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굴산 산행(2001. 8.10)
휴가의 마지막을 온 몸으로 느끼며 자굴산 산행을 택했다. 처음 계획은 행정발전연구회 회원 몇 명과 함께 목요일 밤기차를 타고 계룡산을 갔다가 다시 밤기차를 타고 토요일 새벽에 도착하는 것으로 일정을 잡았으나 회원들의 개인사정 발생 등으로 무산되었고, 꿩 대신 닭이라고 친구와 의령의 명산 자굴산을 가기로 마음먹었다. 오전 10시에 출발하기로 하였는데 오전 9시 50분쯤 비몽사몽간에 딸아이의 “성진이 아빠다.” 하는 소리가 들렸다. 전날 마당에 풀을 뽑고 땅을 고르고 그 곳에 잔디를 심었다. 허리가 욱신거리고 뼈마디에서 오도독 오도독하는 소리가 들리도록 무리를 했던 것이다.
“성진이 아빠라니깐” 또다시 들려오는 소리에 벌떡 일어나 보니 전화가 와 있었다. 응… 그래!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당초의 계획보다 30분 늦은 10시 30분에 출발하자고 하고선 부랴부랴 세수하고 밥먹고 준비를 하니 꼭 10시 30분이 되었다. 어쨌든 출발이 되었다. 전날의 무리로 인하여 온 몸이 욱신거리고 있었으나 표현은 못하겠고 반쯤 끌리다시피 자굴산을 향했다. 캔맥주 3개, 라면 5개, 부탄가스 5개를 사니 7,000원 정도. 둘이서는 다 먹지 못할 것 같아 라면 3개와 부탄가스 1개, 그리고 캔맥주 3개와 물을 배낭에 넣고 발을 내딛었다. 채 다섯 걸음을 못 디뎌서 숨이 차기 시작하였다. 아아! 이럴수가… 하지만 과거의 산행 경험을 머릿속에 생각하며 한발 두발 움직이다 보니 땀이 나기 시작하고 점차 움직임도 나아지고 있었다. 약 20분 가량을 가다가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땀이 비 오듯 몸을 적셨다. 진정 오랜만의 경험이다. 몇 년 전 월출산 산행을 갔을 때이다. 네 명이 한번 쉴 때마다 1되짜리 PT병을 비우곤 하면서 몸속의 불순물을 땀으로 배출시키는 작업을 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날은 막상 물을 마셔 보려하니 전날 냉동실에서 꽁꽁 얼어버린 PT병의 물은 흐린 날씨 탓인지 녹지 않아 병 주둥이에서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로는 성이 차지 않았지만 자굴산의 특성상 물을 구할 곳은 없고 얼음 사이로 조금씩 녹아있는 물을 쪽쪽 빨아먹었다. 담배 한 대 피면서 갈증을 달래야지 별 수가 없었다.
다시 출발을 하니 발걸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저 멀리 정상에는 구름인지 안개인지 분간을 할 수 없는 하얀 물체들로 뒤덮혀 정상의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었다. 한참을 걷다보니 낯익은 소리가 들려왔다. 후두둑… 빗소리였다. 땀에 젖은 몸을 식혀 줄려는지 우산도 없었지만 참으로 정겹게 느껴졌다. 옷이 젖었지만 그것이 비 때문인지, 땀으로 인한 것인지 모를 지경이었고 그에 상관할 것 없이 우리는 계속 정상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번 주중에 많은 비가 내린 탓인지 산길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였고 등산로 주변의 소나무와 꿀참나무 등 식물들의 잎사귀가 제 빛을 발하고 있었으며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씰룩매미와 왕매미, 각종매미, 귀뚜라미 등 온갖 곤충들의 합창이 바람소리와 어울려 자연 속에서 거대한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냈다.
한걸음 한걸음 쌓이다 보니 절터샘에 도착하였고 어느새 비가 그쳐 있었다. 그토록 염원했던 물을 만나니 기쁘기 한량없었다. 그곳에는 타지에서 온 듯한 중년으로 보이는 세 부부가 막 정상에서 내려 와 목을 축이고 있었다. 정말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나도 늙어 가면서 아내와 함께 저렇게 같이 다닐 수가 있을까? 그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생각이 문득 스쳐 지나갔다. 산은 질색이야! 내 다리 가지고는 산에는 한 발짝도 못가니 알아서 하라고!! 하는 아내의 말을 상기시켜보니 입가엔 미소가 머금어졌다. 우리는 얼음만 가득차 있는 PT병에 물을 채우고 정상을 향했다. 금지샘 쪽으로 방향을 잡았고 그때까지 친구가 메고 오던 베낭을 받아 짊어지고는 마지막 피치를 올렸다. 그동안 산행을 게을리해서인지 다리가 떨리고 땀이 비오듯 쏟아졌다. 바쁜시간을 쪼개서라도 자주 산행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밀려오고 있었다.
