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딸 / 김사이
어느 날 학교 파하고 돌아오니
안방에 아버지를 닮은 낯선 할머니가 앉아 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친할머니라 한다
등허리로부터 소름꽃이 토도독 피어오르고
놀라 엄마, 엄마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평온한 시간이 지루했던 모양이다
푸른 태양이 숨어버리고
그렇게 할머니와 이상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칼바람보다 더 냉랭한 말투
쳐다보는 눈빛은 얼마나 매서웠던지
엄마가 늘 쓰는 욕에도 단련되지 못했거늘
할머니는 욕에 가시를 박았는지
들을 때마다 가슴이 쩍쩍 갈라지는 것이다
잡년 개 같은 년 씨알머리 읍는 년아
왜 그랬을까 모를 일이었다
아랫집 할머니처럼 우리 강아지 우리 강아지 하며
보듬어주길 바란 적 없는데
부지깽이 들고 쫓아다니는 것이 화풀이란 것쯤 안다
아버지는 소나기처럼 한 번씩 들이쳤다 가고
어머니의 외출은 기약이 없어졌다
치통보다 곤혹스러운 시간이 흐른 뒤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한동안 불편하고 따가웠던 바람의 정체에 대해,
어머니가 처와 자식 딸린 남자를 사랑한 것을
내가 바람의 딸인 것을 이해하는 순간
몸 깊은 곳으로부터 꽃망울이 터졌다
첫 생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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