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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시작詩作에 대한 단상

by 1004들꽃 2008. 5. 28.

시작詩作에 대한 단상

 

 

문학은 어쩌면 인류가 이 지구상에 오기 훨씬 전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인류가 이 세상에 오면서부터 이미 만들어져 있었던 작품들을 하나씩 들추어내는 작업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류의 문명이 발달해 가면서 문학은 정치 속에 편입되기도 하고 결별하기도 했었다. 최근 문학 작가들의 성향에 대하여 친일인지 민족문학으로서의 저항문학인지의 논쟁을 계속하고 있는 것은 그것을 대변해 주는 것이다.
문학인들은 그 시대 최고의 지성인이라고까지 일컬어지기도 한다. 그러한 문학인들이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친일문학이든 민족문학이든 시대를 잘 타고나야 되는 모양이다. 그들은 그 시대를 살아가면서 그들 나름대로의 철학을 제시하면서 변화의 주체로써 활약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만큼 그들은 현실을 직시하며 미래를 예견해 가면서 불특정 다수의 의식을 깨우쳐 주기 위하여 뼈를 깎는 노력을 했을 것이다.
정보통신의 발달과 함께 문학도 종이문화에서 통신문화로 거듭나고 있다. 음악과 그림과 시가 어우러지는 모습이나 전자시집, 자신의 목소리를 녹음한 시낭송까지 인터넷을 통하여 접할 수 있다. 그것은 이제 문학이 어느 특정인에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것을 즐기며 공유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칫 그로 인하여 문학이 가지는 본연의 의미가 퇴색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다른 의미로 보게 된다면 인터넷 문화가 발달되기 전에 소수의 문학인들이 독점했던 문화가 대중화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 중에서 최악의 경우도 나올 수 있지만 최고의 경지를 발견할 수도 있는 것이다.
요즈음 문학인 행사에 참석해 보면 대부분 시낭송과 통기타 가수의 음악을 섞어 진행하고 있다. 이른바 시낭송 잔치인 것이다. 시낭송을 할 때 자신이 준비해 온 음악을 깔기도 하고 컴퓨터로 시화를 만들어 빔 프로젝트를 활용하여 다양한 화면까지 준비하는 것이 요즈음의 추세다. 자신의 문학을 알리고 그 속에 담긴 메시지를 다양한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서 컴퓨터를 알지 못하면 불가능한 시대가 열린 것이다.
자신의 시를 자신이 낭송하던 시대와는 달리 이제는 전문 시낭송가가 양산되고 있으며 그들끼리 새로운 장르를 개척해 나가고 있다. 7, 80년대에 한창 유행했던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 ‘얼굴’ 등으로 음악다방을 떠나지 못하게 했던 박인희의 시낭송은 많은 사람들이 시를 가까이 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차분하고 정제된 목소리는 오히려 시 자체보다 시 낭송가의 분위기에 젖어들게 만들었다는 것도 부인할 수는 없다. 문학도 읽고 쓰는 것에서 듣는 문학으로 바뀌어가고 있는 것인가?
시작詩作활동을 한다는 것은 그 용어에서 많은 상상을 하게 만든다. 活動이라는 용어는 살아서 움직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시가 살아서 움직인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일까? 언뜻 시낭송이나 화려한 시화전 등을 떠 올릴 수 있다. 하지만 시라는 것은 자기 내면과의 싸움이라고 감히 이야기 하고 싶다. 시 한편을 써 놓고 어느 누구에게 해석하라고 하면 그 해석이 작가의 생각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시가 어렵든 그렇지 않든 모든 사람들의 생각은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다양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민족문학의 부류에 드는 시들을 보면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을 시를 통해 승화시키고 있다든지 허무를 통해서 민족이 서 있는 위치를 망각하지 않도록 일깨운다든지 많은 해석이 뒤따른다. 처음 교과서를 통하여 그러한 시들을 접했을 때 그저 사랑 놀음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시험문제를 풀기 위하여 다시 시를 읽어 보았을 때 생각 없이 읽었을 때와 완전히 다른 시가 되었던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시들에 정답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학교에서 배운 내용이나 참고서에 정해져 있는 정답이 아닌 경우에는 틀린 답이 되기 때문에 시험 점수를 많이 받기 위해서는 정답만 알아야 하는 것이다.
시라는 것은 백 명의 사람이 읽으면 백가지의 해석이 나올 수 있어야 한다. 모두가 다른 환경에서 성장해 왔고 성격도 다르기 때문에 생각도 틀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를 통하여 얻고자 하는 것은 있다면 그것은 사유思惟이다. 많은 추상적인 경험을 시를 통하여 표현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정립해 나가는 것이다. 그러할 진데 옳고 그름이 있을 수 없다. 시를 써서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 싶은 것일까? 그리하여 남는 것은 무엇일까?
시작詩作은 끊임없는 자신과의 갈등을 해소하는 방편은 아닐까? 인간으로 살아감에 있어 추구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짚어보고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며 해결할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와 끝없이 싸우는 과정인 것이다. 독자들에게 다가가기 위하여 시낭송회를 여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독자들을 만족시키기 보다는 작가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라는 뉘앙스가 더욱 진하게 느껴진다. 아직도 시작활동은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글을 통하여 독자에게 다가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끔씩 우리는 영화관을 찾기도 하지만 그 영화가 문학작품을 토대로 했다고 하지만 영상화가 되면서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사유적 요건은 없어져 버린다. 마찬가지로 시낭송은 독자들로 하여금 눈으로 읽으면서 머릿속에 그리는 사유적 활동을 멈추게 할는지도 모른다.
식민사학에 젖어 있는 친일적 시를 읽으면서도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고 그렇게 하지 않을 방도는 없었는지를 생각해 보자. 그러기 위해서는 친일문학도 꼼꼼히 읽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이 또 다시 우리 문학사에 크나큰 오류를 범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찌하였든 책과 내 눈과의 거리만큼 한정된 공간에서 작가의 표현 하나하나를 곱씹어 보는 것 또한 좋은 경험이 아닌가. 이제 젊었던 시절처럼 책을 읽으면서 그 줄거리를 파악하는 것 보다 표현에 더욱 눈길이 간다. 마음에 쏙 드는 표현이 있으면 그 곳에 눈길이 멈추어버린다. 초점은 흐려지고 망상의 세계를 떠돌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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