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산동성 요성시 청소년 국제교류를 다녀와서
(2007. 7. 23 - 7. 30)
여행을 다녀온 후 기억을 더듬어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 될 수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가 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 모든 일정들이 후자의 경우로만 생각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쨌든 여행을 다녀온 이후 그 여정들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곱씹어 보는 것도 좋은 일일 것이다. 중국 여행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만 기록하기로 한다.
중국을 다녀오기 위하여 거의 한 달 이상을 계획과 여행사와의 조율 등으로 시간을 보냈다. 매끄럽게 되는 일은 없고 모두가 장애물 경기처럼 난해한 일이었다고 하면 정답이다. 특히나 여행이 아니고 중학생 13명을 인솔하여야 하고 중학교 교사 한 분과 군청 4명으로 총 18명이 의령군 청소년 방문단 대표로써 중국 산동성 요성시의 청소년과의 교류를 위한 출장으로 상사도 한 명 포함되어 있으니 비서 역할도 해야 하는 부담감을 안고 가는 여정이다. 날짜까지 하루 앞당기는 바람에 마지막까지 비행기 일정을 조정해야만했다. 여행사에서는 비행기표가 없다고 난리고 우리입장에서는 일정을 조정해 달라는 중국측의 요구를 무시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모든 일정 조정을 완료하고 출발만 남겨 두고 있었지만 마음 한 구석은 왠지 이유 없는 허전함으로 가득 찬 느낌이다.
2007. 7. 23(월)
2007. 7. 23. 월요일 새벽 3시 알람 소리에 기계처럼 일어나 모든 준비물을 챙겨 보고 떠날 시간을 기다렸다. 4시 30분까지 오라고 했던 아이들이 과연 시간 맞춰 올 것인지.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사라지곤 하는 시간을 보내고 4시 30분 7박 8일의 긴 여정을 소화하기 위한 길을 나섰다. 군청 광장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 반가웠지만 그것도 잠시, 아직 도착하지 않은 아이들이 있어 초조한 마음으로 변해갔다. 애써 태연한 척하면서 기다리고 있자니 우리 일행을 공항까지 데려다 줄 버스가 도착하고 인솔자 5명도 도착했지만 4시 50분이 되도록 학생 한 명이 도착하지 않았다. 전화를 했지만 오히려 전화 받는 쪽에서 화를 내는 눈치다. 5시가 다 되어 마지막 한 명이 도착하고 바로 버스는 출발했다. 떠나는 첫날부터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은 분위기다. 첫날 일정은 의령에서 김해로, 김해에서 김포로, 김포에서 인천으로, 인천에서 중국 제남, 그리고 제남에서 요성으로 가는 5번의 일정이기 때문에 자칫 아이들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하나 하는 불안감이 온 몸에 축축하게 젖어 무표정한 얼굴로 기계처럼 비행기와 버스를 오르락내리락 하였다. 그 와중에 기내에 들고 타는 가방에 화장품을 넣은 학생이 있어 다시 짐을 꾸리기도 하였다.
인천공항에 도착하여 중국 제남으로 가기 위해 탑승구 앞에 대기하는 동안 모두 화장실을 다녀오라고 했다. 그런데 학생들이 빠져 나간 의자 밑에 비행기 표가 한 장 흘러 있는 것이 아닌가. 비행기 표 한 장이라도 없으면 단체 비자로 가는 우리 일행은 모두 발목을 잡히게 된다. 바닥에 떨어진 비행기표를 주워들고 어떻게 하는지 두고 보기로 했다. 탑승 시간이 되고 모두 비행기표를 들고 탑승구 앞에 줄을 서라고 했더니 한 학생이 허둥지둥한다. 한참 지켜보고 있다가 조심하라고 하면서 표를 돌려주었다. 그럭저럭 중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게 되었고 중국 비행기 특유의 연착을 즐기면서(별 이유 없이 한 시간 늦게 출발하였음) 중국으로 향하게 되었다. 어떻게든 중국으로 날아가고 있으니 뒤에 일어나는 일정이야 어떻게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잠시 눈을 붙였지만 잠은 들지 않고 머릿속만 복잡해져 갔다. 아이들은 소금절인 소풀(부추)처럼 축축 늘어져 골아 떨어졌다.
우리가 탄 비행기에는 중국의 동양화에 나오는 여인과 똑같이 생긴 승무원이 한 명 있었다. 예전에 설악산을 가기 전에는 동양화를 그리는 사람은 왜 산을 저렇게 그리나 하는 의구심을 가졌었는데 눈이 내리는 겨울에 찾은 설악산에서 그 동양화에 나오는 산과 똑 같은 산을 보았던 경험을 다시 하게 된 것이다. 보아도 보아도 신기하고 신기했다.
기내식에서 야릇한 향신료 냄새가 났다. 중국 특유의 향신료 때문에 음식을 잘 먹지 못한다는 중국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은바 있다. 죽기야 하겠나 하는 마음으로 앞으로의 일정을 생각하면서 꾸역꾸역 먹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못 먹겠다며 다 남겨놓았다. 중국 음식이 체질에 맞는 모양이라며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렇지만 속에서 이상한 냄새가 자꾸 올라오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었다.
드디어 중국 땅에 도착했다. 짐을 찾고 입국 수속을 마치고 공항 로비로 나가니 요성시 직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장전화 부주임, 이정 교육국 부국장, 도과장, 이과장, 사진기사 등 5명이 마중을 나와 반갑게 맞아 주었다.(확실하게 누가 나왔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점심 식사를 해야 되지 않겠냐고 하면서 우리 일행을 식당으로 안내하였다. 식당에 들어서니 비행기 안에서 맡았던 특유의 냄새가 온 몸으로 다가왔다. 9명씩 두 테이블에 우리 일행이 앉고 요성시 직원들은 다른 자리에 앉아 우리가 식사를 다 마칠 때까지 앉아 있었다. 각종 요리가 나오는데 푸짐하면서도 끝없이 나왔다. 테이블이 꽉 차도록 나오고 마지막 후식까지 나왔지만 먹을 만한 것이 없는 게 탈이었다. 꽉 짜여진 일정에서 피곤하였고 진한 향신료에 버물려진 음식도 입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테이블 위에 차려진 음식은 대부분 그대로인 채 내버려 두고 우리는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뱃속은 텅 비었는데도 도무지 먹을 정이 없었다. 식당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요성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주변 풍경을 보니 포플러 나무의 일종으로 보이는 나무들을 도로변에 줄지어 심어 놓았다. 가끔씩은 수양버들도 군락이 이루고 있었다. 얼마쯤 가면 다른 수종이 보일까 싶었지만 제남에서 요성까지 가는 동안 수종의 변화는 없었다. 나라 전체에 나무가 없기 때문에 녹화사업으로 가장 빨리 자라는 나무를 심은 것 같았다. 도로 주변에는 집이 별로 없었지만 농경지에는 대부분 옥수수가 심겨져 있었다. 가끔씩 보이는 집은 사람이 사는 집인지 아닌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주변의 흙 색깔과 비슷한 색의 벽돌과 기와로 집을 지었는데 먼지로 뒤덮였는지 뿌옇게 보였다. 고속도로에는 차가 그렇게 많지 않았고 가끔씩 승용차가 빠른 속도로 지나가고 있었다. 우리가 탄 버스는 계기판을 보니 시속 70㎞를 넘지 않고 있었다. 시종일관 그 속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한 시간쯤 달렸을까. 도로변의 건물이 서 있는 곳에서 세우더니 화장실 다녀올 사람 다녀오라고 했다. 더위에 지쳤는지 여정에 지쳤는지 모두들 꼼짝하지 않았다. 여중학교 선생님과 나는 고속도로 휴게소라고 생각되는 이 곳의 화장실이 어떤지 볼 겸 내려서 화장실로 갔다. 소문으로만 듣던 중국 화장실에 처음으로 들어간 것이다. 한국의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은 어떤가?
70년대 시외버스 주차장 화장실과 비슷한 풍경이었다. 특이한 것은 “큰일”을 보는 사람이 문도 닫지 않고 앉아 우리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아무 부끄럼 없이 태연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 오히려 우리를 부끄럽게 했다. 급히 볼일을 보고 귀신에 홀린 듯한 기분으로 나와 버렸다. 휴게소라고 하지만 화장실과 주유소 그리고 식당인 듯한 건물이 있고 휴게소 광장에는 우리 일행을 태운 차 한 대 밖에 없었다. 한 시간 가량을 더 달려 요성시에 도착하였다. 요성시 변두리의 풍경은 60년대 영화에 나오는 장면과 유사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울긋불긋한 낡은 간판이나 길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 가게 앞의 인도에는 탁자 몇 개와 의자 몇 개를 늘어놓고 장사를 하는 모습 등 우리가 초등학생 때 보았던 김두한 영화에서 나오는 거리의 풍경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시내 복판으로 들어서니 고층빌딩이 보이고 정리된 모습의 상가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사실은 그 속에서 생활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지 못했으니 실생활은 보지 못하고 겉모습만 보는 격이 아닌가 생각된다.
