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는 이야기

송광사 가는 길(2018-5-9)

by 1004들꽃 2018. 5. 10.



송광사 가는 길


송광사 입장료는 어른 개인 삼천 원이다. 어른 단체는 이천오백 원이다. 입장료 영수증 뒷면에는 송광사를 설명하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실려 있다.


송광사는 신라말 혜린 선사가 창건한 후 고려 중엽 보조국사가 크게 중창한 이래 16국사와 많은 고승 대덕스님을 배출한 유서 깊은 승보종찰이다. 오늘날에도 참선수행을 위한 선원과 경전교육기관인 강원, 계율교육기관인 율원을 모두 갖추고 있는 총림으로서 국내 5대 총림 중 하나인 조계총림의 위상을 지니고 있다. 그 외에도 국보, 보물, 천연기념물, 지방문화재 등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


항상 어느 곳이든 가는 곳마다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다. 어딘가를 방문하면 반드시 뭔가를 써야만 했고, 또 쓰기 위해 어느 곳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래서 집에 있어 답답한 생각이 들면 무작정 나서게 된다. 갑자기 송광사를 가고 싶어진 것도 그 때문인지 모르겠다. 의식이 생각하기도 전에 무의식이 먼저 송광사를 가자고 꼬드겼기 때문에 의식은 천지도 모르고 송광사를 가야하는가보다 생각했을 것이다.


글쓰기는 직업이 아니지만 오히려 직업보다도 더 매력적이다. 글쓰기를 생각하면 그저 즐겁다. 직장에 출근하기는 참으로 괴롭고 싫지만 글쓰기에 대해 생각하면 절로 신이 난다. 국가의 발전에 대해 생각한다면 뭔가 거꾸로 된 것 같기도 하지만.


정형화 된 글쓰기 또는 시 쓰기는 언제부터인가 정형화를 벗어났다. 어쩌면 벗어나는 것이 더 정형화 된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는데, 제자리에 머물게 되면 더 나아지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요즈음은 마침표도 하나 없는 산문시가 대세가 되었다. 운율에 대해서 학교 다닐 때 많이 들었지만 그것은 한낱 학교생활일 뿐이었다. 그래도 시는 뭔가 리듬이 있어야한다는 막연한 생각은 가지고 있다. 지금은 엊그제 있었던 일도 다 잊어버리고 말지만 그 옛날 어린 시절의 이야기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현실보다도 더 선명하다. 아마도 시는 운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그 시절부터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었나보다. 그래서 어릴 적 많은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 참 명제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다.


가수들의 노래를 가만히 들어보면 시를 쓰는 방식이나 노래를 하는 방식이나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듣기에 따라서 교과서적인 틀에서 벗어나지 않고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있는가하면 틀을 벗어나 자유롭게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있다. 정형화된 노래를 부르는 가수는 시조를 쓰듯 잘 짜여 진 틀 속에서 아름답고, 자유롭게 노래를 부르는 가수는 자유시 혹은 산문시를 쓰듯 부드럽게 다가온다. 노래 한 곡에서도 음질은 여러 가지이며 박자 또한 자유롭게 오선지를 넘나든다. 너무 벗어나 버리면 편곡의 범위를 넘어선 것이기 때문에 다른 노래가 되어버리지만 너무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는 유동적이다. 까끌까끌하게 넘어가는가하면 춤을 추듯 흔들거리기도 하고 맑고 고운 음색이 있는가하면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음색이 있다. 그들이 마치 하나인 것처럼 어울려서 노래 한곡을 완성된다.


송광사 가는 고속도로 위에서 노래를 듣는다. 가곡 중에서 가장 애처롭다고 이야기하는 이은상 작사 채동선 작곡의 “그리워”가 흘러나온다.


그리워 그리워 찾아와도 그리운 옛 임은 아니뵈네
들국화 애처롭고 갈꽃만 바람에 날리고
마음은 어디고 붙일 곳 없어 먼 하늘만 바라본다네
눈물도 웃음도 흘러간 세월 부질없이 헤아리지 말자
그대 가슴엔 내가 내 가슴에는 그대 있어
그것만 지니고 가자꾸나
그리워 그리워 찾아와서 진종일 언덕길을 헤매다가네


사실 성악은 가사를 외우지 않는 한 성악가의 노래만으로는 가사를 해독할 수 없다. 하지만 가사보다는 소프라노의 맑은 고음이 부드럽게 넘어가기도 하며 노래의 절정을 이루는 부분에서는 마치 파도가 밀려 나오는 듯한 격한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속삭이듯 낮은음에서 목으로는 낼 수 없는 높은음으로 옮겨가는 과정들이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하다. 그렇게 소리에 집중하면서 이어져가는 노래를 듣다보면 그 음만으로도 노래는 가슴으로 들어오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 가수의 목소리는 사람의 목소리가 아닌 것 같고 몸속에 저며 있는 악기의 소리가 아닌가 착각하게 된다. 가수의 몸속에는 사람이 만들 수 있는 모든 악기가 들어 있을 것 같다.


