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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있는풍경

눈 감고 다니는 여행

by 1004들꽃 2023. 2. 5.

눈 감고 다니는 여행


밤중에 잠이 깰까 두려워 눈 부릅뜨고 버티다가
나도 모르게 스르르 장막을 내린다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지만 어림도 없다
하염없이 길을 걷지만 의도와는 상관없다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다
돌아서려 해도 마음뿐이다
억지로 돌아서려 하면 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아파 포기하고 만다
눈을 감았는데도 감지 않은 것처럼 무엇이든 볼 수 있다
하지만 잡을 수도 없고 벗어날 수도 없다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
고함을 질러보지만 아무도 듣지 않는 것 같다
어쩌면 소리가 나지 않는 고함일지도 모르다
영화를 보면서 영화의 내용을 바꾸지 못하는 것처럼
내 인생을 내가 바꾸지 못한다
날카로운 칼로 장막을 찢어버리면 바깥세상이 보일까
칼을 쓱 갖다 대자 누군가 덜미를 잡아 당긴다
너는 벗어날 수 없어!!!
벙어리로 살아온 인생 또 벙어리로 살라고 한다
입이 있는 사람들은 떠들다가 소문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입을 지워 버리면 굶어 죽을 것 같아 차라리 눈을 지워버린다
눈이 없는 세상에서는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다
몸을 움직일 수 없어도 눈앞에서 온갖 이야기가 펼쳐진다
눈이 지워진 자리에서 꽃 한 송이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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