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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유쾌한 하녀 마리사 / 천명관

by 1004들꽃 2012. 10. 3.

11편의 단편을 묶은 소설집이다.

<프랭크와 나> 랍스터를 수입하기 위해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캐나다로 떠난 가장과 한국에 남아서 남편에게 경비를 보내주는 아내의 이야기다. 결국 아무것도 성사시키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보통의 직장을 구해 살아가는 이야기. 누구든지 한 번 쯤 생각해 본 적이 있을 것 같은 이야기다.

 

<유쾌한 하녀 마리사> 남편이 여동생과 바람이 난 것을 알고 자살을 하기 위해 와인을 두 병 산다. 독이 든 와인은 테이블에 있고 그렇지 않은 와인은 냉장고에 있다. 독이 든 와인은 코르크 마개가 따져있다. 유쾌한 하녀 마리사는 청소를 하면서 코르크 마개가 따진 와인을 막아서 냉장고에 넣고 냉장고에 있는 와인을 테이블 위에 놓아둔다. 여행에서 돌아온 남편은 테이블 위의 편지를 읽으면서 냉장고에 든 와인을 마신다. 욕실에서 나온 그의 아내는 술이 취한 듯 발그레하다. 죽지 않은 자신을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세일링> 아버지 산소에 성묘하고 돌아오는 길에 대서는 아내 숙영에게 만나는 남자가 있는지 묻는다. 선배의 친구로부터 아내의 통화기록을 넘겨받은 대서는 아내를 의심하고 아내는 “이혼”하자고 한다. 궁금해 하는 것과 의심하는 것의 차이. 집으로 돌아가던 그들의 앞에 갑자기 하얀 돛을 단 배가 나타난다. 신호등 앞에 잠시 멈췄던 배는 파란 신호등을 받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간다.

 

<자동차 없는 인생> 간호사와 결혼해 사 년 만에 이혼하고 빈 털털이가 된 인생. 어느 미용실에 들러 머리를 깎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미용사가 여행을 하자고 제안한다. “차 있으시죠?”라는 말과 함께.

 

<농장의 일요일> 친구 가족들과 주말농장에 가서 술을 마시다가 깜박 잠이 든 대서. 그는 꿈 속에서 아버지를 만난다. 동네에서 제일 큰 소를 가지고 있는 아버지. 소를 끌어보겠다고 앞에서 소를 끌었지만 소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뒤에서 소 엉덩이를 치며 “이랴”하자 소는 거짓말같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13홀>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일이다. 13홀 연못에는 골프공이 가장 많이 빠지는 곳이다. 동네 아이들은 13홀 연못에 빠져있는 골프공을 주워 골프장 주변에 있는 가게에 팔아 미제 축구공을 사겠다고 계획한다. 얼마 전 친구들과 놀기 바빠 소를 잊어먹고 빈손으로 돌아온 춘상이가 아버지에게 죽도록 얻어맞고 다음날 집을 나가버린다. 동네아이들은 13홀 연못에 잠수해 골프공을 줍다가 제일 비싸게 받을 수 있는 던롭골프공을 손에 잡고 죽어 있는 춘상을 발견한다.

 

<프랑스 혁명사> 존은 선배 토마스의 부탁으로 새로운 버전으로 쓴 프랑스 혁명사 원고 교정을 맡게 된다. 내용이 자신의 성향과 맞지 않아 단번에 찢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생겼지만 그러지 못한다. 밤새 읽으면서 벽난로에 장작을 넣지 않아 벽난로 불이 꺼진다. 아침에 온 가정부가 벽난로 위에 있던 원고를 불쏘시개로 써 버린다. 하얗게 눈을 뒤집어쓰고 나타난 토마스. 원고 교정은 어떻게 되었는지 묻는다.

 

<더 멋진 인생을 위하여> 조직의 심부름꾼으로 일하고 있는 폴. 많은 사람들을 죽였지만 비즈니스로 사람을 죽인 것과 정말 살인을 하는 것과는 다른 것. 많은 시간이 지난 후 그것들은 후회로 다가온다. 잡지의 맨 뒷페이지 담배광고의 카피. “더 멋진 인생을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할까?

 

<숟가락아 구부러져라> TV에서 유리 갤러가 염력만으로 숟가락을 구부리는 것을 보고 따라해 보니 숟가락이 구부러졌다. 이후 많은 사람들 앞에게 시도해 보았으나 모두 실패한다. 인생에서 실패하고 노숙자가 되어 보호시설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자원봉사자로부터 숟가락을 구부리는 사람뿐만 아니라 책상을 저절로 움직이게 할 수 있는 사람도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자원봉사자는 말한다. 쓸데없는 생각들 하지 말고 빨리 여기서 나가 취직할 궁리나 하라고.

 

<비행기>드라마 작가의 이야기다. 자신이 살아가는 인생과 드라마 속의 인생이 뒤죽박죽이 되어 정작 자신은 무슨 생각으로 살아가는 지를 망각한다. 드라마 속의 인생이 자신의 인생인 것 같고, 정작 자신이 살아온 생은 어떻게 된 것인지 헷갈린다. 비행기 조립에 정신이 팔려 있는 사위가 미워서 최신형 비행기 조립 완구를 훔쳐 자신의 옷장에 숨겨두었는데 옷장을 정리하다 문득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비행기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는다. 사위를 불러 도움을 청하고 어리둥절하던 사위는 장모가 조립했던 것을 모두 해체하고 새로 조립하여 완성한다.

인생은 어쩌면 꿈속에서 헤매는 날들이 아닐까. 멀쩡한 정신으로 있는 것이 오히려 부담스럽고 어색할 때가 있다. 아무리해도 실체가 드러나지 않는 비행기 모형처럼 어느 곳에서 어떤 방식으로 인생은 조립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二十歲>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빈둥거리는 스무 살 시절. 기타를 칠 줄 모르면서도 한 때 유명세를 휘날렸다던 선배. 사실은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떠벌이. 스무세 살이라던 다방 종업원 아가씨. 사실은 그녀도 스무 살이었던. 음악다방이 있었던 시절의 이야기다.

하여튼 제멋대로 흘러가는 인생의 이야기들이다. 그렇지만 낯설지 않은 이야기들. 누구나 경험해 봄직했던 이야기다. 숟가락만 구부러지면 뭔가 이룰 수 있을 것만 같았던 노숙자. 그들에게는 숟가락이 구부러졌다면 노숙자 신세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있다. 그 희망들이 실현 불가능한 것들이지만 그 희망에 매여 그들만의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을 사실인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 기억의 한계는 충분히 그 드라마 작가와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만취가 되어 다음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을 때 가끔 엉뚱한 상상으로 그 자리를 메우기도 하지 않는가.

 

어쩌면 사회에서 일탈이라고 규정된 모습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것 같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낼 수 있는 프랑스 혁명사가 하루아침에 재가 되어 버리고, 남편의 부정을 견디지 못해 자살을 기도했으나 엉뚱하게도 남편이 죽게 되는 역전. 농사를 버리고 골프장 풀 뽑기에 더 열을 올리게 만드는 사회현상의 저편에서 13홀 연못에 빠져 죽은 춘상이. 사회의 기이한 모습들, 유전자의 변형으로 보이는 사회 현상들은 짧은 단편들에서 낱낱이 드러난다. 그 모습들은 <고령화 가족>에서도 비치고, <나의 삼촌 부루스 리>에서도 비친다. 과연 <더 멋진 인생을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할 것 같은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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