학창시절에 음악시간에 배웠던 <그네>, <얼굴> 등과 같은 노래는 가수의 발음이 귀에 그대로 들어온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배우지 않았던 노래는 천재적인 청각이 아닌 다음에야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다. 요즈음 젊은이들이 즐겨듣는 노래 또한 마찬가지다. 가사를 보면서 노래를 들으면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시는 어떨까? 해석을 옆에 두고 시를 읽어야 할까? 아니면 시 원본을 보면서 시낭송가의 시를 들어야 할까? 둘 다 문제다. 대부분의 시인들은 시집을 내면서도 시 한편 한편에 대한 해석을 내 놓지 않는다. 친분이 있는 작가에게 부탁하여 시집의 말미에 덧붙여 놓은 발문을 통해서 개략적으로 이해할 뿐이다. 그 또한 완전할 수는 없다. 평론가의 주관이 배제될 수 없기 때문이다. 시인 또한 모든 독자를 만나서 이해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시의 해석에 대해서는 가장 편한 방법으로 독자의 몫으로 돌려버리게 된다. 독자가 이해를 하든 말든 작가는 생각할 필요가 없다.


시는 소설이나 수필과는 완전히 다르다. 소설은 내용 자체가 독자에게 말하는 것이고 사건의 발단과 결말을 명확하게 이야기한다. 소설을 읽은 소감을 적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소설의 내용 자체가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암시하고 제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책의 내용을 요약하고 소감을 쓰기를 원한다. 어쩌면 책의 내용을 누구나 알기 쉽게 요약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그런데 시는 그 자체가 함축적이기 때문에 요약할 수도 없다. 작가의 의도도 파악하기 힘들다. 그런데도 시집을 요약하고 소감을 적으라는 사람이 있다. 시는 어쩌면 한 행에 너무도 많은 시간을 포함하기 때문에 해석하기 어려운지도 모른다. 영화 <인셉션>의 내용처럼 시간이 느려지는 꿈속에서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꿈속의 꿈으로 내려가면 시간은 더욱 느려진다. 정상적으로 흐르고 있는 현실에서 꿈속의 꿈에서 일어나는 일을 생각한다면 제대로 이해하기 힘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이제 시인들은 꿈에서 깨어나 현실에서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다. 그렇게 되면 아주 재미없는 시가 되겠지만 그것을 재미있게 만드는 것 또한 시인의 몫이다. 너무 독자에게만 떠맡겨서도 안 된다.


휴게소에 들러 커피 한 잔을 마시고 계속 고속도로를 달린다. 성악가의 노래에서 대중가수의 노래로 넘어간다. 신중현 작사 작곡의 “미련”이 흘러나온다.


내 마음이 가는 그 곳에 너무나도 그리운 사람
갈 수 없는 먼 곳이기에 그리움만 더하는 사람
코스모스 길을 따라서 끝이 없이 생각할 때에
보고 싶어 가고 싶어서 슬퍼지는 내 마음이여
기약한 날 우린 없는데 지나간 날 그리워 하네
먼 훗날에 돌아온다면 변함없이 다정하리라


부드러운 음색과 맑은 고음과 거칠게 깔리는 음색 모두가 한 곡에 다 들어 있다. 한 사람의 목소리가 이렇게 다양할 수 있다. 노래를 들으며 노래와 한 몸이 되어 어깨가 축축 처진다. 한 때 불세출의 여인으로 불리었던 가수의 또 다른 노래는 축축 처진 어깨를 들썩이게 한다. 약 3분 정도의 노래가 끝나면 차는 약 5킬로미터 정도 이동한다. 의령에서 송광사까지는 약 140킬로미터이니 나누기 5를 하면 약 28곡을 들으면 송광사에 도착할 수 있다.


정형화 된 시를 쓰는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시인들은 엄청난 노력을 했을 것이다. 그렇게 흘러서 많은 시간이 지나 현재 산문시까지 오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흔히 정형화되고 정해진 틀에서 벗어나면 죽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사람을 총칭해서 교과서적인 사람이라고들 한다. 어쩌면 시를 쓰는 시인들의 희망은 자신의 시가 교과서에 실리는 것이다.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시를 교과서적으로 쓴다면 교과서에 실릴 수 있을까?


