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연하게 우장춘이라고 하면 씨 없는 수박을 떠올리게 된다. 그래서 이 책을 대하면서 가지게 된 선입관으로 인해 우장춘이라는 한 사람이 씨 없는 수박을 만들기 위하여 겪게 되는 고난이나 그 과정에 대한 이야기일거라고 생각을 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생전에 우박사는 씨 없는 수박을 만든 사람은 자기가 아니라 일본의 기하라 히또시 박사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다녔다.”고 한다.
이 책은 우장춘이 육종학자로서 걸어왔던 길을 이야기하기보다 을미사변과 관련하여 명성황후 시해범의 아들로 살아가면서 그리고 조선인으로 살아가려 하지만 조선인에게서도 외면당해야하는 인간으로서의 고뇌를 다루고 있다. “윤효정이 쓴 『구한말비사』에 언급된 우장춘의 아버지 우범선이 직접 명성황후를 난도질하여 죽이고 부하를 시켜 석유를 부어 불태우고 뼈를 찾아 연못에 버리게 했다는 사실”은 역사적 사실과 다른 “비사”일 뿐인지 아니면 일반적으로 알려진 을미사변의 진상이 진실을 가리고 있는 것이지 잠시 의심을 하게 만든다. 사실 얼마 전에 한반도라는 영화에서도 일본 낭인들의 칼에 명성황후가 시해당하는 장면을 보았고 어떤 책에서는 낭인들이 사실은 변장을 한 일본의 엘리트 계층이라는 설도 있었다.
어쨌든 소설은 사랑하는 여자의 아버지가 자신의 아버지를 암살한 사람으로 연결되고 이루어지지 못하는 사랑으로 남는다. 역사적인 사실보다는 한 인간의 고뇌를 사실적으로 그려냈다는 것에서 흥미를 유발시킨다. 일본인으로 살게 되면 보다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창씨개명을 거부했던 것은 부친이 자신에게 뒤집어 씌운 업보를 감당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 당시 한반도에서 많은 사람들이 창씨개명을 하였고 그 사실들이 현재 각 관공서에서 보관하고 있는 제적부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한때 일본인 명의 재산을 조사하여 국가에 귀속시키는 일이 있었는데 일본인과 잘 구별되지 않는 창씨개명자의 재산도 귀속되는 일이 있었던 것 같다. 지금에 와서 창씨개명이 기록된 제적부와 토지대장 등을 제출하여 그때 귀속된 재산을 되찾는 일도 있으니 말이다.
여러 등장인물 중에서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독립운동가만 잡아들였던 선우환이라는 자는 항일단체에 의하여 처단을 당하고 홍광표라는 인물은 해방 후 공산주의가 아니면서도 친일파 등살을 피해 평양으로 갔다가 숙청되었다. 그러던 중 6.25라는 동족간의 전쟁을 겪게 되고 휴전이 되면서 섬 아닌 섬이되어 소위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다.
아스꾸니 신사참배의 문제라든지 일본과 축구경기를 할 때라든지 일본이라면 괜히 신경이 곤두서고 적대감이 생기는 것은 60년대에 태어난 사람으로 무작정 세뇌당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그 옛날 흑백 텔레비전 시절에 연속극으로 “민비”를 방영한 후 “명상황후”라는 이름으로 뮤지컬 공연을 하기까지 많은 세월을 소비해야만 했다. 역사적 인식의 전환을 위하여 다양한 노력이 진행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육종학자로서의 우장춘이 아닌 암울했던 시절 일본에서 태어나 조선인도 아니고 일본인도 아닌 어정쩡한 위치에서 살아가야만 했던 한 인간의 눈을 통하여 역사를 거슬러 시간여행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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