의령읍사무소에 근무하면서 산불담당을 했을때의 일이다. 그때는 산불비상근무를 돌아가면서 할려다보니 직원들의 협조가 잘 되지 않아 근무조만 편성해 놓고 혼자서 일요일마다 도맡아 산불예방 순찰을 돌았었다. 오전에 일어나 아침을 간단히 먹고 9시에 출발하여 칠곡면 내조리에서 올라가는 코스를 잡아 정상에 발을 디디고선 곧장 내려와 집에와서 점심을 먹을때면 12시 정도가 되었다. 혼자서 다니니 물 한병만 있으면 되었다. 그리고선 점심을 먹고 사무실에 출근하여 산불예방 홍보트럭을 끌고 의령읍을 몇바퀴 돌면 하루가 갔다. 그런데 어느날 자굴산 정상에 올라갔는데 의령읍 척곡마을 산 정상 쪽에서 시커먼 연기가 올라오는 것을 보았고 그 즉시 산을 뛰어내려와 산불이 난 곳으로 뛰어갔다. 정상에 오르니 불길이 심상치 않았고 휴일인 관계로 많은 동료들이 동원되지 못하였으나 열심히 불을 끈 덕분에 불길을 진압할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잠시 쉬고 있는데 또 불이 났다는 전화가 와 밤중에 다시 산불진화에 나섰다. 어느 정도 끈 다음 이 정도면 되었겠지 하는 생각으로 내려왔는데 다음날 새벽 6시에 전화가 와 다시 재발했다는 것이었다. 자굴산을 올라갔다 내려왔고 산불 때문에 척곡마을 산을 5번 오르락 내리락 하였다. 겨우 산불진화를 끝내고 나니 12시가 되었다. 몸은 녹초가 되었고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표어가 머릿속에 뱅뱅 돌았다. 다시는 생각하기 싫은 사건이었다. 그때 지속적으로 산행을 하지 않았다면 자굴산을 다녀와서 무려 다섯번이나 산을 오르락 내리락 할 수 없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숨이 턱에 차서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니 안개로 인하여 산아래 마을의 형상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뭇잎을 스쳐 우리들에게 불어오는 바람이 싸아하게 가슴을 적셨다. 구름속의 산책이 따로 없었다. 눈이 아무리 많이 온들 이렇게 새하얗게 세상을 덮어 버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풍경을 뒤로하고 정상을 향했다. 곧 정상에 도달하였고 시간을 보니 12시 30분이었다. 11시에 출발을 하여 1시간 30분이 소요되었다. 자굴산 정상 897m라고 새겨진 돌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잠시 쉬었다가 라면을 끓여 먹고는 캔맥주를 마셨다. 라면봉지와 깡통을 봉지에 담아 베낭에 넣으니 쓰레기 한점 버릴것이 없었다. 며칠전 대원사 계곡에서 맡았던 쓰레기 냄새가 상기되었다. 모두가 자기가 가져온 쓰레기를 되가져 간다면 그렇게 오염되지는 않았을 것이란 생각을 해 보았다. 많이 준비해야 된다는 것. 그래서 남들보다 잘 살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 일까? 요즈음 문제가 되고 있는 관광버스에서의 알지 못할 행동들. 관광버스를 운전하는 기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손님들이 먹다버린 술과 음식이 너무할 정도라고들 한다.
이젠 우리나라의 생활수준이 관광버스를 타고 관광을 할 정도가 된다면 먹는 것에 대해서는 그렇게 집착할 정도는 아닐것이라고 본다. 집을 떠나 여행을 할 때 먹고 싶은 것 조금씩 참고 일상에 바빠서 느끼지 못한 생각을 해 보는 시간을 가져본다든지 여행을 하는 동안 지나쳐 가는 곳에 대하여 느낌을 정리해 본다든지 하는 것은 어떨까? 가족들과 여행을 할 기회가 있다면 그 동안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터놓고 할 수 있는 기회도 될 것이다. 이러한 황금같은 기회를 흥청망청 술과 화투놀이를 즐기는 것으로 마무리하기엔 너무도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점심을 먹고 하산을 할려고 하니 어느새 안개가 걷혀 있었다. 하얗게 뒤덮혔던 산과 마을들이 제 모습을 드러내었다. 조만간 다시 올 것을 기약하고 자굴산 정상과 이별을 고했다. 내려오는 발걸음은 여태 느껴보지 못했던 가벼움을 느낄 수 있었다. 산을 오른다는 것은 자기와의 싸움이다. 고통스럽다는 이유로 중도에 포기 해버리고 하산을 해 버린다면 인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주어진 일이 어렵고 힘들더라도 참고 견디어 훌륭한 결과를 이끌어 내어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사람들이 있다. 존경받는 일을 하지는 못할지라도 자의든 타의든 나에게 주어진 인생을 내 능력이 닿는 곳까지 열심히 해 보겠다는 의지와 행동이 동반될 때 그는 인생의 끝에서 후회없는 결과물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그와 반대의 결과를 얻을 것은 뻔한 일이다. 산행을 시작할때의 설레임과 중턱에서의 힘든 육체를 제어하여 정상에 오르게하는 정신력. 그리고 그 노력의 결과로 보여지는 탁 트인 세상, 하산하면서 그간의 역경을 정리해보는 시간을 가져 보는 것. 그 모든 것들이 땀의 결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