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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있는풍경

낮잠

by 1004들꽃 2018. 4. 8.



낮잠


어느 날 문득 잠에서 깨어나 보니
늙어 있는 내가 나를 보고 있다
긴 잠에서 깨어나 그냥 늙어 있는 나를 보며
그동안 무엇을 했던 것일까를 생각했다
수많은 밤을 뜬눈으로 보내며
글자와 글자 사이를 오갔던 시간
주인공의 대사와 슬퍼하던 모습에 빠져
스크린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나날
아가씨에서 아내가 된 여자와
함께 살아온 숱한 날들이
모두 기억에서 사라지고
잠이 덜 깬 멍한 눈으로
몇 시간 째 허공만 응시하고 있는
늙은 얼굴의 사내는
무엇을 찾는지도 모르고
두리번거리고 있을 뿐이다
저절로 커버린 아이들은
이제 나를 본체만체하고
외출이 잦은 아내는
행선지를 알려주지 않는다
까무룩 낮잠에서 깨어났다가
다시 까무룩 해지면
시간은 한 시간씩 성큼성큼 지나간다
어른이 된 아이와
외출을 나간 아내가 돌아올 때까지는
몇 번쯤 더 까무룩 해지면 되는 것일까
기억도 없이 허공만 바라보는
늙은 나를 내가 발견하지 못하도록
낮잠에서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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