첫날의 최종 목적지인 광악호텔에 도착했다. 여자 직원들이 우리 일행의 무거운 짐을 들고 2층으로 운반하였다. 학생들은 한 방에 두 명씩, 어른들은 각 한 방씩 배정받아 여장을 풀었다. 드러누우면 그대로 잠이 들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막상 눈을 감으니 잠이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문 밖에서 술렁거리는 소리가 들려 밖으로 나가니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중국인이 있었다. 요성시의 직원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요성대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선생이었다. 한국에 교환학생으로 2년 있었고 서울대학교에서 2년 동안 대학원을 다니며 경영학을 전공했다고 한다. 4년 동안 한국에 있었기 때문에 한국어를 그런대로 하는 편이었으며 이름은 “당연”이라고 했다. 5일 동안 우리를 따라다니며 통역을 해 줄 사람이었다.
시간이 흘러 저녁시간이 되었다. 호텔 식당으로 이동하여 만찬장으로 갔다. 중국에서는 아무 자리에 앉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선채로 인사만 하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둥근 테이블 위를 보니 이름을 적은 명패가 놓여 있었다. 그 자리가 각자 앉을 자리인 것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정면으로 마주보이는 자리가 그들 중 가장 지위가 놓은 사람이 앉고 그 맞은편에 그 다음의 지위에 맞는 사람이 앉게 되며 지위가 가장 높은 사람의 오른쪽 자리가 주빈의 자리이며 그의 왼쪽 자리가 부주빈의 자리다. 그리고 두 번째 지위에 있는 사람의 오른쪽 왼쪽에 초대받은 사람의 지위에 따라 자리가 정해진다. 그리고 주빈의 오른쪽에는 통역이 자리한다. 그렇게 앉게 되면 한국인(초대받은 사람)과 중국인(초청한 사람)이 사이사이에 섞여 앉게 되고 각자 초대받은 사람이 편하게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자리 배석은 누가 보아도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의 지위가 일목요연하게 드러나는 형태이다. 아주 이색적인 문화를 접하게 된 순간이다.
원탁 위에는 돌아가는 유리판이 있고 개인별 좌석 앞에는 접시와 젓가락, 찻잔, 술잔 두 개가 놓여있다. 모두 자리에 앉자 식당의 여자 직원 세 명이 돌아가면서 차를 따른다. 한국식당에 가면 먼저 물을 마시듯이 중국에서는 항상 식사를 하기 전에 차를 마시고 시작한다고 한다. 차를 따르고 나면 술을 부어 주는데 큰 잔은 맥주잔이고 작은 잔은 백주잔이다. 맥주는 청도맥주인데 인터넷 검색해보면 알콜 용량이 5%로 되어있는데 중국에서 본 청도맥주병에 표기된 것을 보니 8%였다. 청도는 아편전쟁 이후 열강에 의한 중국침략이 활발할 때 독일이 점령한 곳으로 점령하고 보니 늘 물처럼 마시는 맥주가 필요해 청도 점령과 동시에 세운 게 청도맥주공장이라고 한다. 역사는 이미 백년이 넘었고 보통 9월 중순에 맥주축제를 하고 있으며 세계 3대 맥주에 꼽힐 정도라고 한다. 백주는 곡식을 주 원료로 하여 증류한 술인데 36도에서 38도 정도이며 한국의 소주처럼 생각하면 되고 지역에 따라 맛과 향기가 다르다.
술을 따르고 나니 술잔 두 개 중에 비어있는 것은 거두어 가고 음식이 들어와 돌아가는 유리판 위에 차려졌다. 외사판공실의 허세수 주임이 우리 청소년 방문단을 환영하며 첫 번째 잔을 제안한다고 하면서 “건배”를 외쳤다. 중국에서는 항상 대접하는 쪽의 지위가 높은 사람이 세 번의 건배를 제안하고 그다음 맞은편에 앉은 다음 지위의 사람이 또 세 번의 건배를 제안한 다음 건배 제안을 하고 싶은 사람이 두 번의 건배를 제안하고 나머지는 단독건배로서 옆사람이나 건배를 하고 싶은 사람에게 건배를 제안한다고 한다. 음식은 점심때와 마찬가지로 푸짐하게 들어왔지만 향신료 때문인지 먹을 수가 없었다. 술에서도 냄새가 났지만 억지로 먹을 수밖에 없었고 음식은 먹지 못하니 술로서 배를 체운 격이다. 그렇게 자리가 무르익어가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2007. 7. 24(화)
바깥에서 사람들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 창밖을 보니 날이 새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새벽 5시. 방에는 가방도 없고 나 혼자만 덜렁 누워 있었던 것이다. 방을 나오니 처음 보는 방 번호에다 복도가 미로처럼 얽혀있어 어디로 나가야 될지를 몰라 한참을 헤매었다. 복도를 따라 밖으로 나오니 처음 보는 곳이고 다시 방으로 돌아오니 방문은 잠겨 있었다. 다시 밖으로 나가 서성대다가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고 지나가는 여자를 만나 내 방의 카트키를 보여주고 찾아달라고 하니 친절하게 데려다 주었다. 속이 쓰리고 울렁거려 움직이는 것 자체가 괴로웠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그래도 둘째 날 일정을 맞추지 않으면 안되었기에 샤워를 하고 정신을 차렸다. 아침 식사시간은 8시. 시간이 남아 호텔 정문으로 나가니 도로에는 자전거가 줄을 지어 달리고 있었다. 도로는 4차선인데 도로 양 옆에는 자전거 도로가 한 차선으로 넓게 개설되어 있었다. 가만히 보니 한쪽 방향으로만 움직이고 있었다. 호텔 앞 자전거 도로에는 오른쪽으로만 움직이고 반대편 차선의 자전거도로에는 왼쪽 방향으로만 움직였다. 가끔씩 반대편 차선에서 왼쪽으로 움직이던 자전거가 도로를 횡단하여 이쪽으로 와서 오른쪽으로 페달을 밟아 움직였다. 질서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질서가 몸에 밴 것 같았다. 페달을 밟지 않아도 움직이는 자전거도 많이 보였다. 전기충전식 자전거란다. 밤에 충전을 하여 낮에 타고 다니고 배터리가 소모되면 페달을 밟아서 움직이기도 한다. 가끔씩은 125cc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이른 시간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끝없는 자전거 행렬이 이어졌다. 중국사람들이 게으르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렇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가 묵고 있는 호텔은 개보수를 하고 있었는데 새벽 6시가 되면 일꾼들이 모두 출근하여 일을 시작한다. 일의 속도에 대해서는 모르겠지만 일찍 일어나 움직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보니 그동안 생각했던 중국인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아니 바뀐 것보다는 딜렘마에 빠졌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아무 곳에서나 담배를 피운다고 들었는데도 길거리에서 담배꽁초를 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아침식사 시간이 되어 식당으로 갔으나 향신료 냄새 때문에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지난밤에 백주에 절은 탓으로 온 몸이 향신료 덩어리가 된 기분이었다. 도저히 먹을 수가 없어 그만 방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물과 담배로 아침을 때우고 말았다.
이틀째 일정은 요성시 풍경 유람이었다. 첫 방문지는 요성시 개황을 소개하는 운하박물관이었다. 박물관 건물의 웅장함에 먼저 놀라고 들어간다. 주변을 둘러보면 최근에 지은 듯한 건물은 모두 그 규모가 대단히 크고 넓었다. 땅이 넓고 아직도 사회주의 체제하에 있기 때문에 개발은 쉽게 할 수 있는 것 같았다. 한국의 경우와 같이 보상이니 민원 문제로 인한 제재는 없을 것 같았다. 박물관 안에 들어가면 요성시 전체를 입체적으로 만들어 놓은 모형이 있다. 560만 명이 살고 있는 거대한 도시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것이다. 요성시는 전체 면적은 경상남도보다 조금 작은데 그 중 물이 차지하는 비율이 1/3이나 되는 물의 도시다. 황하를 중심으로 상업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했던 도시로 주변에 인공호인 동창호와 수성광장, 산섬회관 등이 있다. 산섬회관은 중국에서 두 번째로 큰 회관으로 옛날 상인들의 상업정보교환 집결지를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한 회관이다. 동창호는 면적이 4.2㎢, 수심이 2~3미터에 달하며 항주의 서호(西湖)보다는 작고 제남의 대명호(大明湖)보다는 5배가 큰 중국 북방에서 보기 드문 인공 호수로 넓고 깨끗한 호수공원에서는 유람선으로 뱃놀이도 가능하며 호반에는 이백과 두보가 술잔을 나누며 시를 지었다는 역하정과 북극각이 있다.
