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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내가 시를 쓰는 것은

by 1004들꽃 2008. 5. 28.

내가 시를 쓰는 것은


  학교에서 국어시간에 시를 배우면서 보통의 경우에 시 한 편을 두고 그 시가 자유시이고 서정시이고 또는 운율이 어떻고 각 연마다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는 무엇인지, 자기 반성, 자아 성찰 또는 현실도피 등 글에 대한 해부를 시도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시를 마음으로 읽는다기 보다 시의 해석을 외우는 것이 보편적인 현상이다. 그리하여 시험문제에 출제되어 문제를 풀 수 있으면 그 시를 아는 것이 되고 문제 풀기에 실패하면 그 시를 모르는 것이 되어 버린다. - 극단적인 예라고 하겠지만 -
  나의 경우에는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한 관계로 국어 수업을 거의 듣지 못했고 그 이후에도 그러한 기회를 접하기 어려웠던 게 사실이다. 글을 쓰면서 나는 생각한다. 왜 글을 쓰는 것인가. 글이란 무엇인가. 글을 쓰면서 나에게 주어지는 것은 무엇인가.
  어린시절 나의 곁에 가장 많이 있었던 것이 루이제 린저의 작품들이다. 지금은 줄거리마저 생각나지 않지만 그 당시에는 꽤나 빠져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책 속에서 주인공이었던 사람들의 분위기와 성격, 그리고 그들이 살고 있었던 집과 그들을 둘러싸고 있었던 사람과 풍경들이 눈 위로 어렴풋이 스쳐지나가곤 한다. 그녀의 작품 중에서 여전히 주변을 맴돌고 있는 책이 있다. 그 작품도 마찬가지로 몇 장면이 생각날 뿐이지 전체적인 줄거리는 거의 생각나지 않는다. 생의 한가운데를 처음 접했을 때는 책이 세로쓰기로 출판되었을 때였는데 한 번 읽고는 책을 잃어버렸고 두 번째로 접하게 된 것은 가로쓰기가 보편화 되었을 때였다. 그 책을 읽고 한 동안 멍하니 책 속에서 사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몇 년이 지난 후 다시 읽을 때는 책속의 대화에 집중했었고 다시 몇 년이 지난 후에는 주인공 니나의 성격을 파악하는데 집중했었다. 이토록 하나의 책을 두고 연연해하는 것은 책 속의 여주인공에게 심각하게 빠져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작가의 연보를 보고 다시 책을 읽었을 때는 니나와 린저를 동일시하기에 이르렀고 오래전부터 머릿속에 구름처럼 떠돌던 이상적인 삶을 구체화할 수 있었다.
  한 작품이 이렇게 지속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잡고 있다는 것은 쓴 사람과 읽는 사람의 마음이 동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의 삶이라는 것은 다양한 것으로 모든 것에 동일한 감정을 가질 수 없듯이 글 또한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렇게 받아들이는 사람마다 다른 감정을 느낄 것인데 시험이라는 것으로 정답을 정해 버리고 정해진 답이 아니면 틀린 것으로 치부되어지는 현실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지.
  물론 글을 쓰면서 자기반성을 하거나 남들에게도 자아성찰을 하게 만들 수도 있고 글을 쓴 다음 자신을 돌아보면서 새로운 각오를 다지는 계기를 만들 수도 있다. 그렇지만 글이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자신의 삶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어떻게 쓰든 그것은 자신의 삶이 반추되는 것이지 결코 타인의 삶을 나의 삶으로 가져오는 것은 아니며 어떻게든 가져왔다 하더라도 자신의 눈으로 본 타인의 삶인 것이지 진정한 상대방의 삶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글을 타인에게 봐달라고 한다. 부탁을 받았을 때 거절하지 못하겠지만 표현방법이라든지 내용의 수정은 불가능하다. 그의 삶을 살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단지 오타를 발견한다든지 띄어쓰기가 잘못되었다든지 맞춤법에 어긋난 몇몇 부분을 지적할 수 있을 뿐이다.
  타인의 글을 읽을 때 순수한 감정으로 읽을 수 있어야겠다. 대부분의 경우 작가는 말이 없기 때문에 - 사실상 작가를 직접 만나보기란 어려운 일이다 - 자신의 삶에 비추어 글을 읽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에 와 닿으면 그것으로써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판자촌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외제 승용차가 필요 없듯이 부유층에 속하는 자들에게 재래식 화장실이 필요 없는 것과 비슷한 이치가 아닌가 생각된다.
  나는 글을 쓰면서 생각한다. 글을 쓰면서 나의 이름이 알려진다는 것 보다 나 스스로의 반성을 위한 것이라고. 내가 살아온 길이며 앞으로 살아가야 할 길을 스스로에게 제시하는 입장도 있다. 살아가면서 어떤 사람에 대하여 미운 감정을 억지로라도 가지게 되면 그 사람은 어느 순간엔가 미운 사람으로 마음속에 고착될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적어도 나쁜 감정은 쌓지 않아도 될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타인의 수필을 읽으면서 나도 이렇게 멋진 글을 한 번 써 보아야지 생각하지만 그렇게 쓸 경우 그것은 나의 삶이 아닌 타인의 삶이기 때문에 거짓말이 되는 것이다. 살아온 과정이나 그 속에서 다져진 사고가 다르고 그것 때문에 살아가야할 미래도 다르다. 나도 타인이 될 수 없고 타인도 내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쓴 글을 넋두리라고 이야기 하지만 - 나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넋두리임에 틀림없다 - 그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는 것이 나의 삶은 그보다 더 나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 시를 쓴다. 그것은 내 삶의 기록이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이 될 것 같아서다. 쓴 글에 대해서 명백한 오류가 아닐 경우에는 수정하지 않는 것도 그 당시에 내가 쓴 글은 그 당시의 나를 대변해 주기 때문이다. 바람소리에 이는 풀잎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고 가끔씩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기도 하면서 아이들의 투정에 짜증도 부려보는 게 살아가는 것 아닌가. 그 모든 일들이 남이 아닌 나에게 일어났기에 특별한 것이고 그것은 소중한 나의 삶이다.


의령문학 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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