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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정암강에 불어오는 봄(2017-3-1)

by 1004들꽃 2017. 3. 3.


정암강에 불어오는 봄



● 길을 나선 때 : 2017. 3. 1. 14:00 ∼ 18:00
● 걸었던 곳 : 의령읍 서동생활공원 – 남천교 – 덕곡서원 –  홍의청소년수련원 – 상리 – 박령고개 - 화정면 화양리 – 친환경 골프장 –

                    정암루(의병광장) - 백야마을 – 공설운동장 – 충익사 – 의병박물관 – 구름다리 - 의령읍 서동생활공원.



의령은 남부지방의 특성에 따라 봄은 경기도나 강원도 지역보다 훨씬 빨리 다가온다. 봄이 되면 봄의 흔적을 찾기 위해 길을 나서야 한다. 꼭 어디엔가 묻어 있을 흔적을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따뜻하지만 가끔씩 옷깃을 여미게 하는 바람의 냄새에서도 봄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낙엽이 져서 쓸쓸한 채로 겨울을 나야 했던 나무들도 꽃샘바람의 도움을 얻어 뿌리로부터 수분을 올려서 눈물겹도록 연한 잎을 피워내고야 만다. 그렇게 피었던 잎은 금세 제 모양을 갖추고 연두색에서 초록으로, 그리고 점점 짙은 초록으로 변해가는 것이다. 그 변화의 시작을 느끼기 위해 길을 나선다. 길 위에서 봄이 오는 소리를 듣는다.


의령문학에 <의령을 걸으며 의령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란 주제로 특집을 마련했다. 회원들이 많이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의령에 대한 이야기이니 그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18호부터 시작했으니 올해 네 번째를 맞는다. 칠곡으로 걸었고 정암으로 걸었고 자굴산으로도 걸었다. 이번에는 덕실방향으로 걸어서 친환경골프장을 지나 정암진에 도착하여 정암강의 풍경에 취했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생각해 보았다. 전체 거리는 약 18㎞정도. 하루 동안 생각하며 걷기에 적당한 거리다.


의령의 봄은 의령군 종합사회복지관이 있는 서동 생활공원으로 제일 먼저 찾아오는 것 같다. 녹지공간에 심어 놓은 매화나무는 언제 터질지 모를 분홍빛 꽃몽오리를 내밀며 팝콘 터지듯 폭발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성급한 녀석은 벌써 꽃을 피워 따뜻한 햇살 아래에서 은은한 매화향을 풍기고 있다. 산들산들 봄바람 부는 날 활짝 핀 매화향기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유혹하고, 나그네들은 발걸음을 어디로 향해야 할지 잠시 잊어버리게 된다. 매화향에 취한 발걸음은 정처 없이 흘러가는 구름을 따라 떠가고 한여름 매미소리에 취한 듯 아련한 꿈속을 유영하게 된다. 매화향을 맡으며 생활공원을 벗어나면 덕실지구로 들어서게 되는데 의령사람들은 의령읍의 행정구역인 상리, 중리, 하리를 통털어 덕실이라고 한다.


남천교를 지나면 먼저 하리로 들어서게 된다. 상·중·하리라는 지명은 일본인들이 이곳 덕실지역을 관리하기 쉽도록 구역을 가르면서 이 지역의 정서나 이어져 오는 전통을 무시하고 그냥 상·중·하로 나눠버린 것이다. 새로운 구역으로 정해 붙인 이름 중 가장 많은 것이 <신기>라는 마을 이름이다. 새로 생겼다고 신기라는 지명이 붙은 이름은 자치단체의 읍·면마다 한두 개씩은 가지고 있을 것 같다.


다리를 넘어서니 남쪽으로부터 마파람이 마구 불어온다. 볼을 얼얼하게 하던 겨울바람이 지나가고 부드럽게 볼을 어루만지듯 불어오는 바람은 나그네들에게 온 가슴을 열어젖히고 바람을 맞게 한다. 다리를 넘어서면 오른쪽에 ‘해병대 의령 전우회’라는 간판을 붙인 컨테이너 박스가 눈에 들어온다. 바로 옆에는 덕곡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덕곡서원(德谷書院)은 1985년 11월 7일 경상남도의 문화재자료 제131호로 지정되었다. 1654년(효종5년)에 당시 의령현감이었던 윤순거(尹舜擧)가 덕곡촌(德谷村) 입구의 경치가 좋은 곳을 택하여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웠다. 퇴계선생의 처가가 의령에 있었던 적이 있고, 이때 퇴계선생이 의령에 머물렀던 까닭에 이곳에 서원을 세운 것이다. 1660년(현종1년)에 나라에서 ‘덕곡’이라는 현판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으나 고종 8년(1871) 서원철폐령으로 목조건물 전부가 철거되었다. 1902년(고종39년)에 유림들이 강당과 솟을대문을 복원하였고, 1992년에 묘우(廟宇)를 재건했다.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가운데는 마루이며 양쪽은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인터넷 위키백과 참고)


