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저녁
하루가 지나가는 저녁
창가에서 빗소리를 듣다가
문을 나선다
비의 무게에 어깨가 처지고
젖은 머리칼은 눈을 찌른다
정직하게 살 수 있는 것은
비처럼 사는 것이다
비가 되어 축축하게 젖어서
빗물로 세례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더러운 피를 씻어 내고
가식의 껍데기를 벗겨야 하는 것이다
때 이른 가을벌레 소리가
비에 젖어 녹아내리며
벌레처럼 살지 말라고 한다
어두운 빗속에서 길을 잃은 나는
내 안의 가식을 떨쳐내려 하지만
가증스러운 그림자는
발목을 잡고 늘어진다
떨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