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서원 소수서원
안내판의 설명으로 보면 풍기군수 주세붕이 안향의 위패를 모신 사묘를 세우고 이듬해 백운동 서원을 세우고
후에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이 명종에게 건의하여 소수서원이라는 친필 현판을 하사 받았다. 그래서 사액서원이라고 한다.
소수서원은 숙수사라는 절터에 세워졌는데,
숭유억불정책에 따라 신라 때 세워진 숙수사는 조선조에 와서 문을 닫은 모양이고
그 절터에 사액서원이 서게 된 것이다
불교와 유교의 융합이라는 설도 있으나 세상의 일이란 알 수 없는 일이니
그쯤에서 생각을 접는다.
서원의 입구에 부석사에서 본 당간지주와 비슷한 크기의 숙수사지 당간지주를 만날 수 있다
그 크기로 보아 부석사에 전혀 밀리지 않는 규모의 절이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고
산이 아닌 평지에 세워진 절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으리란 생각이 든다
그에 비해 부석사는 조선시대에도 중수되었고 보수한 기록이 나온다
유학의 기세에 밀렸을까. 스님들을 모두 산으로 몰아 넣으려는 국가적 시책에 의한 피해가 아닐까 생각된다.
서원의 규모는 상당했고 인위적으로 조성한 선비촌과 함께
그 규모는 엄첨났다. 비가 내리지 않았다면 모두 둘러보지 못할 지경이었는데
천둥이 치고 비바람이 부는 날씨여서 견딜만했다.
입구에 늘어서 있는 소나무들이 장관을 이룬다
높이와 굵기에 있어 거의 4,5백년은 된 듯하다. 소나무의 수명이 어떻게 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유교에 의해 배척당했던 불교는
임진왜란 이후 다시 융성해지기 시작하는데
이미 산으로 들어간 절은 다시 속세로 나오지 않고 산에서 그 세력을 키워나간 모양이다.
현재 대부분의 절은 산에 있고 평지에 있는 절은 그렇게 흔하지 않다
전라도 지역에 가면 평지에 있는 절이 많은데 그것은 어쩌면 넓은 평지가 있는 지역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서원을 휘돌아가는 냇물 건너
한가하게 들어 선 정자를 볼 수 있다
물과 함께
그리고 그림자처럼 드리워진 소나무 가지와 함께
풍류를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 저 정자는 아마도 최근에 선비촌을 만들며 지어진 것 같다.
아니면 그 자리에 있던 정자를 최근에 복원했든지.
풍류와 유교
조상을 깎듯이 모시는 학문. 나라의 근간을 세우는 학문
가장 쉽게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이야기여서 그런지 순식간에 조선을 뒤덮은 학문
많은 이야기들도 나왔다. 유교 때문에 조선이 망했다든지
글만 읽다가 외적이 침입해 오는 것에 대비할 수 없었다든지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인 것 같고, 다만 그것을 이용해 정치적인 부분에 관여할 수 없도록 하는
국가적으로 이데올로기로서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처음 프로야구가 도입되었을 때
정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국민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장치로서 이해를 했지만
지금의 해석은 또 다르지 않은가
직장인들의 음주문화를 건전한 스포츠로 돌려 국민의 건강을 챙기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모든 해석은 마음대로 춤을 추고
진실과 사실 사이에서 그 어느것도 진실도 사실도 아닌 것으로 표류하고 있다
그 오랜 옛날 당파싸움에 의해서 문란했던 일들이 아직도 성행하고 있다
무엇을 위하여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다
도대체 세상은 어떻게 나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랬구나
그랬구나
하면서
세월만 보내면 세월은 그저 가는 것일까
어쩌면
마음맞는 사람들끼리 하나의 사상을 체계화시켜 나가는 작업을 위해서
한 평생을 바쳐야 했던 것인지
그것은 또 무엇을 도모하려 했던 것이지 알 수가 없다
문중에서는 제사에 목을 메고
그것을 못하는 사람은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고
그러했던 그 장소를
또 현대의 사람들은 교육의 현장이라며 둘러보곤 한다
박물관도 만들고
없던 다리도 만들어서
사람들을 유혹한다
자연은 자연으로 순응하여
기온의 차이 습도의 차이를 받아들여
물안개를 피우고
뭔가를 도모하려 했던 사람들
현대 사회를 살아가면서 존경해야 할 사람들의 목록에 포함된 사람들
그들은 어쩌면 사상만 남겼을 뿐
사회를 변화시킨 일을 했을까
오히려 그들의 생각들은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더욱 살갑게 다가온다
이천년전, 사천년 전, 그리고 400년 500년 전에 태어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의 사상과 생각들이
지금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진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들보다 더 뛰어난 사람들은 이제 나타나지 않을 것인지
부처의 설법들을 아직도 연구하고 있으며
예수의 발자취를 아직도 따라가고 있으며
퇴계 사상도 국사책에 실려서 연구되고 그 생각들을 논문으로 만들고 있다
오로지 그들의 생각을 빌어야만 무엇인가가 될 것이가?
이 사람은 이런 생각을 했고 저 사람은 저런생각을 했으니 이제는 이런 생각을 해야 할 것이다라는 것도
변명으로만 느껴지고
각종 논문들을 보면 참고문헌 목록이 수록되어 있는데
백지 상태에서 자신의 생각들을 펼쳐낼 수는 없는 것인지 생각이 나는 것이다
연구논문 표절, 남이 써 주었다는 이야기들.
사람들은 과연 무엇으로 살아가는가를 생각하게 하는 세월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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