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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가을 산행

by 1004들꽃 2008. 5. 28.

가을 산행


  가을단풍이 한창인 자굴산을 찾았다. 자주 등산을 하고 싶은 마음은 꿀떡 같았지만 잠시 짬을 내는 것도 그렇게 싶지만은 않다. 집안의 행사, 직장에서 뜻하지 않았던 일, 그리고 비가 온다든지. 그렇게 지내다 보면 일년이 지나도록 등산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할 수도 있다.

  오늘은 억지로라도 자굴산을 찾아볼까 생각을 했다. 여럿이 가는 재미도 있지만 오늘은 혼자서 가볼까 생각을 했다. 하지만 걸리는 것이 있었던지 몇몇 친구에게 전화를 해 보니 모두 갈 수 없는 사유가 있었다. 혼자서 갈 수 있는 여건이 허락된 것이다. 시간은 오후 두 시를 넘기고 있었다. 더 늦기 전에 서둘러 채비를 하여 물 한 병과 매실주 한 병을 빈 배낭에 챙겨 넣고 운동화 끈을 질끈 동여 메고선 휘파람을 불며 산으로 떠났다.

  며칠 전 회원들과 함께 자굴산을 찾았던 생각을 해 보았다. 아홉 명이 갔었다. 그동안 산을 즐기지 않았던 회원들은 입에 단내가 나도록 걸었고 거의 탈진할 것 같은 인상을 보이는 회원도 있었다. 같이 왔기 때문에 같이 가야한다는 생각으로 내내 걸어갔지만 땀방울이 볼을 타고 흐르는 간지러운 맛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혼자서 뛰어 올라가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 보았지만 객기 부리는 것도 아니고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산을 오른다는 것은 운동이라는 측면도 무시할 것 아니지만 그 보다 더한 것은 마음을 정화할 수 있음이라 생각한다. 요즈음 같이 직장에 다니면서 한 주내 받았던 스트레스가 산을 오르는 고통과 그로 인하여 흐르는 땀방울에 얼마간이라도 씻겨 나가지 않을까 생각하기 때문이다. 참석하지 못한 회원들이 많아 아쉬웠지만 산에서 풍기는 맑은 공기와 나무들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맑은 하늘과 후다닥 놀라 달아나는 산새들이며 다람쥐들이 정겹게 느껴져 그러한 생각들도 잠시. 산이 주는 신선함에 빠져 모두가 어린시절 소년 소녀로 돌아간 듯했다. 그렇게 회원들은 아이고 아이고 힘들어하면서도 웃음꽃을 피우며 무사히 산행을 마칠 수 있었다.

  오늘은 뻑적지근한 몸을 찜질방에 가서 구워볼까 어쩔까 생각하다가 산행을 마음먹었다. 어떻게 해서든 땀이 흐르게 될 것은 분명하였기 때문이다. 토요일이라 일과를 마치고 돌아와 시간이 어중간했지만 내친김에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등산로 입구에 차를 세워두고 거의 비다시피 한 배낭을 메고 한발짝 한발짝 떼어놓으니 산은 점점 내 속으로 들어왔다. 오늘은 아무 생각 없이 걸음만 걸어보자는 생각으로 시작을 했다. 몇 분 걷지 않아 이마에서 땀이 나기 시작하더니 이내 손수건을 흠뻑 적시고 말았다. 산 중턱까지 올라가니 도저히 걸음을 걸을 수가 없을 정도로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점심을 늦게 먹고는 급하고도 빠른 등산을 한 탓이다. 하는 수 없이 잠시 앉아 쉬는 수밖에 없었다. 물을 마시니 머릿속까지 시원해지는 게 암반수가 따로 없었다.

  잠시 쉬고 나니 뒤틀린 속도 바로 잡혔는지 가볍게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여기저기서 산새들이며 다람쥐들이 겨울채비를 하는지 후두둑 퍼드득 하며 공중으로 산비탈로 바삐 돌아다니고 있었다. 사람들은 겨울채비를 얼마나 하고 있는 것일까. 옛날과는 달리 먹을거리도 입을거리도 풍족하니 따로 준비해야 할 그 무엇이 있을까. 세월도 점점 빠르게 느껴지는 이때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 것일까. 그저 그렇게 세월이 흘러 가는대로 꼬박꼬박 나오는 월급에 의존하며 이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그러나 뾰족하게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생각나는 것도 없고 그렇다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해 놓은 것도 없다.

  산은 변함없이 그대로이다. 누군가가 오르려하면 오르게 하고 내려가려하면 내려가도록 언제까지나 누구에게나 배려한다. 기다리는 것만이 산이 해야 할 모든 것일까. 나무를 키워내고 산새들을 오게 하고 낙엽도 뿌리면서 등산객을 유혹한다. 그러면서도 묵묵하게 말이 없다. 오랜 세월동안 다져온 그러면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한 위인처럼 그렇게 우뚝 솟아 있다.

  어느새 산은 발밑에 서고 난 그 위에 앉았다. 내려다보니 희뿌연 구름에 싸여 사람 사는 동네가 선명하게 들어오지는 않았다. 산은 그 모습들을 보여주기 싫었던 모양이다. 애써 알 필요도 없었다. 불현 듯 스쳐지나가는 생각. 알 필요 없다는 것.

  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많은 관계와 관계 속에서 알지 말아야 할 것들을 알게 되는 것과 몰라도 될 것을 알려고 노력하다가 많은 사건들이 일어난다. 어쩌면 그것이 살아가는 모습일지도 모르지만. 세상에 비밀이라는 것은 없다지만 많은 사람들과 관계들이 비밀을 만들어내고 또 그것을 지키기 위하여 비밀을 만들고 그것이 꼬리를 물고 끝내 감당할 수 없는 것으로까지 비약될 수도 있다. 비밀 하나쯤은 없는 사람도 없겠지만 이미 만들어져 버린 비밀이라면 가루가 되어 뿌려질 때까지 가져가야 할 것이고, 살아가면서는 진실한 마음으로 세상을 만나고 사람을 대하면서 투명하고 맑은 관계를 만들어가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인간이 사는 의미이며 그것으로서 사는 맛이 나는 것이며 그것으로서 행복해 질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사는 것은 어쩌면 행복이라는 보이지 않는 허상을 끝없이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바로 옆에 있으며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멀리서 찾아 헤매다 끝내 죽음의 문턱에서 그 사실을 발견하는 것은 아닐는지.

  해는 서쪽으로 기울어가고 올라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야 할 시간. 산을 오르고 내리는 일은 발걸음을 반복하여 떼어놓는 것이지만 또 다른 의미가 있다. 방구석에 틀어박혀 몇 시간을 고민하는 시간이나 산을 올라갔다 내려오면서 고민들을 삭이는 시간이나 차이가 없을 것 같다.

  산을 오르는 자 중 악한 자가 없다는 말도 있다. 언제나 말없는 묵묵함으로 무모하게 산을 정복하려는 자들에게 어리석음을 일깨워주는 산의 철학을 느껴본다. 그 외에도 산은 많은 의미를 우리들에게 줄 수 있을 것이다. 오늘같이 이렇게 단풍의 향기에 젖은 가을 산을 오를 때는 더욱 그러하지 않을까.


의령문학 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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