길가에 있는 밭에도 봄이 살포시 내려앉아 뭔가 움직이는 듯 활기찬 기운이 느껴진다. 하지만 이번 겨울을 보내면서 가장 아쉬웠던 것은 추위가 가기 전에 눈산을 가 봐야하는데 가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쫓기듯 떠밀리듯 시간만 흘려보내고 움츠렸던 어깨를 채 펴기도 전에 겨울이 다 가버렸다. 다시 일 년을 기다려야만 눈산에 대한 기대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내일은 아직 아무것도 실패하지 않은 하루라고 생각하면 기쁘지 않아요?”라는 빨강머리 앤의 말을 빌리자면 올해 실패한 <눈산 가보기>는 아무것도 실패하지 않은 언젠가 다가올 눈이 온 내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니 참으로 기쁘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기대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삶보다는 기대할 수 있는 내일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혜림학원, 제5870부대 15중대, 혜림요양원, 덕실교회를 지나간다. 길가 감나무밭에도 어느새 봄이 찾아왔고 잎을 피우기 위한 몽오리는 눈부실 정도로 청아하다. 공휴일이라 그런지 차들도 띄엄띄엄 스쳐가고 사람들도 눈에 띄지 않는다. 누군가는 너무 아름다워서 눈물이 나는 4월이라고 했는데 기후변화로 인하여 이제 3월 1일부터 눈물 나게 아름다운 나날들이 시작된다. 아직은 벚꽃이 필 생각을 하지 않지만 산수유도 몽글몽글 맺혔고, 목련도 꽃을 밴 봉오리를 탐스럽게 드러내고 있다. 걷다보면 어느새 경남청소년교육개발원 홍의청소년수련원에 도착한다. 옛날 벽화초등학교 건물이다.


의령군 인구는 약50년 전인 1965년 10만7천238명이었는데 그 시절 이곳에서 뛰어놀던 아이들은 지금 대부분 60대를 바라보거나 그 이상일 것이다. 지방자치제가 시행되면서 줄어든 인구는 모두 공무원의 책임으로 전가되고 대한민국의 모든 자치단체는 인구 늘리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인구가 곧 힘이고 돈이기 때문이다.


차도를 따라 설치되어 있던 인도는 중리 운곡마을에 도착하면 끊어지고 만다. 홍의청소년수련원을 지나 상리까지 가는 길에는 인도가 설치되어 있지 않다. 보이는 대로 해석하자면 수련원을 지나서부터는 사람이 걸어 다닐 수 없다. 이제부터는 사람이 아닌 것으로 변장하여 걷는 수밖에 없다. 걸어가는 동안 차들은 속력을 내어 지나가고 사람들은 옷이 펄럭일 정도의 위협에 움찔하게 된다. 두려움을 느낀 사람들은 차가 지나갈 때마다 잠시 길 옆으로 피했다가 다시 길을 가야만 한다. 이런 길을 걸을 때는 멀리서도 나를 잘 볼 수 있는 위치에 나를 두어야 하겠고, 앞뒤에서 오는 차들에 대해서 예의 주시하며 자기방어기제를 작동시키며 걸어야 한다. 자기방어기제가 가장 잘 되어 있는 집단이 공무원 집단이 아닌가 생각 든다. 한 예로 해당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해당 없다는 사항을 기어이 공문으로 받아 놓는다. 전화로 알아본 것은 시간이 지난 후에 근거로 남아 있지 않아 책임회피의 수단으로 사용할 수 없으니 기어이 끈질기게 해당없음을 보고한다는 공문을 받아내고야 마는 것이다.


상신마을을 지나고 산다마을을 지나간다. 산다마을의 안쪽 지역을 ‘안산다’라고 한다. 안산다에 사는 사람을 보고 어디 사느냐고 물으면 “안산다”라고 대답한다. 사는 것인지 안 사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벽화초등학교에 다니던 학생들도 졸업하게 되면 의령중학교에 입학을 하게 됐는데 의령초등학교에 다니던 아이들은 그제서야 덕실 지역을 알게 되고 안산다라는 지명도 알게 된다. 지식의 확장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중학생이 되면서 서로 세계가 넓어지는 경험을 하게 됐던 것이다.


