 된 심청. 이야기 속으로 잠시 걸어 들어갔던 시간.

곡성을 떠나 구례로 향했다. 목적지는 화엄사. 화엄사를 방문한지 거의 30년 가까이 되는 시간. 화엄사는 아직도 가슴을 뛰게 한다. 지리산 종주를 위해 화엄사를 찾았고, 지리산 종주의 마지막 도착지가 화엄사였던 젊은 시절이 주마등처럼 흘러간다. 그때 종주를 해 보지 않았다면 아마도 평생 지리산 종주를 해보지 못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의 체력으로서는 엄두가 나지 않으니 벌써 마음부터 지고 들어가는 모양새다.

화엄사 입구를 통과할 때도 강주 원오 스님을 만나러 간다고 하니 바로 통과시켜 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두 절을 무료체험하게 된 것이다. 이번 문학기행은 절에서 절 건축물보다는 스님들과 대화를 나누며 절의 향기를 느꼈다는 것이다. 화엄사를 통과해 등산로에 접어들 때도, 무심코 초파일날 절을 찾았을 때도 그저 건축물의 모양만 감상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어디론가 바삐 움직이고 있는 스님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으로 만족했었는데 이번에는 스님과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던 것 같다. 성당에서 오래 살면서 신부님이나 수녀님들이 멀리서 쳐다보는 사람이 아니라 같이 술을 마시며 같이 담배를 피우며 인생이야기를 했던 일들과 같은 체험을 했다는 것. 신도가 아닐 때 스님과 차를 나눌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기 힘들다.

여기서도 고독이 화두가 된 듯하다. 고독하지 않으면서 고독하다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런 사람은 아마도 이미테이션을 위하여 평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포장을 하고 그 포장이 떨어졌을 때 그 위에 다시 포장을 해야 하고 잘못된 고독이 드러났을 때 또 그 고독을 고독인 것처럼 치장해야 하니 보통 일이 아닐 것입니다. 진정 고독한 사람은 고독이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고독할 뿐이다. 대충 이런 대화였을 것이다.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할애해 주신 원오 스님께 감사한 마음을 표한다.

다시 일송 스님이 주빈이 되어 차 한 판을 돌린다. 원래 불교는 절이 아니라 탑이라는 이야기. 그 탑은 사리탑이고 사리는 부처님의 몸이니 탑을 중심으로 불법은 행해졌고, 불교의 중심은 부처님이라는 이야기. 탑 주변에서 기도하고 이야기하던 모습들이 차츰 절을 짓게 되고 금당에 부처님을 모시면서 금당이 더 부각되고 있는 현실. 화엄사 각황전. 시험문제에 나올 것이라는 것 때문에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외웠던 일들. 참 무식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되는 시간들.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 화엄사 각황전. 현존하는 우리나라 가장 오래된 3대 목조 건축물이라고 하는데 맞는지 모르겠고. 사실 부석사 무량수전이라고 외우면서도 그것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단지 부석사에만 무량수전이 있는 줄 알았었다.

차를 마시고 절을 둘러보면서 먼저 각황전 앞에 섰다. 각황전 앞의 석등은 그 규모부터 사람을 압도했다. 모든 전쟁으로부터 저렇게 온전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전쟁을 비껴갈 수 있는 불심이었을까. 항상 무엇이든지 의심부터 하고 마는 이 의심병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발원되었을까. 속계에서 그만큼 내상을 입은 결과일 것이다. 그러기에 고독은 내 주변에서 자취를 감추지 못하는 것이다.

화엄사 원오 스님과 작별하고 의령문학이 태동했던 1997년 문학기행 장소였던 시의 동산에 들렀다. 화엄사에서 조금 내려오면 시비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시비 동산을 만날 수 있다. 추억의 장소에 감회가 새로울 사람은 김영곤, 윤재환. 두 사람이다. 사람들은 모두 괜히 들뜨는 마음을 느껴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괜히 들뜨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만났던 기쁨과 회한이 있을 때나 가능한 것이다. 당시의 창립 회원들이 이제는 대부분 빠져 나가고 박래녀, 장인숙 회원을 더하여 네 명만 남아 있기 때문에 떠나버린 그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한스러움과 한껏 부푼 마음으로 여행의 길에 올랐던 첫 여행지에 들렀다는 기쁨이 교차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시의 동산 첫머리에 낯익은 이름이 보인다. 경남의 문인 이우걸. 글씨를 쓴 사람 의령사람 윤판기. 세상은 넓고도 좁다.

 

모란


이우걸


피면 지리라
지면 잊으리라
눈감고 길어 올리는
그대 만장 그리움의 강
져서도 잊혀지지 않는
내 영혼의
자줏빛 상처

 

글씨 윤판기

 

 

쌍산재

 