동창호 주변을 돌면서 지붕개폐식 극장으로 지붕이 180°회전하고 관람인원 3,600명 규모의 ‘명주 대극장’을 관람하였다. 공연이 없어 지붕 개폐는 보지 못했고 극장 건물과 주변을 둘러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요성대학교는 교수 2,000명, 학생 30,000명 정도의 규모이고 한국 유학생이 100여명 정도 된다고 한다.
대표단 환영 오찬을 위해 오전 일정을 마치고 여전히 중국 음식 냄새가 배어있는 식당으로 가니 여소령 부비서장 등이 기다리고 있었다. 부비서장의 환영사를 듣고 답사를 한 후 백주가 돌기 시작했고 어제 마신 술독이 해소되지 않은 상태에서 다시 마시려니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그래도 마시지 않을 수 없어서 조금씩 마시면서 꾀를 부렸다. 어떤 때는 할 수 없이 단숨에 들이켜야 했고 어떤 때는 서너 번에 걸쳐 마시기도 했다. 올해 방문했던 의령군수 일행, 의회 일행, 기관단체장 일행 등의 안부를 물었고, 모두 좋은 경험을 했다는 답변도 했다.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았던 긴 오찬을 마치고 오후 일정은 도저히 소화해 내지 못할 것 같아 호텔에서 쉬기로 했다.
오후에는 산섬회관, 유람선 관광, 요성대학교 견학 등으로 일정을 마쳤다. 오후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소리에 밖을 나가보니 학생들은 중국측 학부모와 접견하고 홈스테이를 위해 중국 가정으로 돌아갔다. 정해진 일정으로는 홈스테이 가정 방문이 오후 6시로 예정되었었는데 시간을 앞당겨 5시에 방문하기로 했다. 서둘러 준비를 하고 나서니 벌써 차를 준비시켜 놓았다. 우리 대표단은 중국가정 방문을 위해 출발하였다. 아파트 단지로 들어가 꼬불꼬불 돌아 학생의 아파트에 도착하였다. 나의 예상으로는 중국가정을 방문하여 선물을 전달하고 차를 한 잔 마신 다음 돌아오는 것이었는데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우리 일행에게 선물을 주기 위해 요성시의 중요한 관공서 건물 등에 붙이는 글의 대부분을 썼다는 서예가를 모시고 와서 우리에게 글을 한 장씩 써 주었다. 학생 방에 있는 피아노를 보고 우리 일행인 여중 음악선생님이 즉석 연주를 하였다. 아리랑과 젓가락장단 등 몇 곡을 연주하고 박수를 받기도 했다. 한 시간 가량 흐른 뒤 방문가정 학생의 부친이 제의하기를 집이 좁아 다같이 식사를 하기가 곤란하니 식당으로 가서 저녁대접을 하겠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또 술을 마셔야 하나?’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우리 일행은 다들 술에 대한 공포감마저 심겨져 있는 상태였으니 오죽하겠는가.
어쨌든 식당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라 모두 식당으로 이동했다. 여전히 특유의 향신료 냄새를 맡으며 식당으로 들어섰다. 칙칙한 여름 날씨와 습기와 황사가 뒤섞인 공기가 시내 전역을 덮고 있는 희뿌연 도시의 풍경이 어깨를 짓누르는 느낌이었다. 피하지 못한다면 즐기라는 말이 얼핏 떠올랐다. 들어오다 보니 백주를 몇 박스 가져다 놓았다. 오늘 저 술을 다 마셔야 하는가 보다 생각을 하니 소름이 돋기도 했지만 웃으면서 자리에 앉았다. 다행히도 백주잔이 여태껏 보았던 잔보다 작았다. 여전히 속이 좋지 않은 편이라 조금씩 마시면서 차를 많이 마셨다. 술의 양보다 차의 양을 많이 하면서 술을 최대한 희석시키면서 마셨다. 앞으로의 일정을 생각하면 기분에 따라 마실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하루에 두 번씩 한 번에 거의 두 시간 이상을 술을 마셔야 하는데 요성 체류기간 중에 9번을 마셔야 요성을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비참한 생각까지도 들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면서 술을 사양하니 건배를 하고 술을 같이 마시지 않으면 친구가 될 수 없다고 하며 꼭 술을 마시라고 한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라 할 수 없이 마실 수밖에 없었다. 뭐라고 이야기하는 부분들을 알아들을 수도 없어 답답한 심정이었고 일일이 통역을 통하여 말할 수도 없어 우리 일행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눈동자만 두리번거리며 중국인들의 표정을 살피며 가끔씩 웃으면서 향신료를 첨가하지 않은 밀가루로만 만든 빵만 뜯고 있었다. 어제부터 밀가루 빵만 한두 개씩 뜯고 있었다. 그럭저럭 시간이 흐르고 식사를 마친 후 초대해 주신 부모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이틀간의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지만 먹은 것이라고는 백주와 밀가루빵 몇 조각뿐이었다. 마침 여중 선생님이 컵라면과 고추장이 있다고 하여 10시 정도 되어 선생님 방으로 모였다. 한국에서 가져온 팩소주와 함께 컵라면과 김치 그리고 고추장을 먹었더니 기분이 상쾌해졌다. 취기가 오르고 그동안의 피로가 몰려오는 느낌이었다. 내일을 위해 이별을 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다음날 아침 식사시간은 7시 30분이다.
2007. 7. 25(수)
3일째 새벽 5시. 눈이 번쩍 뜨이면서 일어나 버리고 말았다. 더 누워 있으면 못 일어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잠이 깨도록 샤워기를 틀고 한참을 서있었다. 아침 식사시간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 도종환 시집 ‘해인으로 가는 길’을 꺼내 읽었다. 한번 읽은 시집인데도 낯설게 느껴졌다. 읽은 지 2년이 넘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차근차근 읽으니 새로운 기분이다. 책장을 넘기다가 멈추고 자꾸 되돌아가는 시가 있다. 읽고 있으니 기분까지 신선해지는 느낌이다.
- 축복
- 도종환
- 이른 봄에 내 곁에 와 피는
- 봄꽃만 축복이 아니다
- 내게 오는 건 다 축복이었다
- 고통도 아픔도 축복이었다
- 뼈저리게 외롭고 가난하던 어린 날도
- 내 발을 붙들고 떨어지지 않던
- 스무 살 무렵의 진흙덩이 같던 절망도
- 생각해보니 축복이었다
- 그 절망 아니었으면 내 뼈가 튼튼하지 않았으리라
- 세상이 내 멱살을 잡고 다리를 걸어
- 길바닥에 팽개치고 어둔 굴 속에 가둔 것도
- 생각해보니 영혼의 담금질이었다
- 한 시대가 다 참혹하였거늘
- 거인 같은, 바위 같은 편견과 어리석음과 탐욕의
- 방파제에 맞서다 목숨을 잃은 이가 헤아릴 수 없거늘
- 이렇게 작게라도 물결치며 살아 있는 게
- 복 아니고 무엇이랴
- 육신에 병이 조금 들었다고 어이 불행이라 말하랴
- 내게 오는 건 통증조차도 축복이다
- 죽음도 통곡도 축복으로 바꾸며 오지 않았는가
- 이 봄 어이 매화꽃만 축복이랴
- 내게 오는 건 시련도 비명도 다 축복이다
아침 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갔더니 바나나가 보인다. 계란과 죽, 그리고 바나나로 아침을 때웠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우리가 식사를 너무 못하여 시 직원이 일부러 바나나를 주문하여 갖다놓았다고 한다. 눈물나게 감사한 일이 아니고 무엇이랴.
오늘 일정은 양곡현을 방문하여 주요 유적지를 돌아보고 양곡현장과 오찬을 한 후 오후에 시장을 접견할 예정이다. 참고적으로 요성시에 대하여 개략적으로 설명한다.
