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선생이다 / 황현산
문학평론가이자 불문학자 황현산 산문집이다. 1980년대부터 2013년 오늘에 이르기까지 삼십여 년의 세월 속에 발표했던 글 가운데 추려서 담았고 각 산문의 끝에는 글을 쓴 연도가 표기되어 있다. 주옥같은 글을 이곳에 다 옮길 수는 없어서 책을 읽으면서 줄을 그었던 부분을 여기에 옮겨 본다.
살아감에 있어서 비겁하다고 생각하지 못했던 자신의 행동을 들춰볼 수 있는 문장이 있다. “현실을 현실이 아닌 것으로 바꾸고, 역사의 사실을 사실 아닌 것으로 눈가림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상상력이 뛰어나기 때문이 아니라 비겁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의 보자기만한 시간이 현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름될 것만 같다.
폭력과 관련해서도 내가 받았던 폭력을 어느 정도 압박할 수 있는 지위에 오르게 되면 옛 일을 잊어버리고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의심스러운 것을 믿으라고 말하는 것도 폭력이며, 세상에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살아가는 것도 따지고 보면 폭력이다.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폭력이 폭력인 것을 깨닫고, 깨닫게 하는 것이 폭력에 대한 지속적인 처방이다.”
세월의 흐름에 거스르는 일에 대한 경고의 말로 “협객은 경공술로 날아가도 벼는 천천히 크고 천천히 익는다. 그러고 보면 늙은 농부야말로 눈먼 무사 따위에 비할 수 없는 강호의 협객이다.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라는 말에는 우리가 어떤 난관에 부딪히고 어떤 나쁜 조건에 처하더라도, 민주주의의 이상에 가장 가깝게 한 걸음이라도 더 나아가려고 노력한다는 뜻이 포함될 뿐만 아니라 그 뜻이 거기 들어 있는 다른 모든 뜻보다 앞선다. 민주주의에 다른 수식어를 붙일 수 없는 이유가 그와 같다.”고 말하고 있다. 행여나 민주주의라는 체제가 당연히 나에게 들어와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우는 말이다.
이 모든 사실에 있어 늘 긴장해야함을 강조하면서 “이런저런 사건들이 늘 ‘어느 날 갑자기’의 형식으로 찾아오는 곳에서 사람들의 생각이 변덕스럽지 않기는 어렵다. ‘어느 날 갑자기’ 앞에서 놀라지 않게 하는 일은 인문학이 늘 내세우는 일이고, 사실 내세워야 하는 일이다.”라고 하면서 항상 준비된 사람으로서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선생이 시와 관련해서 쓴 산문 <시가 무슨 소용인가>를 요약해 본다. 인문학이 강조되고 있는 요즈음 시를 가까이해야만 이유를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대중가요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다 보면 그 가사가 아름다워 “이건 시다”라고 말할 때가 있다. 일반 대중뿐만 아니라 시의 전문가도 그렇게 찬탄한다. 그러나 어떤 시인이 정작 이런 시를 들고 나오면 사정은 사뭇 달라질 것이다. 어제는 대중가요의 기사를 시라고 불렀던 전문가들이 오늘은 그 용감한 시인을 곁눈으로도 쳐다보려 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사실 이 미묘한 차이는 그것을 판단하는 사람의 변덕스런 감정이나 개인적 기호에 따른 주관적 견해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문화향유와 전수의 제도가 바뀌면 시와 시 아닌 것을 가름하는 전문가적 기준 역시 바뀌게 된다. 아주 불행한 경우에는 그 기준이라는 것이 문단을 지배하는 소수의 권력자들의 농간으로 결정될 수도 있다.
시의 말이 지니는 독창성과 그 감정의 깊이를 짚어 시인은 시인을 첫눈에 알아볼 수 있다고 그들은 믿는다. 김수영 시인도 그렇게 말했다. 이 차이에 대한 인정이 시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긍지를 만들고 시단 전체의 내부적 결속으로 이어진다. 옳건 그르건 문화적 이상이 거기에 있고 고급문화에 대한 개념도 거기서 나온다.
그러나 이 긍지가 시인에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자신에게 특별한 말을 할 수 있는 능력, 곧 시를 쓸 수 있는 천부적 재능이 있다고 믿었기에 불행해진 사람들은 우리 시대에도 많다. 전답을 팔아 일곱 권의 자비 시집을 내고 파산한 사람도 있다. 잘 나가던 직장을 버리고 시 쓰기에 전념하기로 마음먹은 결과로 가족을 잃고 떠돌이가 된 사람도 있다. 시만 쓰지 않았다면 똑똑했을 사람이 어쭙잖은 시를 써서 바보 소리를 듣는 경우는 수도 없이 많다.
시가 인간의 불행을 끌어안고 감동을 준다는 말을 자주 듣는데 그거라면 대중가요 한 곡이나 연속극의 대사 하나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아름다움에 관해 말한다면 여기저기 광고방송에만 해도 가슴이 뭉클할 정도로 빛나는 장면이 널려 있지 않은가. 시가 그 위에 더 무엇을 한단 말인가.
시인이 제 몸을 상해가며 시를 쓴다는 것은 인간의 감정을 새로운 깊이에서 통찰한다는 것이며, 그것들을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형식과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저 대중 소비적 ‘시’의 소구력과 성공에 비한다면 새로운 감수성과 이미지의 생산이 목표인 본격적인 시의 수요는 거의 없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미미하다. 그러나 시가 생산한 것은 어떤 방법과 경로를 거쳐서든 대중물들 속에 흡수되고 전파된다. 시는 낡았고 댄스 뮤직은 새롭다고 믿는가. 사실을 말한다면 시에서는 한참 낡은 것이 댄스 뮤직의 첨단을 이룬다.
황현산 선생의 생각을 만나는 시간이었다. 자칫 외면해버리기 쉬운 일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선생은 나를 길러준 이 강산을 사랑하였고, 도시와 마을을 사랑하였고 밤하늘과 골목길을 사랑하였으며, 모든 생명이 어우러져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꿈을 꾸었다. 그 생각들이 글로서 독자들을 만나게 되었다. 깊어가는 가을의 길목에서 황현산 선생의 생각을 읽으며 지금껏 무작정 살아왔던 날들에 대하여 생각해 보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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