의령으로 돌아가는 길에 고택을 둘러보고 가기로 했다. 벼슬을 하지는 않았고 오직 선비의 길을 걸었던 고조할아버지의 호 쌍산을 차용해 쌍산재라 하였다. 집 주인은 자손으로서 마땅히 가져야할 의무감으로 고택을 관리하고 있지만 본인이 관리하지 못할 지경이 되면 나라에 손을 빌려볼까 생각하고 있다면서 고택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고택을 들어서기 전 오른쪽에 당몰샘이 보인다. 원래는 집 안에 있었던 샘이었는데 마을 사람들과 함께 쓰기 위해 집 밖으로 빼 내어 마을에 기증하고자 하였으나 세금도 내야하고 관리하는 부담이 있어 등기해 가지 않아 지금도 쌍산재의 소유로 있다고 한다. 한 평의 땅이라도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 사람들의 심리인데 마을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사유재산을 내 놓는 여유로움이 돋보인다. 또한 굳이 등기해 가지 않는 마을 사람들도 세금의 문제보다는 욕심내지 않는 한가로움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어쨌든 우물은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으니 소유를 따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고택의 형태는 호리병 모양으로 대문에서 보면 초라한 것 같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안채와 사랑채 그리고 시집가지 않은 딸들이 거주했던 건너채, 그리고 안채의 오른쪽 위에는 사당이 자리 잡고 있다. 장독대를 지나 위로 걸음을 옮기면 별채가 보이고 이동하는 길은 돌을 깔아 운치를 더하였고 또한 길 양 옆으로는 대나무를 심어 대숲의 향기와 소리를 들으며 호서정을 지나 서당채로 향할 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서당채는 민박이 들어있어 들어가 보지 못했다. 서당채 앞에서 왼쪽으로 돌아가면 경암당이 자리하고 있다. 현재는 큰 건물이 자리하고 있지만 규모가 작은 건물이 있었던 자리에 최근 들어 복원했다고 했다. 경암당은 서당채로 몰아치는 서풍을 막기 위해 동향으로 지은 집으로 글공부를 하는 서당채를 온화하게 감싸기 위한 것인데 실제로 경암당을 짓고 나서 서당채 주변의 분위기는 확연하게 달라졌다고 한다. 서당채 주변에 우거진 수목을 그대로 방치해 놓은 것은 서당채로 들어간 사람이 속세를 차단하고 오로지 글공부에 전념하도록 하기 위해서란다. 살림집에서 무슨 소리를 하든 서당채에서는 들리지 않도록 자연 방음벽을 만든 셈이다.

경암당을 후문으로 가면 넓게 펼쳐진 저수지가 나온다. 후문의 이름은 영벽문. 서당에서 공부를 하다가 잠시 흐트러지기 쉬운 마음을 달래기 위한 구도로 집 밖에서 펼쳐지는 새로운 세계를 경험할 수 있고 다시 마음을 잡아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는 여유를 느낄 수 있다.

쌍산재를 중심으로 지리산의 천은사, 화엄사, 연곡사, 쌍계사 등 고찰들이 둘러싸고 있어 천혜의 명당이라는 이야기를 완성된 스토리텔링으로 들을 수 있었다. 구례는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이 성공한다는 이야기도 곁들여 들으면서 쌍산재를 나왔다.

 

 

곡전재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곡전재다. 곡전재 또한 고택으로 현재 고택 민박 체험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새로 지은 건물이 아니라 오래된 집에서 풍겨나는 향기를 그대로 간직한 채 펜션으로 활용하고 있기 때문에 아늑함을 느낄 수 있다.

마당의 한켠에 연못을 만들었고 그 연못으로부터 물길을 만들어 흐르는 물이 마당을 휘돌아 가게 하여 인위적인 임수를 장착한 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뒤에는 지리산이 버티고 있고 앞으로는 섬진강이 흐르고 있으니 배산임수의 지형에 걸맞는 명당이라 할 수 있겠다. 건물마다 당호를 지어 걸어놓는 여유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현대식 건물은 큰방, 작은방, 부엌, 그리고 여유가 되면 서재까지 한 건물 안에 들어가기 때문에 당호를 짓는다는 생각을 할 여유가 없을 것이다. 당호를 짓기 위해 생각하는 시간. 건물에 맞는 쓰임새와 거주하게 될 사람에 따라 그 이름은 달라야 할 것이다.

펜션사업이 활기를 띠면서 많은 고택들과 새로 만드는 신식 펜션들이 여행객들을 맞이하기 위해 분주하다. 전주, 경주, 안동, 서울 등 고택들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면서 그 고택들이 민박으로 전락하여 상업적 요소가 더 부각되는 것은 달갑지 않게 여겨진다. 여유가 된다면 이런 고택 한 채 장만하여 여유로운 인생을 즐기고 싶다. 펜션으로 활용하기보다 실제로 거주하면서 지인들이 찾아오면 자리를 내어주는, 언제나 쉬어갈 수 있는 쉼터로서 말이다.

 

 

여행을 접으며

 

곡성, 구례를 돌아 하동으로 향한다. 평사리문학관을 둘러보고 토지 드라마 세트장을 둘러보기 위함이다. 한낮의 날씨는 회원들을 지치게 했고 토지 세트장 앞에서 모두 좌초되고 만다. 일부는 팥빙수를 먹기 위해, 일부는 막걸리를 마시기 위해 각각 움직였고 평사리문학관 관람은 자연스럽게 포기되고 말았다. 모두들 몇 번씩 가 보았던 곳이라 쉽게 포기되었고 아무도 불만을 품지 않았다. 불만을 품을 가능성이 있는 회원이 참석하지 않은 탓이라고 스스로 위로하면서 평사리문학관 관람을 막걸리로 대체했다.

신입회원 둘이 처음으로 문학기행에 참여했고, 문학에 대한 열정인지 사람들에 대한 향수의 발로인지 저녁을 먹고 혼자서 돌아간 회원도 있고, 밤을 새고 생업에 종사하기 위해 새벽에 떠난 회원도 있다. 여유롭게 1박 2일 동안 즐기며 돌아다닌 것이 미안하게 느껴진다. 사치를 누린 것 같다. 어쨌든 모든 함께한 사람들의 기억에 오래오래 남는 여행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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