요성시는 산동반도 서부에 위치하며 주변에 제남, 덕주, 태안 등 도시와 인접되어 있으며 행정구역은 2區, 7縣으로 면적은 8,590㎢이고 인구는 560만 명에 이른다. 요성은 북방의 “수상도시”로서 마협하, 도해하, 위하, 조왕하 등 주요하류가 종횡으로 시내 하류망을 형성하여 독특한 경관을 조성하고 있으며 역사적으로 삼국시기의 曺植(조조의 3자) 묘와 “수호지“ 중의 무송이 호랑이를 잡은 경양강(景陽崗)이 이곳에 있으며 요성이라는 이름은 춘추전국시기의 聊邑에서 기원되었거나 聊河에서 기원되었다는 일설도 있다.
주요산업으로는 기계, 경공업, 화학공업, 방직, 자동차, 전력, 의약, 식품 등 산업이 발달되었고 국가급 의약생산기지인 동교집단, 농업용 삼륜차와 자동차를 생산하는 시풍집단(그룹) 등이 있고 한국의 자치단체와는 의령군 외에도 경기도 광명시와 2004년도에 자매결연을 체결하여 현재까지 교류하고 있으며 2007년도에 중국 청소년들이 광명시를 방문한 바 있다.
우리 일행은 요성시의 7현 중에서 양곡현, 고당현, 동아현 세 곳을 3일에 걸쳐 방문할 예정이었다. 그 첫 번째로 양곡현 방문을 위해 버스에 탑승했다. 시내를 벗어나 시골길로 접어들어 한참을 달렸다. 도로는 끝없이 직선으로 뻗어있었고 도로 곳곳에 과일을 내 놓고 파는 노점들이 눈에 띄었다. 농경지에는 옥수수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고 가끔씩 군락을 이룬 마을이 보였지만 노인들 몇몇을 제외하고는 사람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버스를 달리다가 앞에 차가 있을 때 클락션을 빵빵 누르면 비켜주었다. 마주 오는 차선을 침범해서 달려도 클락션을 빵빵 누르면 앞에서 오는 차가 비켜줄 정도다. 그래도 사고가 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차량운행에 대해서는 시내에서도 마찬가지고 북경에서도 마찬가지다. 북경 가이드의 말로는 한국에서 아무리 운전을 잘한다 해도 최소한 한 달은 지나야 북경에서 운전할 수 있다고 웃으면서 말했다.
양곡현에 도착하여 제일 먼저 간 곳은 양곡현의 대표적 사찰 해회사를 방문하였다. 주지스님으로 보이는 스님이 나와 우리를 안내하며 설명해 주었다. 절의 풍경은 그렇게 정리된 모습은 아니고 군데군데 공사를 하다가 그만둔 모습도 있고 마당 한가운데 석탄을 사람 키높이 만큼 쌓아두기도 하였다. 건물 곳곳에 먼지가 쌓여 있는 모습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해회사를 뒤로하고 수호지 인물 중 무송이 호랑이를 때려잡았다는 장소인 경양강으로 갔다. 공원으로 만들어 놓았는데 호랑이를 잡았다는 뜻을 새긴 비석을 가로로 크게 세워 놓았고 원숭이 동물원과 호랑이 동물원을 만들어 놓았다. 공원의 제일 높은 곳에 경양강을 조성해 놓았다. 경양강을 둘러 내려와 점심식사를 위해 이동하였다. 양곡현에서 미리 준비해 둔 식당으로 갔다. 어김없이 백주와 향신료 냄새로 가득한 요리가 나왔다. 자꾸 접해서 그런지 어느 정도는 먹을 만했다. 독특한 향이 풍기는 것을 제외하고는 허기를 채울 만큼은 먹을 수 있었다. 백주도 그런대로 마실만하고. 이러다 중국사람 되는 건 아닌지?
중국 사람들은 손님을 대접하는 입장에서는 푸짐하게 대접해야된다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음식을 다 먹으면 안되고 남기는 것이 손님으로서의 예의이기도 하단다. 여태껏 그 많은 음식을 차려놓고 1/3도 먹지 않고 일어섰었다. 그 많은 음식이 다 버려지게 된다는데 음식물 쓰레기와 전쟁을 하고 있는 한국에서는 욕을 먹을 일이겠지만 문화가 다르니 이해를 하는 수밖에.
점심식사를 마치고 시장 접견에 참석하기 위해 요성시로 돌아왔다. 시장 접견시 공적인 자료교환과 답변을 듣고 선물교환을 한 후 시장실을 구경시켜주었다. 그렇게 넓지 않고 소박한 사무실이었다. 홈스테이하는 중국 학생 중 요성시장의 딸도 포함되었기에 시장실을 볼 수 있도록 배려해 준 것일 게다. 시장실을 나와 직원들이나 당원들 간의 회의가 이루어지는 회의실로 갔다. 북경과 화상회의를 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었다. 시청 견학을 마치고 광장에서 기념사진 촬영을 했다. 방송국에서도 나와 촬영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날 밤 우리 방문단이 텔레비전에 나왔다고 한다. 시청견학을 마치고 교육국을 방문하였다. 각각의 국들이 시장 휘하에 있기 때문에 통제하기는 쉬워 보였다. 한국에서는 교육청이나 경찰청이 따로 분리되어 있어 통제가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직원들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복도에는 교육국답게 학생이나 교사들의 서예작품이 복도에 전시되어있었다.
교육국 방문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던 중 반가운 소리를 들었다. 저녁은 한국식당에서 대접하겠다고 하였다. 모두가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을 게다. 꿈에도 그렸던 한국식 요리를 맛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오랜만에 입가에 군침이 돌았다. 한국식당이라고 해서 한국식 요리를 메뉴로 하는 식당이라고 생각했는데 식당의 이름도 ‘한국식당’이었다. 식당의 경영은 한국 사람이 하고 있었고 중국식 향신료 냄새도 거의 나지 않았다. 식당에 들어서니 홈스테이 학생 중 세 팀 정도가 중국 가정 부모와 함께 먼저 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중국음식이 맞지 않을 거라는 중국 부모의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만찬자리에는 지난번에 의령에서 6개월 동안 근무했던 조예민도 함께 나왔다. 의령에 있을 때보다 약간 살이 붙은 것 같은 느낌이다. 통역을 통해서 의령에 있을 때 군수관사에서 같이 차를 마셨던 것을 기억하느냐고 했다니 당연히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중국인들은 백주를 마시고 한국인들은 소주를 마셨다. 이정 교육국 부국장에게 소주를 한번 마셔보라고 했더니 향이 없어서 맛을 모르겠단다. 평소보다 일찍 저녁을 마치고 돌아와 남는 시간동안 노래방에 한번 가보기로 했다. 요성시에 진출한 한국 기업인 한원전자와 CJ그룹 관계자와(직책과 이름을 기억할 수 없다) 합류하여 같이 주점으로 갔다. 주점에는 한국노래가 나오는 영상기계가 있었다. 외국에서 한국말을 하는 진짜 한국 사람을 만나니 반갑기 그지없었다.
2007. 7. 26(목)
나흘째
눈을 뜨니 새벽 5시였다. 식사를 마치고 8시 30분. 고당현 견학을 위해 출발하였다. 먼저 도착한 곳은 자동차, 농기계, 농업용 삼륜차 등을 생산하는 시풍그룹이었다. 중국에서 생산 1위를 달리고 있는 대규모의 그룹이었다. 시풍그룹에 근무하는 직원이 무려 30,000명, 그룹의 면적은 600㎢이며 매출은 11,187,000,000元(위안)이라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다. 그룹 부지 내에 마을도 있고 백화점 같은 상가건물도 보였다.
이어서 독수리를 전문적으로 그린 동양화가 이고선 미술관 방문하였고, 현 89세로 미국 유학 후 귀국하여 미술에 전념하고 있는 손대석 미술관을 방문하였다. 중국에 있으면서 동양화를 그리다가 미국에서 유학하면서 수채화를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미술관 견학을 마치고 수호지 등장인물을 동상으로 만들어 전시해 놓은 『자부』를 방문했다. 수호지 등장인물 중에 실존 인물은 ‘송강’ 한 명밖에 없다는 이야기도 있고, 36명이 실존인물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어느 것이 진실인지 알 수는 없지만 ‘무송’이나 ‘임충’ 등 소설 속의 등장인물을 소재로 관광지를 조성했다는 것이 대단한 발상이 아닌가 생각된다. 실지로 양곡현 소재지에는 무송이 호랑이를 잡는 형상의 동상이 시내 한복판에 어머어마한 크기로 세워져 있다.
