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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와 마릴린/이지민

by 1004들꽃 2009. 9. 29.

소설은 재미있기 때문에 읽는다. 재미있지 않은 소설은 소설이 아니라고 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섹시 심벌의 대표적인 여자 마릴린 먼로가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 미군 부대에 위문공연을 왔던 마릴린 먼로의 사진과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과 북한 포로 사이에서 통역을 하던 여자 통역사의 사진을 보고 시작한 소설책이다.


이제 전쟁은 현세대 젊은이들에게는 잊혀져가는 추억으로만 기억되는 듯하다. 그 기억은 이 소설을 시작으로 다시 기억을 일깨워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굳세어라 금순이”라는 노래 가사에 나오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서의 사투가 있고 길거리에서 사격 연습을 하듯 민간인들을 쏘는 인민군이 있고 마릴린 먼로의 공연을 보기 위해 마치 전쟁이 난 것처럼 부대가 이동하는 장면도 있다.


주인공인 김애순은 자신을 정부로 만들었던 남자의 아내와 딸이 인민군의 사격 연습에 희생되는 상황을 목격하고 달려들다가 총에 맞는다. 숨이 끊어지지 않은 채 다른 시체들과 함께 우물에 던져지고 그 시체더미 속에서 그 남자의 딸을 찾아내고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것을 확인한다. 하지만 아직도 우물 밖에서는 인민군이 떠나지 않았고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아이의 입을 손으로 막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하늘이 보라색으로 물든 시간 아이의 입에서 손을 떼니 아이는 숨을 쉬지 않는다. 아무리 소리쳐 불러도 우물 밖에서는 사람의 인기척은 없다. 그날 밤을 온전히 귀신들에게 시달리다 구출된 다음날 머리카락은 하얗게 변했고 손톱마저 햇빛에 바랜 플라스틱처럼 부서져 내렸다. 그 전쟁에서 살아남은 여자. 김애순. 앨리스 J Kim 이다.


미군부대 타자수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양공주가 되지 않아도 되었고, 미군에게 몸을 팔지 않고도 미군으로부터 돈을 벌 수 있었던 앨리스는 1954년 미군 위문공연차 한국을 방문했던 마릴린 먼로의 통역을 맡아 3박 4일 동안 따라 다니게 되었다.


이야기는 이야기대로 흘러가지만 그 이야기 속에서 흘러나오는 풍경은 실제 상황처럼 느껴진다. 이 책을 쓰기 위하여 거의 20권에 이르는 1950년대의 상황을 기록한 책을 참고로 했으니 사실이기도 할 것이다. 차가운 겨울 밤거리에서 얇은 월남치마 같은 시원찮은 치마 하나만 걸치고 구걸하고 있는 꼽추 소녀의 등에서 불쑥 튀어 오르던 아이. 그 시절 수많은 부모 잃은 소녀가장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날마다 죽음을 생각하며 마군부대로 출근하며 하루하루를 죽이며 살아가던 앨리스에게 마릴린 먼로는 나비처럼 날아왔다. 그녀와의 여행에서 지난 1947년에 만난 인연이 다시 현실로 다가오고 두 번이나 자살을 기도하면서 자신을 찾아가게 된다.


이 소설에서 역사 공부를 다시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그 중 하나가 1947년부터 이미 미제 스파이가 한반도에 상주했다는 것이고 그들은 전쟁이 일어날 것을 알았고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모두 철수 준비를 마쳤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대한민국의 사람들은 아군인지 적군인지도 모를 무차별 폭격 속에서 짐승처럼 몰려다녔고 철새처럼 지독한 3년을 보냈던 것이다. 그 3년 동안 썩어가는 시체더미와 폐허가 된 도시에서 꾸역꾸역 삶을 이어가면서 살아낸 것이다.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이지민이라는 작가는 한국전쟁을 겪지 않은 젊은 세대이다. 그녀의 소설은 이중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좋은 것 같다. 그 중 하나는 한국전쟁의 비참함을 상기시켜 주는 일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살아남기 위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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