상리를 지나면 박령고개를 넘어 화정면 화양리로 접어든다. 박령고개를 지나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장박교를 지나 지수로 갈 수 있고 다리를 건너지 않고 계속 오른쪽으로 가면 화정면 소재지를 향해 갈 수 있다.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가면 부곡마을을 지나 친환경골프장에 도착할 수 있다. 화정면 부곡마을을 지나 남강로를 따라 계속 걸어간다. 스무 살 무렵 이 길을 걸어서 남강을 넘어 진주로 갈 수 있을까 생각하고 아직 포장이 되지 않은 길을 걷기도 했다. 1박 2일 만에 포기하고 그만 돌아오고 말았지만 의령을 걷는 일은 그때부터 시작됐던 모양이다.


부곡마을을 지나면 정암진까지 남강을 보며 걷게 된다. 물이 흐르는 주변으로 모래톱이 넓게 형성되어 있다. 강의 이편과 저편에서는 골재 확보를 위해 모래 채취를 하고 있다. 모래 판매는 지방재정 확충에 큰 도움이 된다. 강물 위에는 청둥오리가 한가롭게 떼 지어 놀고 있다. 머리에 초록색을 띤 것과 갈색을 띤 것들이 서로 어울려 있다. 청둥오리는 남강뿐만 아니라 의령에서 칠곡으로 이어지는 하천이나 충익사 앞을 흐르는 의령천에서도 많이 볼 수 있다. 청둥오리는 먹이를 잡아먹고 번식을 하고 떼 지어 놀다가 날씨가 따뜻해지면 어느 겨울이 있는 지역으로 날아가는 것밖에 달리 할 일은 없는 것 같다. 저것들을 보며 부러워해야 하는 것일까. 하고 싶지 않은 일들에 싸여 스트레스를 받거나 삶이 귀찮게 느껴질 때면 어리석게도 차라리 저 한가롭게 놀고 있는 청둥오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오감마을을 지나 새로 만든 우회도로부터는 도로 옆에 자전거길이 이어진다. 자전거가 다니지 않으니 지나가는 차량으로부터 안전한 자전거길을 따라서 가면 편안하게 걸어갈 수 있다. 여기서부터는 저 멀리 친환경골프장이 보이기 시작한다. 골프장 너머 어렴풋이 정암철교도 보인다. 자전거길에는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들을 위해 휴식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자전거 타는 사람들을 대신해 잠시 쉬었다 간다. 골프장이 내려다보이는 곳이라 풍경이 좋다. 저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봄바람에 봄이 가득 실려 있다. 무거워서 봄바람이 힘겹지 않을까 장난스럽게 걱정해 보지만 지나가다 슬쩍 내 품에 봄 몇 가지 흘려놓고 가도 탓하지 않겠다.


만천을 지나 수협 사료공장을 지나면 마침내 정암루에 도착하게 된다. 새로 확장한 도로의 시멘트 옹벽에는 의병의 활동 모습이 새겨져 있다. 낫이나 곡괭이를 들고 싸우는 의병, 갓을 쓰고 칼을 휘두르는 선비의 모습, 활을 쏘고 있는 의병의 모습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다. 정암철교에서 의령방향으로 똑바로 보면 정면에 자굴산의 모습이 들어온다. 눈이 하얗게 내린 날 자굴산을 쳐다보면 하얀 눈산이 눈앞으로 성큼 다가와 그 위용을 떨친다. 또 자굴산 정상에 올라가면 가까이 다가와 있는 지리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하얗게 눈을 덮어 쓴 지리산의 모습을 쳐다보면 그냥 눈물겹다.


의병광장의 서쪽 끝에는 정암강 전체의 모습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정자가 세워져 있다. 정자 위에 올라가 황혼에 물들어가는 강을 오래오래 쳐다보면 그 옛날 의병의 함성이 들리는 듯하다. 425년 전의 강물도 이렇게 황혼에 물들었을까. 그때 황혼을 보던 사람들의 마음에는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곽재우 장군은 1592년 4월 22일, 창의하고 5월 18일 의령 지정의 기강에서 왜 선단을 격파하여 곽재우 의병의 존재를 처음 세상에 알렸다. 1592년 5월, 왜는 서울을 함락하고 북진 중이었으며 전쟁을 종결하고 또 조선의 대표적인 곡창인 전라도를 확보하여 군수를 충실히 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전라도 진격작전을 계획하게 된다. 이때 동원된 부대는 왜의 6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는 그의 휘하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恵瓊)에게 2천 병력으로 남강을 건너 북진하여 전라도로 진격하게 하였다.