고당현 정부 초청 오찬에 참석하기 위해 식당으로 갔다. 식당을 들어서면서 확 풍기는 향신료 냄새에 숨을 잠시 멈추었지만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니 참을만했고 음식도 그렇게 많이 먹지는 못했지만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향이 없는 음식만 골라서 먹고 있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한·중학생 친선 운동경기를 위해서 요성 제1중학교로 갔다. 중국에는 중학교가 『의령중학교』와 같이 명칭만 붙는 것이 아니고 요성 제1중학교, 제2중학교, 제3중학교 등으로 구분을 짓는다. 우리와 교류를 하는 중국 학생들은 모두 제1중학교 출신들이다. 한국으로 치면 엘리트층의 자녀들인 셈이다.
계획으로는 축구경기를 하려고 했는데 날씨가 너무 더워 실내 체육관에서 탁구와 농구경기를 하기로 했다. 실내체육관의 규모를 보니 한국의 웬만한 대학교 수준이었다. 운동을 하는 시간 동안 우리는 학교를 둘러보기로 했다. 방학인데도 많은 학생들이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다. 공부밖에 살아남을 길이 없었던 우리의 6~70년대를 생각나게 하였다. 수업환경은 멀리서 보는 것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었는데 교실에는 에어컨이 없었고 천장에 매달린 선풍기가 더위를 식혀주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책·걸상도 우리가 초등학교 시절에 사용하던 정도였고 화장실은 칸막이가 없고 변기만 연달아 설치해 놓았는데 저 곳에서 어떻게 용무를 볼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했다. 중국인들이 여러 사람들 앞에서 거리낌 없이 이야기 할 수 있고 자기 생각을 가감 없이 이야기 할 수 있는 것도 이러한 개방된(?) 화장실 문화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학교 운동장은 인조잔디구축구장이 조성되어 있었고 축구장 둘레에 우레탄 트랙이 설치되어 있었다. 쉬는 시간인지 학생 몇몇이 농구게임을 하고 있었다. 한국 아이들과 차이 없이 밝은 표정이었다.
저녁은 교육국 관계자들과 약속되어 있었다. 교육국에는 작년 요성시 청소년들이 의령을 방문했을 때 인솔자로 왔던 교육국 부국장과 과장이 근무하고 있었다. 둘 다 여성으로 중국에서는 능력에 따라 성별에 관계없이 직위를 부여한다고 한다. 요성시 전체 공무원 중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이 30%정도 된다고 한다. 식사를 하는데 도움을 주는 여성은 구내식당 직원이라고 했다. 부국장이 여성이어서 그런지 현을 방문하거나 요성시 관계자들과의 식사 때보다는 편안한 마음이었다. 어제 한국식당에서 도과장을 보고 주윤발을 많이 닮았다고 했다. 그러니 장쯔이나 장만옥 등 중국배우 이름이 거론되고 한국의 대장금 등 드라마가 인기라는 이야기도 나왔다. 처음부터 우리를 안내해 주고 있는 직원 중 도과장이라는 사람은 나이가 45세. 나와 같았다. 그래서 주윤발 친구라고 하면서 서너 번 건배를 했다.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다. 며칠동안 계속 있다보니 집에 돌아온 것처럼 푸근해 지는 느낌이다. 가지고 간 책이 도종환 시집 한 권뿐이라서 시집을 뒤적거렸다. 넘기다 자꾸 걸리는 부분 ‘축복’이라는 시가 또 펼쳐졌다. 읽어 내려가다가 생각해 보니 통역을 위해 준비해 온 선물이 없었다. 우리 쪽에서 통역이 따라가기 때문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마땅히 선물을 해 줄 것도 없고 해서 정성이라도 주는 것이 어떨까 생각하면서 수첩에 축복이라는 시를 써 내려갔다. 제목을 포함하여 23행. 수첩 한 페이지의 줄도 23줄. 꼭 들어맞았다.
2007. 7. 27(금)
닷새째.
어김없이 새벽 5시에 잠이 깨었다. 아침식사는 8시로 시간이 많이 남았다. 7시 쯤 바깥으로 나가니 여전히 자전거 행렬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첫 번째 방문지는 중국 아교 박물관이다. 아교는 노인을 젊은이로 만든다는 신비의 영약이라고 한다. 박물관에서는 아교의 생산과정을 모형으로 제작하여 전시하고 있다. 관람을 끝내고 나오니 아교를 판매하는 곳도 있었다. 특히 여성에게 좋은 보약이라고 한다. 어느 곳을 방문하든지 일반 서민생활과 동떨어진 모습이었다. 도로변에 늘어져 있는 사람들을 보면 평생 이런 곳을 관람이나 할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도로변에는 드러누워 있는 사람, 앉아 있는 사람 등 각양각색인데 세워둔 자전거에 뭔가를 붙여 놓았는데 자세히 보니 『00元』이라는 표시를 해 두었다. 자전거를 파는 게 아니라 자기를 인력으로 사 가면 하루 일당을 얼마 받겠다는 표시 같았다. 소위 인력시장인 것이다.
아교박물관을 나와 조식 묘지로 갔다. 조식은 조조의 셋째 아들이며 문장가로 이름을 날린 사람이라고 한다. 조식묘지는 시립공원 쯤은 될 것 같은데 관리상태가 그렇게 양호하지 않았다. 묘지 뒤쪽으로 조그만 동산이 있는데 꼭데기에 정자를 지어 놓았다. 거기까지 올라가 보니 황화의 위용을 실감할 수 있었다. 누른 황톳물이 굽이쳐 흐르고 있었다. 약 6천~7천년 전에 시작된 고대 4대 문명 중의 하나인 황하문명이 바로 이곳에서 발현되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 오랜 시간동안 수많은 역사를 안고 묵묵히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조식 묘지를 나와 조식 공원으로 갔다. 조식공원 입구에서 내려 공원을 통과해 반대쪽에서 버스에 탑승해야 한다. 공원의 규모는 큰 편이었다. 특이한 것은 도심지 가로변과 아파트 화단에서도 보았지만 잔디가 심겨져 있어야 할 자리에 토끼풀이 심겨져 있었다. 토끼풀은 겨울에도 잘 시들지 않고 일년 내내 푸르게 볼 수 있고 관리가 필요 없다는 장점 때문에 심었다고 한다. 꼭 잔디를 고집할 필요 없이 잔디 관리가 어려운 곳에는 토끼풀 단지를 조성해 보는 것도 고려해 볼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그만 동산이 있어 올라가 보았더니 아래로 인공호수가 조성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넓고 푸르게 펼쳐진 호수를 보니 인공호수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중국의 대부분 호수는 인공호수다. 그 모두가 삽으로 만든 호수라고 한다. 호수를 만들기 위하여 퍼낸 흙은 주변에 모아 산을 만든다. 호수 주변에 산이 있는 것은 모두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오전 일정을 마치고 동아현에서 마련한 오찬 장소로 이동했다. 요성시에서의 마지막 오찬이다. 학생들은 1층에서 식사를 하고 우리는 2층에 준비된 방으로 갔다. 저녁때 환송연만 하면 백주마시는 것도 끝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동아현에서 생산되는 백주는 요성시에서 생산되는 백주 중에서 가장 품질이 뛰어나다고 했다. 향도 다른 지역보다 은은하고 부드러운 느낌이었다. 동아현에서 생산되는 음용수가 다른 지역에도 공급되고 있다고 하니 물 사정이 좋은 지역에서 좋은 술이 생산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별히 손님을 대접하기 위하여 북경오리요리를 내 놓았다. 고소한 맛이 입안에 가득 퍼지는 느낌이다. 마지막 오찬이어서 그런지 장전화 부주임은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백주를 과하게 마신다고 할 정도로 많이 마셨다. 나중에 알아보니 동아현이 장 부주임의 고향이라고 했다.
술맛이 좋다고 하니 특별히 두 병씩 선물로 준비해 주었다. 우리는 선물도 준비해 가지 못했는데 선물만 받는 격이 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예정에는 없었지만 요성시에 진출한 한국기업을 방문하기로 했다. 삼성 휴대폰 부품제작 설비를 생산하여 한국으로 수출하는 한원전자와 옥수수를 주 원료로 사용하는 돼지, 소 등 사료첨가제를 생산하는 CJ그룹을 방문했다. CJ그룹은 1,600억원을 투자하여 공장을 설립하였다고 한다. 생산량의 80% 정도를 중국 현지에 판매하고 있다고 한다. 요성시에서의 옥수수 생산은 중국의 전체 생산량의 50%를 차지한다고 하니 여건이 아주 좋은 편이다. 한국기업의 성공을 기원해 본다.
