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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있는풍경

교활한 늙은이

by 1004들꽃 2018. 2. 15.



교활한 늙은이


ME too로 유명세를 탄 최영미 시인이
30년 선배인 EN을 보고
이 교활한 늙은이야! 라고 말했다는데
그것도 새로 산 검정색 조끼가 더러워질까봐
코트자락 휘날리며 그 자리를 도망쳐 나왔다는데
나는 한 번도 두 눈 부릅뜨고
누군가에게 반대하는 말을 한 적이 없다
속으로는 열 번도 더
교활한 늙은이를 외쳤건만
정작 입으로는 단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시인이라면 사회참여를 해야만 한다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었건만
멍하니 텔레비전 뉴스의 자막을 읽다가
아나운서의 이야기도 자막의 내용도 기억하지 못한다
신춘문예 당선작보다
당선자가 더 부럽고
그래도 체면은 있어 당선작의 행간을 읽는 척하다가
깜박 잠이 들어버린다
시 쓰는 일도 사회참여하는 일도 알다가도 모르겠고
나이가 들면서 점점
교활한 늙은이가 몸 밖으로 삐져나오는 것을 느낀다
부끄러운 손을 숨기려고
슬그머니 호주머니에 손을 집어넣는다
남들은 알지도 못하는데
혼자만 화들짝 부끄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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