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웃는가? 라는 질문으로 시작하여 마지막 문장에서 답을 이야기 한다. 『우리가 웃는 까닭은 현실을 초월하기 위함이에요.』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웃음과 연계하여 풀어낸다. 왜 웃는가에 대하여 “현실을 초월하기 위한 것”이 정답이 아닐지 몰라도 그 대답은 수긍이 가는 답이라 할 수 있다. 현실의 초월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그것 역시 웃음이라고 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가장 가까이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이 부부사이이다. 둘은 항상 싸울 태세를 갖추고 있다. 그 싸움이 분출되지 않도록 서로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위급한 순간에 웃음으로 맞선다. 그 웃음이 갈등을 감추고 화를 누그러뜨린다.
책에서는 프로브게임이라는 것이 나온다. 링 위에 팔걸이의자 두 개가 있다. 두 사람이 유머를 대결하는 것인데 두 사람을 각각 팔걸이의자에 손발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가죽띠으로 묶는다. 삼각대 위에 고정시킨 권총을 각자의 머리에 겨냥하게 하여 고정시킨다. 권총의 방아쇠는 전선에 연결되어 있다. 전선과 검류계가 연결되어 있고 검류계는 두 사람의 심장 부위와 목과 배에 붙어 있는 센서와 연결되어 있다. 한 선수가 이야기하는 동안 한 선수는 듣고 이야기가 끝나면 상대 선수가 이야기하고 반대편이 듣는다. 이때 검류계에 연결된 센서로 전기 저항의 변화를 기록하고 이 데이터는 0에서 20까지 기록된다. 만약 이야기를 들은 선수가 시원스럽게 웃어 19 너머로 올라가면 권총의 방아쇠에 압력이 가해지고 총알이 발사된다. 상대방을 웃기지 못하고 자기가 먼저 웃으면 죽는다.
이 이야기는 베르나르의 소설집 파라다이스. 『농담이 태어나는 곳』에서도 나온다. 섹스를 하면서 웃는 것. 그것이 가장 위대한 웃음이라는 것. 『웃음』에서도 끝은 그렇게 마무리된다. “카산드라의 거울”에서 나오는 “생각의 나무”도 등장한다. 베르나르의 이야기는 계속 연결되는 기분이다. 기어가 맞물리듯 물려서 돌아가는 이야기. 어쩌면 “신”이 전개되는 방식과 “웃음”에서 전개되는 방식은 비슷한 것 같다. 무엇인가를 찾아서 끊임없이 나가가는 것. 결국 그것을 찾아내지만 시원하게 풀어내지는 않는다. 신에서 가장 높이 있는 절대적인 존재는 바로 독자다. 독자가 읽지 않는 이야기는 세상에 드러나지 않고 독자가 그 이야기를 읽으면 이야기는 그때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웃음의 근원을 찾아 나서지만 결국 그 웃음은 자신 속에 있다. 충만한 사랑에서 웃음은 피어나는 것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 뤼크레스와 이지도르는 기자다. 엄밀히 말하면 이지도르는 퇴출당한 기자다. 둘은 프랑스에서 가장 존경할만한 사람으로 꼽히는 코메디언 다리우스가 죽은 후 그 죽음을 파헤치게 된다. 하지만 그들이 밝힌 사실 또는 진실은 사실로서가 아니라 그저 기사로서만 알려질 뿐이다. 기사는 그저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사건으로만 다루어진다. 독자들이 알려고 하지 않는 기사는 기사로서의 가치가 없다. 어쩌면 진실을 밝힘으로써 사회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 일은 다른 방식으로 포장되어 알려지게 된다. 하지만 이지도르는 사건을 파헤치면서 새로운 사실에 직면하게 된다. 기사는 사실을 묻어버릴 수도 있고 알고 싶지 않은 것은 재빨리 잊혀질 뿐만 아니라 알고 싶어 하는 것은 비록 그것이 사실이 아닐지라도 믿고 싶어 한다. 하지만 소설은 허구일 뿐이지만 진실을 이야기한다. 사실이 아니지만 명백한 진실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아무도 진실이라고 믿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은 어떤 방식으로 쓰든 상관없는 것이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진실을 파헤쳐 소설로 표현해 낼 수 있다. 그래서 이지도르는 소설을 쓰기로 결심하게 된다. 김훈의 역사소설을 보면 자신이 쓴 책이 다만 소설로만 읽혀지기를 바란다고 했다. 과연 그 글을 읽고 다만 소설로만 본 사람이 있을까. “절대 읽지 마시오”라는 문구를 보고 그것에 대하여 호기심을 가지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따금 우리의 생각이 명철해질 때면 세상만사가 사람들이 말하는 것만큼 심각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돼요. 그러면 갑자기 우리는 세상사로부터 거리를 두게 되죠. 우리의 정신이 집착에서 벗어나 초연해지면서 우리 자신까지 조롱할 수 있어요』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끼리 만나 서로의 콤플렉스를 보완해 주는 것. 사람이 완전해질 수 있다는 것은 바로 두 사람이 만나 하나가 되고 그 하나가 된 상태에서 웃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은 바로 진정한 사랑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라 소설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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