오후의 마지막 일정으로 중국식 오페라의 일종인 경극을 공연하는 경극원을 방문하여 경극을 관람하였고, 잡기단 교육 기관인 요성시 잡기단을 방문하여 잡기단 공연을 관람하여 중국 전통 예술의 매력을 체험하였다.
요성시에서의 마지막 만찬은 중국 학부모를 초청한 환송연으로 마련되었다. 외사판공실 허세수 주임과 장전화 부주임 도과장, 이과장, 교육국의 이정 부국장과 과장 등 첫날 만찬에서 만났던 직원들이었다. 이제 향신료 냄새도 그렇게 거부감이 생기지 않은 상태라 자연스럽게 환영사와 답사를 하고 그동안의 고마움과 떠나야 하는 아쉬움을 섞어 건배가 오고갔다. 허세수 주임이 먼저 다른 방에 있는 학부모에게 가서 인사를 하고 돌아오니 학부모들도 우리가 있는 방으로 와서 우리 팀들에게 돌아가면서 건배 제안을 했다.
환송연을 마치고 나오면서 통역을 했던 ‘당연’ 선생에게 마땅한 선물을 준비하지 못해서 한국에서 아주 유명한 시인의 시를 한 편 적었으니 한국어 공부에 도움이 될 것 같다고 하며 수첩에 적어놓았던 도종환의 시를 선물로 주었다. 건전한 발상인지 유치한 발상인지 모르겠다. 활자로 새겨진 글보다는 자필로 적어 정성을 담아 주는 게 나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늘로서 당연 선생과는 이별이다. 5일 동안 통역하면서 싫은 내색 한 번 하지 않았다. 한국말을 알아듣기 때문에 듣기 싫은 말도 많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참으로 고맙고 미안하다.
학생들을 중국 가정으로 귀가시키고 이제 떠날 준비를 해야 할 시간이다. 어떻게 된 것인지 짐이 많이 불어 있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술 선물도 받았고 방문하는 곳마다 조그만 것이라도 선물로 받았기 때문이다. 짐을 모두 챙긴 다음 마지막이라는 아쉬움을 같이 할 겸 여중 선생님 방에서 간단하게 소주 한잔하기로 했다.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와 인생에서 값진 체험을 했다는 이야기 등 술이 취하는 줄도 모르고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
2007. 7. 28(토)
북경으로 출발하는 날. 식사를 마치고 호텔 로비로 내려가니 중국 학부모들과 학생들이 먼저 도착하여 북적대고 있었다. 짐을 호텔 로비에 두고 끼리끼리 사진 촬영에 한창이었다. 학부모, 요성시 직원, 학생들, 우리 인솔단 등 모두 합동 기념 촬영을 마친 후 버스에 탑승했다. 학생들은 5일 동안 정이 들었는지 중국학생과 부모들과 번갈아 포옹을 하며 소리 내어 울면서 눈물을 펑펑 흘렸다. 그 모습을 보니 나도 가슴 속에서 뭉클한 무엇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버스가 출발하고 차창 밖을 보니 허세수 주임이 마지막까지 남아 손을 흔들며 우리를 배웅해 주었다. 우리는 모두 학부모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학생들은 한동안 조용하더니 고속도로에 들어서자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고 한 시간 정도 지나자 조용해 졌다. 돌아보니 모두 꿈나라로 가버리고 말았다.
처음 우리를 마중 나왔던 사람들과 함께 제남 공항으로 향했다. 요성에서 떠난 지 두 시간 남짓 지났을까? 버스는 제남 공항에 도착했다. 요성시 직원들이 우리들의 짐을 끌어주며 화물로 부치는 일까지 도와주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최선을 다해주는 마음이 너무 고맙게 느껴졌다. 내년에 한국에 오는 방문단에 대하여 이렇게 해 줄 수 있을까 생각해 보니 눈앞이 캄캄해 지는 느낌이다. 배웅 나온 사람들과 인사를 하고 탑승구를 향해 갔다. 우리가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고서야 자리를 떴다. 그들이 가고 나니 오히려 심적 부담이 들어지는 느낌이다.
북경으로 가는 비행기는 또 별다른 이유 없이 한 시간 연착했다. 북경에 도착하니 시간이 어중간하여 일정을 조정해야 한다고 한다. 궁리 끝에 천안문과 자금성은 내일 가기로 하고 시간 관계상 계획에 있었던 명 13릉은 가지 않기로 했다. 오늘은 이화원을 관광하고 저녁을 먹고 호텔에 투숙하고 다음날 7시 30분에 출발하기로 했다. 북경 시내를 지나 이화원으로 가는 도중 공사에 한창인 2008년 북경올림픽 메인스타디움을 멀리서 볼 수 있었다. 지붕에서 작업을 하는 인부가 코끼리 등에 붙은 개미같이 움직이고 있었다.
이화원에 도착하니 사람으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이화원에 대해서 가이드가 이야기 한다. 이화원은 서태후의 여름별장으로 서태후의 아들이 어머니의 생일날 작은 선물로 마련했다고 한다.
인터넷 검색을 통하여 알게 된 이화원에 대하여 잠깐 소개한다.
이화원은 북경 서북 외각 지역에 위치하며 중국에서 보존이 가장 잘 되어있고 규모가 큰 황실 정원으로 전국 중요문물보호 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화원의 중심을 이루는 곤명호는 15년에 걸친 대 공역 끝에 완성한 인공호수로 여기서 파낸 흙과 돌은 인공산인 만수산을 쌓는데 사용되었다. 이렇게 조성된 공원 안에는 3000여 칸에 달하는 다양한 전각과 누각, 정자 등이 곳곳에 있으며 도저히 사람의 손으로 제작되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조경시설과 자연 환경을 갖추고 있다.
이곳에 처음 원림(園林)이 조성된 것은 금나라 때인 12세기 중엽으로 이미 800여년의 역사를 지닌 유서 깊은 곳이다. 하지만 이곳이 본격적으로 황실의 행궁(行宮)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1750년 건륭제 때 일이다. 그 후 청나라의 실권을 좌지우지했던 서태후가 이곳을 이화원이라고 개칭하고 새로운 해군함선 건조를 위해 조성했던 3000만 냥의 거금을 유용하여 제 2차 아편전쟁 때 파괴되었던 별궁을 다시 재건하였다.
신 중국 성립 직후인 1950년 중국 정부는 그 동안 방치되어 왔던 중국 고대 문화유산에 대한 대대적인 복원 작업에 착수, 이곳 이화원 역시 10여년에 걸친 노력 끝에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재건되었고 지금은 연간 1천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 세계적인 명소가 되었다. 이화원은 그 장대한 규모뿐만 아니라, 상상을 초월하는 대규모 공역으로 조성된 곤명호와 만수산 등과 함께 고대 중국의 건축기술이 총 동원된 각양각색의 전각과 정자, 중국 전역에서 수집된 기암석과 아름드리 수목들까지 어느 것 하나 놓칠 수 없는 미의 극치를 보여준다. 중국 황실의 위엄과 풍요로움을 그대로 현실에 재현한 경이로움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토요일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이화원 내에는 사람들로 인하여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마치 가을에 합천 황매산을 가면 정상까지 밀려서 올라가듯이 줄을 서서 움직여야 했으며 온갖 인종들이 다 모였고 그중 한국 사람들도 눈에 많이 띄었다. 입장료 수입만 해도 엄청날 것이라 생각되었다.
밖으로 나가니 노점상들이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손수레를 끌고 도망을 가는 노점상이 있어 주위를 둘러보니 공안이 단속을 하고 있었다. 한국으로 치면 노상 적치물 단속이다.
이화원 관광을 마치고 저녁식사를 위해 한국음식점에 갔다. 건물 밖에 한글로 된 현수막을 붙여 놓았다. 주인은 한국 사람이고 종업원은 현지인들을 고용하고 있었다. 메뉴는 쇠고기 전골이었고(중국 사람들은 불고기라고 했다) 무엇보다도 김치가 나와 반가웠다.
다음날은 오늘 가지 못한 천안문과 자금성을 보기 위해 6시 30분부터 아침 식사를 하고 7시 30분에 출발하기로 했다. 호텔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고 피로도 풀 겸 소줏잔을 기울이며 북경에서의 첫날을 마무리 했다.