곽재우는 이때 정암진에 군사들을 매복시켰다. 5월 24일 안코쿠지의 병력은 정암진 맞은편에 도착해 지역 백성을 동원해 도하 지점을 설정하고 정찰대를 보내 통과할 지점에 나무 푯말을 꽂아 표시를 하는 한편 뗏목을 만들어 도하 준비를 했다. 이를 알게 된 곽재우는 한밤중에 의병을 동원하여 나무 푯말을 늪지대로 옮겨 꽂아두고 정암진 요소요소에 군사를 매복시켰다. 날이 밝자 안코쿠지의 선봉대가 남강 도하를 시작하려 했으나 늪지대로 잘못 들어가 의병의 공격을 받고 거의 전멸했다. 이어 안코쿠지의 주력부대가 남강을 건널 때 매복해 있던 의병군이 기습공격을 가하여 물리쳤다. 이 전투에서 패한 일본군은 전라도 진격을 포기했고, 전라도 지역은 보전될 수 있었다. 이 승리로 일본군의 전라도 진격을 막았고, 흩어져 활동하고 있던 의병부대가 곽재우 의병을 중심으로 규합되는 계기가 되었다.(누가 이 나라를 지켰나! 홍의장군 의병선양회 편저 참고)


의병광장에는 정암진 전투도 부조가 세워져 있고 의병광장의 동서를 연결하는 의령관문 안에서는 정암진 전투도, 의병창의도, 큰줄땡기기, 소싸움 장면 등 벽화를 볼 수 있다. 황혼에 물들어가는 정암강을 뒤에 두고 백야마을을 지나 구룡마을을 지나고 공설운동장 뒤를 돌아 의병탑과 충익사에 도착한다. 충익사를 지나면 의병박물관이 나오고 구름다리를 지나면 다시 출발지점인 서동생활공원에 도착한다.


하루를 보낸다는 것. 어떻게든 하루는 가는데 어디에서 누구와 보내느냐 아니면 누구와 어디에서 보내느냐를 두고 따져보면 여행자들은 대부분 누구를 앞에 둘 것 같다. 좋아하는 누구와 함께라면 어디든지 좋지만 부담스러운 누구와 함께라면 어디에서도 즐겁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이런저런 생각할 필요 없이 어떤 누구를 택하여 어느 곳에 가라고 한다면 당연히 1순위는 그림자다. 햇살의 반대편에 그려지는 그림자. 햇살이 뜨겁고 맑은 날이면 더욱 선명해지는 그림자. 햇볕이 따갑게 내리쬐는 날을 좋아하는 그림자와 닮고 싶다. 그 선명한 그림자와 함께 남강과 낙동강에 새겨진 의병의 그림자를 찾아서 걸어보고 싶다. 그림자에게 어떤 말을 하더라도 그림자는 그저 묵묵히 내가 하는 말을 들어준다. 캄캄한 밤이 아니라면 어디에서도 동행이 되어주는 그림자. 그가 없었다면 아마도 나의 오랜 혼산(혼자서 산에 가는 일의 줄임 말)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


의병의 숨결을 느껴볼 수 있는 또 다른 장소. 의령군 지정면의 기강전투가 있었던 곳. 그곳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은 창녕의 개비리길이다. 개비리길을 걷다보면 남강과 낙동강의 합류지점인 거름강(岐江)이 정면으로 보인다. 곽재우 의병의 존재를 처음 세상에 알린 이곳은 6.25전쟁 때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기도 하다.


곽재우 홍의장군은 장군이기 이전에 문장가였다. 시를 쓰면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을 어렴풋이나마 같이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 더욱 마음이 간다. 시에 접근하는 방식을 생각해볼 때 두 부류의 방식이 있을 것이다. 사람을 통하여 시에 접근하는 방식과 시를 통하여 사람에게 접근하는 방식이다. 사람을 통하여 시에 접근하는 것은 자칫 우물 안에 갇히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그 사람을 통하여 시를 보기 시작했기에 그가 제대로 시세계를 헤쳐 나가지 못할 때 같이 침체의 늪에 빠질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을 먼저 생각하며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시를 쓸 수도 있는 것이다.


시를 통하여 사람에게 접근하는 경우에는 사람을 보다 아름답게 시적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한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 전체를 보기 때문에 보다 객관적인 생각으로 사람에게 접근할 수 있다. 무인이기 이전에 문장가였던 곽재우 장군은 임진왜란 때 백성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시인의 마음으로 전투에 임하여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 그분의 시세계와 나의 시세계가 같을 수 없지만 시를 생각하면서 그분의 발자취를 생각하면서 나의 그림자와 함께 하루를 걸을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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