시 한 편에 많은 색깔이 들어갔으면 좋겠다. 고뇌하는 모습이나 부드러운 미소, 또는 펑펑 목 놓아 울고 싶은 내용들이 시냇물 흐르듯이 흘러갔으면 좋겠다. 송광사 계곡에서 흐르는 물은 속세로 흘러 들어가면서 내를 이루어 바위를 만나 굽이치며 번뇌를 씻어 주고 나무그늘에 들어서면 사람들 사이에서 생겨난 화를 식혀 준다. 때로는 들려주고 싶지 않은 이야기가 있을 때 폭포를 만나 소리에 소리를 묻어 버린다. 송광사 일주문 옆에는 돌다리 넘어서 물이 급하게 떨어지도록 인공폭포를 만들었는데 일주문으로 들어가면서 마음을 씻고 부처님을 만나도록 했고 또 일주문을 나오면서 혹시라도 떨쳐버리지 못한 욕을 폭포에 씻어버리도록 한 장치가 아닌가 생각된다.


법정 스님은 무소유를 “집착하지 않는 무소유”라고 했다. 항간에 낡고 닳아서 기워 입은 옷 자체도 소유가 아니냐고 몰아붙이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것은 자신이 생각하는 무소유와 비교해서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인정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합리화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데도 시를 쓰는 사람 입장에서는 시 한 편에서 꼭 마음에 드는 행이라든지 그것도 아니면 낱말 하나라도 마음에 드는 것이 있다고 독자가 이야기 한다면 시인으로서는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한 때 시화전을 하는데 자신의 시화를 도둑맞는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는가. 이마저도 집착이고 욕심이라고 한다면 어쩔 수 없다.


송광사에 가기 전에 불일암부터 가보기로 했다. 불일암으로 가는 길은 <무소유길>이다. 무소유길에는 법정스님의 책에서 발췌한 글귀를 군데군데 적어 놓아 무소유길을 걷는 사람들의 마음을 비울 수 있도록 도와준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내려놓음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비움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용서이고 이해이고 자비이다.
- 법정스님 <아름다운 마무리> 중에서



불일암을 돌아서 나와 산길로 접어들면 삼나무, 편백나무, 상수리나무 등 나무숲을 만날 수 있다. 은은한 숲향을 온 몸으로 받으며 송광사로 내려올 수 있다. 송광사를 둘러 본 마음을 시로 옮겨 본다.



송광사에서


물 바람 새 함께 울다가
물소리 위로 새울음이 겹친다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 소리는 바람소리에 묻히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물소리를 가르며 간다
송광사 대웅전 앞에 서면 번뇌가 사라지려나
한쪽 구석에 자리 잡고 백팔배 하는 사람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힌다
일주문 들어서며 속내 떨쳐버리고,
무소유를 생각하며 대웅전 앞에 섰는데
없었던 생각이 자꾸 부풀어 오른다
대웅전에서 일주문까지 왔다갔다 하면서
물 한 잔 마시며 율원을 생각해 본다
송광사에 살다보면 중이 될 수 있을까
버릴 것 다 버리고 나면 중이 될 수 있을까
불일암에 다녀오면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중이 될 수 있을까
어제 마신 술이 과했는지
횡설수설 떠들어댄 말이 탈이 났는지
송광사 해우소에 쭈그려 앉아 하염없이 똥을 누고
아무 생각 없이 일주문을 나선다



같은 노래를 여러 성악가가 부르지만 그 색깔이 모두 다르다. 어떤 사람은 부드럽게 이어지고 어떤 사람은 강하고 날카롭고, 힘이 있으면서도 투박하지 않는 자기만의 음색이 있다. 대중가수도 마찬가지다. 가수마다 색깔이 다르고 강조하는 부분 또한 다르다. 악보와 똑같이 정확하게 부르는 가수가 있는가하면 자신의 취향에 맞게 편곡하여 부르는 가수가 있다.


시를 쓰는 일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다. 사진을 찍듯이 쓸 때도 있지만 선 몇 개로 사물을 그리는 수채화를 그리듯이 쓸 때도 있다. 이제는 너무 정확하게 사물을 떠올리기보다는 수채화를 그리듯이 잔잔한 사람 사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 쓰고 싶다고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면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마음으로 그려나가고 싶다. 불필요한 표현이나 수식으로 행간을 넓혀나가는 것이 아니라 간단명료한 문장으로 한 폭의 그림을 그리듯이 그려나가고 싶다. 불일암에서 책갈피 하나를 가져왔다. 책갈피에 씌어 있는 문구다.


행복의 척도는 필요한 것을 얼마나 많이 갖고 있는가에 있지 않다. 불필요한 것으로부터 얼마나 많이 벗어나 있는가에 있다. -<산에는 꽃이 피네>에서-




'사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장 소중한 인연, 다시 시작되는 길 위에서  (0) 2018.10.07
산길을 걸으며  (0) 2018.05.14
청도 와인터널(2018-3-10)  (0) 2018.03.12
정암강에 불어오는 봄(2017-3-1)  (0) 2017.03.03
다솔사(2017. 1. 1.)  (0) 2017.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