2007. 7. 29(일)
5시에 알람을 맞춰놓고 잤는데 알람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인기척에 눈을 뜨니 정 선생님이 먼저 일어나 알람을 껐다고 했다. 시계를 보니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중국에서 제일 늦게 일어난 날이다. 식당에 내려가 아침 식사를 한 후 한참을 기다려 보아도 학생들은 몇 명밖에 내려오지 않았다. 마냥 기다릴 수는 없어 출발 준비를 하고 내려오니 가이드가 기다리고 있었다. 7시 30분이 되어도 학생들이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방으로 올라가 방문을 두드리니 그제서야 일어난 모양이다. 모두 깨워서 출발하는데 한 시간 지체 되었다. 북경에서는 위험하니까 호텔 밖으로 절대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했는데도 우리가 잠든 틈을 타서 밖에 나가 컵라면을 사다 먹은 모양이다. 그리고 밤늦도록 이야기하고 놀았으니 아침에 일어나기가 어려울 수밖에.
천안문 광장에 도착하니 이른 시간인데도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넓디넓은 천안문 광장에 저마다 깃발 든 사람들(가이드)을 종종걸음으로 쫓아가고 있었다. 천안문은 황성의 정문으로 명나라 영락 15년(1417년)에 건설되었다. 원래 이름은 승천문(承天門)으로 ‘하늘로부터 천명을 받다(承天啓雲, 受命于天)'라는 뜻을 담고 있다. 신축 당시에는 3층의 단순한 목조 건물이었으나, 훗날 모두 불타 없어졌고, 청나라 순치(順治) 8년(1651년) 10개의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山' 자 모양의 거대한 건축물로 재건되면서 천안문이란 이름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천안문 한가운데 중국 사람들이 영웅으로 떠받들고 있는 모택동 주석의 사진이 걸려 있고 현재 천안문 광장의 넓이가 40만㎡로 50만 명 정도의 인원이 한꺼번에 모여 집회를 할 수 있다고 한다.
천안문을 지나 자금성으로 들어갔다. 자금(紫禁)이란 북두성(北斗星)의 북쪽에 위치한 자금성이 천자가 거처하는 곳이라는 데서 유래된 말로, 베이징의 내성(內城) 중앙에 위치한다. 1407년 명나라 영락제가 난징[南京]에서 베이징으로 천도하기 시작할 때부터 건립하여 1420년에 완성하였고 명·청 시대를 통하여 궁전과 궁문을 여러 차례 보수·개축하였으며 명칭도 바뀌었다.
이 궁에는 72만㎡의 면적(동서 753m, 남북 961m)에 9,999간의 방(현재는 8,000여 간만이 남아 있다.)이 있기로 유명한데, 이는 갓 태어난 아기가 매일 다른 방에서 잠을 자면서 모든 방을 돌면 27세가 된다는 엄청난 규모이다. 성의 둘레를 따라 외부의 침략을 막기 위해 폭 52m의 해자 통자하(筒子河)가 둘러싸고 있으며, 해자의 안쪽에는 또다시 높이 9m의 담이 가로막고 있어서 외부에서의 침입이 매우 어려웠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성벽 주위 4곳에 각각 1개씩의 궁문이 있는데, 남쪽의 오문(午門)이 정문으로서 특히 웅대하며, 동쪽을 동화문(東華門), 서쪽을 서화문(西華門), 북쪽은 신무문(神武門)이라 부르며 네 모퉁이에 각루(角樓)가 서 있다. 성내는 남쪽과 북쪽의 두 구역으로 크게 나누어져 있으며, 남쪽은 공적인 장소의 바깥부분으로 오문에서부터 북쪽으로 태화문·태화전·중화전·보화전이 한 줄로 늘어서 있고, 그 동서에 문화전·무영전 등의 전각(殿閣)이 배치되어 있다. 그 중 태화전은 남북 약 33m, 동서 60m의 건물로서 자금성의 정전(正殿)이며, 중요한 의식장으로 사용되었다. 바깥부분, 즉 외조(外朝)의 북쪽은 황제의 사적인 생활을 위한 내정(內廷)으로서 보화전 북쪽에 있는 건청문(乾淸門)으로부터 건청궁(乾淸宮)·교태전(交泰殿)·곤녕궁(坤寧宮) 등이 한 줄로 늘어서 있으며, 그 좌경(左京)에 많은 건물이 있다. 내정은 1925년 이래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으로서 일반인에게 공개되어 중국 문화재의 전당이 되고 있으며 세계유산목록에 등록되어 있다.
자금성 내부의 많은 건물들이 북경 올림픽을 대비해서 인지 보수공사 중인 건물이 많았다. 시간관계상 모든 건축물을 볼 수는 없고 직선으로 통과하면서 볼 수 있는 부분만 보고 나왔다. 지나오면서 보기는 보았는데 모두 기억할 수는 없고 다녀온 후에 자료를 찾아 정리해 두면 후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정리해 둔다.
중국대륙의 대부분은 평야지대인데 만리장성 쪽으로 가면 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만리장성은 고대 중국을 대표하는 건물이자, 중화민족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적 우수성을 과시하는 세계적인 문화유산이다. 그 길이는 무려 12,700리(6,000km)에 이르고 달에서도 보이는 유일한 인공 구조물로 인간의 힘으로 만들어졌다고 도저히 믿기 어려운 만큼 뛰어난 건축사의 기적이라고 한다. 중국에서 처음 장성을 쌓기 시작한 것은 BC 7C경으로 당시 북방 초원지대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중원에 침입해 약탈을 일삼던 북방 유목민족들로부터 백성들의 재산과 인명을 보호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훗날 중원을 통일한 중국 최초의 황제 진시황은 제국의 경계를 확고히 하고, 북방 유목민족들의 침입을 차단하겠다는 대전제 하에 막대한 인력과 물력을 총동원하여, 과거 6개국이 쌓아 놓았던 각각의 장성을 하나로 연결하는 대토목공사를 추진하여 만리장성이라는 인류사에 길이 남을 역작을 만들어 냈다고 한다.
가이드가 세 번째 망루를 지나 철탑이 보이는 곳까지 갔다 오는 것으로 40분의 시간을 허락해 주었다. 올라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밀려서 올라가는 기분이었다. 반쯤 올라가니 땀이 비오듯 쏟아졌다. 언제 다시 오겠느냐는 심정으로 끝까지 올라갔다. 학생들은 아무도 올라오지 않았다. 내가 중국에 온 것이 학생들을 위해 왔는지 학생들이 나를 위해서 왔는지 분간이 가지 않는 순간이다.
만리장성 견학을 마치고 용경협으로 이동했다. 용경협은 산수화 같은 풍경이 병풍처럼 펼쳐진 협곡으로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다. 자동차로는 베이징에서 1시간 정도 걸리며 전체 면적은 119㎢, 총길이는 21㎞, 1973년에 계곡을 막아 댐을 건설하면서 생긴 인공 호수로, 중국과 홍콩이 합작으로 건설한 일종의 공원이다.
노란색 용 모양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5분 정도 용의 뱃속을 지나 댐 위로 올라가면 유람선 선착장에 도착한다. 유람선이 운항하는 구간은 약 7키로미터며 40분 정도가 소요된다. 유람선을 타고 가다보면 공중에 줄을 메달아 놓고 공중 줄타기 곡예를 하는 사람을 볼 수 있고 그 옆에는 번지점프를 하는 곳이 있다. 유람선을 출발하여 번지점프하는 곳에 이르렀을 때 이미 뛰어 내린 사람이 매달려 있었고 협곡의 마지막까지 갔다고 돌아오면서는 뛰어내리는 것을 구경할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돈을 주고 뛰어 내리는 것이 아니라 돈을 받고 뛰어 내린다는 느낌이 머릿속으로 번쩍 스쳐갔다. 물론 요금을 지불하고 점프를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게 자주 뛰어 내릴 수는 없는 것 같고 유람선 타는 사람들을 위하여 전문적으로 점프를 하는 사람을 고용하여 유람선이 지나갈 때마다 뛰어내리게 하는 것 같았다.
유람선의 연료는 모두 가스를 사용하고 있었다. 맑은 협곡의 물이 오염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가 아닌가 생각된다. 환경에 대한 생각이 우리보다 훨씬 앞서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아름답고 웅장한 경관 속에서 생각이 깊어지면 이산에서 저산으로 날아다니는 꿈을 꾸지 않을 수 없겠다. 중국의 무협지가 이러한 수려한 경관 속에서 나왔지 싶다. 유람선을 타고 협곡을 지나가다보면 용경협(龍慶峽)이라는 큰 글씨가 절벽 바위 몇 군데 세로로 새겨져 있는데 여름에는 물이 깊어 새길 수 없어 겨울에 얼음이 얼 때 사다리를 놓고 새겼다고 한다.
용경협 관광을 마치고 나오니 처음 도착했을 때 옥수수를 팔던 장사꾼들이 달려와 ‘두 개 천원’이라며 호객행위를 한다. 그러다 아무도 사지 않으니 갑자기 ‘여섯 개 천원’이 된다. 일 초가 채 지나지 않아 두 개 천원 주고 산 사람도 있고 여섯 개 천원 주고 산 사람도 있다.
용경협을 뒤로하고 다음 목적지로 출발했다. 가다보니 도로변에 과일장사가 죽 늘어서 있었다. 잠시 차를 멈추고 가이드가 내리더니 과일을 한 봉지 사왔다. 학생들이 내려서 과일을 사면 바가지를 쓸 위험이 있다고 직접 사가지고 왔다고 했다.
다음 목적지는 환상적인 조양 서커스 관람이다. 요성시 잡기단이 보여주었던 묘기와 비슷하였고 기량은 더욱 뛰어났다. 요성시 잡기단은 중국의 잡기단 교육기관이기 때문에 어린아이들이 나와서 묘기를 보여주며 가끔 실수를 하기도 했다. 잡기단 교육기관에서 실력을 인정받으면 도시의 서커스단에 입단하는 모양이다. 2부로 나누어 공연을 했는데 공연을 쉬는 휴식시간에 아이스크림을 파는 모습이 70년대 한국의 극장 풍경 같았다. 공연장 바깥에는 한국에서 최근에 보았던 영화 ‘트랜스포머’, ‘괴물’ 등 영화 포스트가 붙어 있었다. 영화상영도 하는 모양이다.
서커스 공연을 보고 마지막 코스인 발맛사지를 받으러 갔다. 남자는 여자가, 여자는 남자가 붙어서 맛사지를 해 주었다. 음양의 조화를 맞추기 위해서라나? 발맛사지에 대하여는 최근 출간된 황석영의 『바리데기』에 보면 주인공 ‘바리’가 영국에까지 가서 발맛사지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직접 발맛사지를 받아보고 책을 읽으니 실제 상황과 책 속의 상황이 겹쳐지면서 실감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바리데기』를 읽고 갔더라면 바리를 생각하면서 소설 속의 장면을 떠 올릴 수도 있었을 게다.
이제 모든 일정을 끝냈다. 무사히 한국에 도착하면 된다. 북경에서 김해까지 단번에 날아간다. 어떻게 7박 8일을 보낼 수 있을까 생각했던 일들이 아쉬움과 허전함 속에 끝나가고 있었다. 시간은 모든 일들을 해결하는 마법사다. 학생들과의 국제 교류이고 대표단 인솔단으로서 마시고 싶지 않은 술을 억지로 마셔야 했고 식사시간도 야릇한 향신료 냄새를 맡으며 최소한 두 시간 이상을 보내며 36°짜리 백주와 씨름을 해야 했다. 학생들은 학생들대로 불만을 토로했는데 자기들은 버스에 태워놓고 어른들은 술이나 마시고 있다는 불평을 듣기도 했다.
중국에 대한 느낌을 한마디로 이야기하라고 하면 ‘무시무시한 나라’라고 이야기 하고 싶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이 있었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 일하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물론 전기가 부족하고 밤에는 할 일이 없기 때문에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겠지만 천안문 사태를 겪고도 끄덕없이 버티고 있는 중국 공산당이나 천안문 사태에 대하여 이렇다할 항의가 없는 중국 사람들. 고구려 역사 왜곡을 위해 추진하고 있는 『동북공정』. 동북공정은 중국이 자국의 국경 안에서 발생한 모든 역사를 중국 역사로 만들기 위해 2002년부터 추진하고 있는 역사연구 프로젝트로서 ‘중국 동북변경지역의 역사와 현상에 대한 체계적 연구 공정’의 줄임 말이다. 현재 중국의 각급학교에서는 북한까지를 중국의 영토라고 교육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 나이가 든 중국인들은 개방이 되기 전에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영어교육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 예로 요성시 호텔에 머무는 동안 호텔 직원조차도 영어는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 저녁에 물이 없어서 호텔직원에게 물을 달라고 하니 멀뚱멀뚱 쳐다보기에 한국어로 말하니 못 알아듣는구나 생각을 하고 water 라고 하니 그래도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그래서 drink 라고 해도 못 알아들어서 포기하고 말았다. 결국 우리 일행 중 통역 선생이 불려 내려와 해결하였다.
현재 성인들은 폐쇄적인 사회에서 영어를 접할 수 없었지만 학생들은 빠르게 영어를 습득하고 있는 추세다. 어순 또한 영어와 비슷해서 배우기도 쉽다. 지금 공부에 열중인 학생들이 성인이 되는 10년 정도의 세월이 흐르면 과연 어떤 현상이 도래할 것인지? 이러한 현실들을 우리 한국 학생들이 가슴 깊이 새겨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의 경제사정 악화로 북한 영토가 중국에 편입되어 버린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국·영·수에 밀려 국사과목이 등한시되고 있는 요즈음 세태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제 나라의 역사부터 완벽하게 습득을 한 후에 그 위에 지식을 쌓아가야 되는 것이 올바른 일이라 생각이 든다. 갑자기 민족주의자가 되는 기분이다.
만리장성에 대한 또 다른 설은 흉노족이나 북방의 오랑캐를 막기 위한 것보다는 고구려인들이 국경 주변을 왔다갔다하는 모습을 보고 겁을 집어먹고 만리장성 축조를 시작했다고 한다. 하기는 중화사상으로 보면 중국의 주변 국가는 모두 오랑캐이니 고구려 또한 오랑캐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생각해 보면 지금의 동북공정 또한 한국에 대한 경계를 위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면 그나마 위로가 된다. 현재 중국으로 진출한 한국기업들이 많다. 기업이 진출했을 때 중국 사람들은 처음에는 잘해주다가 일순간에 발을 빼 버린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중국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가지고 중국인들이 도중에 발을 빼는 요인을 없애는 것이 보다 올바른 전략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아직도 공산당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는 중국인들에 대한 선입견은 표정 없이 딱딱하고 웃음도 없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직접 사람들을 대하고 보니 개개인들은 순수하고 때 묻지 않은 모습이었다. 당원들만 상대를 했으니 그 또한 전체적인 모습은 아닐 것이다. 중학교 시절 ‘승공통일의 길’이라는 교과서에서 북한이나 공산당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빨갱이라든지 당을 이끌어 나가기 위해 반대파에 대하여 밤새 숙청을 한다든지 공산당은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모습일거라는 반공에 대한 세뇌의 결과일 것이다.
중국은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지 해 낼 수 있는 나라가 아닌가 생각된다. 대규모 인공호수가 모두 삽으로 이루어진 역사라고 하니, 그리고 삽으로 산도 만들어 내는 대단한(?) 역사 앞에서 입이 쩍 벌어진다. 중국의 인구 14억 중에서 5,000만 명이 한꺼번에 남한으로 밀려들어온다면 어떻게 될까?
2007. 7. 30(월)
새벽 4시에 기상. 5시 30분에 공항으로 출발한다. 어제 학생들이 늦게 일어나 한 시간이나 늦게 출발했던 일로 인해 새벽부터 조마조마하다. 늦게 나오는 녀석이 있어 비행기를 놓치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학생들 방을 두드리며 독촉을 한다. 학생들 방에는 컵라면 컵이 수두룩하다. 어젯밤에도 컵라면을 사러 밖으로 나갔던 것일까? 현재 학생 13명이 내 눈앞에 보이니 물어볼 필요는 없겠다.
공항에 도착하니 사람들로 북적댔다. 새벽부터 무슨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것인지, 그것도 월요일부터.
수속을 마치고 비행기를 탑승하기까지 한 시간가량 시간이 있어서 선물 살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그런데 한 녀석이 비행기 표가 없다고 한다. 물건을 사면서 비행기표를 놔두고 온 모양이었다. 다행히 가져가지 않고 그대로 있더란다. 끝까지 말썽이다. 여중 선생님은 말을 잃은 지 오래다. 비행기를 타고 보니 또 이유 없는 한 시간의 연착 후에 출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